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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급 에스퍼를 피하는 방법 (112)화 (112/112)

#112

반테온이 다시 눈을 떴을 땐 이미 해가 진 저녁이었다. 이렇게 오늘도 또 빈둥거리며 오후를 낭비했구나, 하는 생각에 옆을 보자 창가에 앉은 델로즈가 보였다.

밝게 뜬 보름달을 후광처럼 두르고 앉은 실루엣 가운데 금색 안광이 빛나고 있었다. 인기척도 없이 조용히 멈춰있는 모습을 보자 그제야 잊었던 사실이 떠올랐다.

인간 같지도 않은 녀석이라는 생각을 종종 했는데, 진짜로 인간이 아니었지. 로한처럼 델로즈도 인간이 아니라면, 그는 지금 무슨 생각으로 반테온의 곁에 있는 것일까.

“이미 새벽이야. 더 자.”

“넌 왜 안 자고 있어?”

“네가 깨는 걸 보고 가려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으니 새벽 중간에 깰 거란 예상은 할 수 있어도, 몇 시인지는 알 수 없을 텐데. 그럼 내일 아침이 될 때까지 기약 없이 기다릴 생각이었던 걸까.

오래 누워있어서 뻐근한 허리를 들어 등을 침대 헤드에 기댔다. 어깨부터 등까지 온몸이 아팠다. 허리가 뻐근한 건 오래 누워서가 아닐지도 몰랐다. 통증과 별개로 오랜만에 깔끔하게 욕구를 푼 몸은 개운했다. 실컷 잔 덕에 피로도 느껴지지 않았다.

편한 각도를 찾기 위해 몸을 바스락거리자, 델로즈가 다가와 내려간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줬다. 그러곤 다시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옆자리를 손으로 톡톡 치자 기다렸다는 듯 델로즈가 옆에 앉았다.

가까이에서 보자 델로즈의 표정이 그리 좋지 않았다. 환자를 상대로 실컷 해놓고, 왜 기분이 우울한 건지.

“넌 표정이 왜 그래?”

“네가 자는 모습을 보면 기분이 좋지 않아.”

자는 모습에 불평하면 어떻게 맞추라는 걸까. 덩달아 불만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니 델로즈가 고개를 돌렸다.

“계속 깨지 않을 것 같아서.”

“…….”

여기저기 다 상처투성이다. 흉이 남은 건 육체만이 아니었다. 정작 오랫동안 정신을 잃은 반테온은 후유증이 남지 않았는데. 주변 사람들은 멀쩡한 껍데기 속에서 녹슬어 버렸다.

반테온은 엉망이 된 뒷머리를 쓸며 답했다.

“그냥 자는 거야. 이제 멀쩡하다고 했잖아.”

“너와 이렇게 마주 보고 대화하는 현실도 아직 꿈같다. 지금도 꿈속이면 어떡하지? 네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그게 현실이라면….”

조용히 읊조리던 델로즈가 손을 뻗어 반테온의 팔을 잡았다. 촉감을 느끼듯 손끝으로 문질렀다.

“…꿈에서 누워있는 네가 보여. 차라리 내겐 그게 더 현실 같지.”

“그런 꿈을 자주 꿔?”

“매일 밤 보고 있지.”

그래서 자신이 잠에 든 걸 지켜보다가 잠에서 깬 걸 확인하면 겨우 떠나는 거군. 그냥 자신과 더 가까워지려고 그러는 줄 알았다. 이런 불안함을 안고 있다는 건 몰랐으니까.

마음 같아선 땅속으로 그만 파고들고 행복한 미래만 꿈꾸면 안 되겠냐고 따지고 싶었다. 이제 아무런 위협도 없을 거라고. 즐거운 일만 계획하자고 말하고 싶었지만, 현실은 그리 쉽지 않겠지.

