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급식충의 우상 '싸비'
“네, 네. 아……. 긍정적으로 검토는 해보겠습니다.”
전화가 왔다. 이때까지와는 조금 다르다. 크루, 혹은 BJ가 아닌 파프리카TV 본사 측이다.
‘애가 탔나 보네.’
몇몇 크루들이 따라 한답시고 싸지른 똥, 그 뒤처리에 곤욕을 치르고 있다. 그래서 나에게 연락한 것이다.
<비정기적이라도 좋으니까 근 시일 내에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제 의사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걸 어떻게든 좀.>
운영자와 직접 연락을 주고받는다. BJ에게는 그다지 드물지도 않은 일이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인기 BJ에 한정된다.
‘아무래도 융통성이 많이 적용되거든.’
굉장히 한국 기업스럽다. 특히 파프리카TV에서는 일상다반사다. 쉽사리 통과되지 않는 것도 운영자의 말 한두 마디면.
<오정환 님 방송이 많이 성장하셨잖아요.>
“네, 뭐.”
<앞으로도 방송을 위해서라도 베스트 BJ, 그리고 파트너 BJ까지도 하셔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려면 우리랑 잘 지내야 하지 않겠냐? 내용은 그렇지 않지만 내포된 의미는 대충 맞을 것이다.
‘단순히 꽂아주겠다. 그런 의미로 해석하는 건 하수고.’
매우 애석한 일이긴 하나 파프리카TV는 기본적으로 정치판이다. 설사 자신이 이 정치에 끼기 싫다! 그렇다고 해도 알아야 한다. 모르면 당해야 하니까.
알고 안 하는 것과 그냥 안 하는 건 천지 차이다. 적절한 줄타기에 성공하면 교섭에서 유리한 입장에 설 수 있다.
“베스트 BJ가 되면 저도 BJ 일을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있겠네요.”
<어, 지금까지는 생각을 안 하셨고……?>
“네.”
<네? 아, 정말 그래요? 저는 당연히 전업 BJ를 하시는 분으로 알았는데…….>
어렵지도 않은 일이다. 내가 BJ 짬밥이 몇 년인데. 이 폭퐁우 같은 세계에서 살아남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물며 경력도 없는 직급 낮은 운영자. 적당히 구워삶아 원하는 방향으로 이끈다. 사실 줄타기를 성공했다기보다는 난이도 자체가 쉽다.
‘지금 정치판은 정말 애교 수준이야.’
차후에는 크루들이 너무 커져서 오히려 운영자들보다 입김이 거세진다. 아니, 운영자들이 크루에 속하게 된다는 표현이 옳다.
주객이 전도된다. 정말 어처구니없고, 우스꽝스럽지만 그것이 현실. 그렇게 되기 이전의 세계라면 곤란할 것도 없는 오후의 티타임이다.
<오정환 님이 단풍잎스토리의 시청자 상승에 큰 기여를 하시기도 했고 저희