반테온에겐 기억도 없는 몇 달간이 델로즈에겐 지옥처럼 버티는 나날이었을 테니까. 어쩔 수 없기에 그저 쓰게 웃었다.

“누울래?”

옆쪽 이불을 들었다. 시원한 밤바람이 몸에 시원하게 닿았다.

“…….”

조금 망설이던 델로즈는 거대한 몸을 조용히 움직여 반테온의 이불 속으로 들어왔다. 옆에 사람이 자는 건 익숙하지 않지만, 한 번 시도해봐도 좋겠지.

잠들지 못하는 자신의 에스퍼를 밤새 불안에 떨게 만드는 것보단, 불편한 걸 조금 참는 편이 나을 테니까.

이런 생각을 하는 걸 보면 자신도 이미 중증이라고, 작게 읊조리며 델로즈의 등을 토닥였다.

“이제 자. 꿈에서 깼을 때 내가 바로 보이면 괜찮겠지.”

꿈이 현실 같다면, 더 현실 같은 감각을 주면 된다. 반테온의 손짓을 느끼며 델로즈의 눈이 지긋이 감겼다가 다시 뜨였다. 멍하니 먼 곳을 바라보던 고개가 반테온의 가슴팍에 지그시 올려졌다. 은근하게 느껴지던 무게가 호흡에 따라 안정적으로 흔들렸다.

“이 자세가 마음에 들어?”

“너무 행복해서 무서울 정도야.”

“좋으면 좋은 거지. 무서울 건 뭐야.”

“언젠가 끝날까 봐.”

델로즈는 팔을 뻗어 반테온의 허리를 감아 안았다. 상체를 자신보다 작은 반테온에게 묻듯이 달라붙었다.

“부탁이 있다.”

고개도 들지 않고 웅얼거리는 질문에, 응답하듯 손으로 토닥였다. 잠시 뜸을 들이던 델로즈가 말을 꺼냈다.

“혹시라도 네 마음이 변한다면, 나에게 질린다면 바로 말해.”

“…….”

“매정하게 굴면서 밀어내려고 하지 말고. 그건 너무 힘드니까.”

솔직하게 토로하는 말에 한숨이 나왔다. 이건 반테온의 죄였다. 그의 마음을 알면서 오랫동안 내버려 둔 자신의 업보였다.

그땐 절대 받아줄 일이 없다고 굳게 다짐했었으니까. 헛된 기대를 주는 것이 가장 나쁘다고. 그 당시엔 현명한 행동이라고 생각했었다.

상황은 바뀌었다. 결국, 두 사람은 서로를 인정했고 앞으로 남은 시간을 함께 가려면 과거 역시 받아들여야 하니까.

델로즈에게 남아버린 불안도 반테온이 수습해야 할 문제였다. 자신의 가슴팍에 묻힌 델로즈의 얼굴을 다정하게 감싸 올렸다.

천천히 올라오는 눈동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싫다고 이야기하면 그땐 어떻게 할 건데?”

짧은 질문일 뿐이었다.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를 가정하는 질문에 델로즈의 눈동자가 아프게 일그러졌다.

“…그땐 내가 먼저 떠날게.”

“어디로 떠나려고. 나 없으면 가이딩도 못 받으면서.”

그 말에 단단한 입매가 꾹 다물렸다. 또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반테온은 고개를 숙여 아프게 일그러지는 델로즈의 눈 위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가볍게 양 눈에 키스하고 고개를 들었다.

“가볍게 여기지 마. 두 번이나 구한 목숨인데 이제 와서 놓을 리가 없잖아.”

매번 함께 위험해질 걸 알면서도 몸을 바쳐 구한 생명이다. 처음엔 수도에서 폭주하면 안 된다는 위기감에 움직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지막. 사막에서 그에게 몸을 맡겼을 땐 반테온의 머릿속에 그런 계산 따위 남아있지 않았다.

그냥 구해야 한다. 이대로 보낼 수는 없다는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입 맞춘 눈을 느리게 감았다 뜨는 델로즈의 동작이 보였다. 천천히 올라가는 그의 입꼬리가 벌어지며 슬며시 웃었다.

“두 번이 아니야. 세 번이다.”

“뭐?”

뒤늦게 델로즈의 말을 이해한 반테온의 눈이 커졌다.

“첫 폭주 때 나를 구한 가이드도 반테온. 너였잖아.”

숨이 잠시 멎었다. 홉뜨인 눈 아래로 몇 가지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사막에서 한 번 그를 구했고, 센터 도서관에서 폭주 중인 그를 구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안개 낀 보름달이 뜬 날.

센터 외진 수풀길 사이에서 폭주하려는 델로즈를 처음 만났었다.

“안개가 자욱하던 밤. 젖은 수풀 사이에서 처음 봤지”

세상에서 오직 두 사람. 반테온과 델로즈만 알고 있던 공간이었다.

“너…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

델로즈는 말없이 웃으면서 다시 반테온을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침대 헤드에 기댄 몸이 자연스럽게 끌려 내려가고, 완전히 침대에 눕혀진 몸 위로 델로즈의 몸이 올라왔다.

달빛을 등지고, 누운 반테온을 내려다보는 모습은 어딘가 기시감을 느끼게 했다. 만약 반테온의 위치가 그날의 델로즈였다면, 그가 봤을 풍경이었다.

“처음엔 환상이라고 생각했어. 고통이 만든 허상일 거라 여겼는데, 손에 닿자마자 본능적으로 알겠더군. 잡아야 한다고. 내가 평생 잡아야 할 것이 여기 있다고.”

과거를 회상하며 쓸쓸하게 말하는 델로즈의 말을 들으면서도, 언제 알게 되었냐는 질문이 강하게 머릿속을 맴돌았다. 충격적인 말에 눈을 크게 뜬 반테온의 표정이 사랑스럽다는 듯, 델로즈도 반테온의 눈꺼풀 위에 키스했다.

사탕을 녹이듯 반사적으로 감은 눈 위를 부드럽게 핥아 올리더니 웃었다. 반테온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절대 놓지 않겠다는 듯 다정하면서도 강한 손길이었다.

“너 언제 알았어? 처음부터 알았던 거야?”

“그게 중요해?”

“당연히 중요하지. 내가 그것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

…는 지 아느냐고 묻던 입이 닫혔다. 델로즈를 피하고자 최선을 다했다는 말을 굳이 할 필요는 없겠지. 반테온이 하려는 말을 눈치챘는지 델로즈가 원망하듯 목을 약하게 깨물었다. 자국도 남지 않게 잘근거린 후에 치료하듯 핥는 행동에 웃음이 튀어나왔다.

그래. 언제면 뭐가 중요할까. 어차피 이렇게 될 것이었는데. 지금 손에 쓸리는 검은 머리카락의 감촉이 마음에 드니까. 그걸로 다 잘된 것 아닐까. 아직 피하느라 고생했던 시간이 조금 원망스럽긴 한데, 그 감정으로 이 완벽한 순간을 망칠 필요는 없었다.

“델로즈. 우리 매칭 할까?”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기울이는 델로즈를 보며 말했다. 델로즈와 반테온은 아직 서류상으로 임시 매칭 파트너였다. 법적으로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하는, 그저 다른 발현자보다 우선권을 가지는 임시 계약 관계.

“센터에 가서 정식으로 매칭 하자. 내일 해가 뜨는 대로 바로.”

어둠 속에서 빛나던 황금빛 눈이 행복하게 휘었다. 괜찮을 것 같았다. 초승달처럼 휘며 빛나는 저 금색 눈동자를 보면서, 평생 이렇게 살아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미래가 될 테니까.

강하게 몸을 안아오는 손길을 맞이하며, 뜨거운 입술에 키스했다.

SS급 에스퍼를 피하는 방법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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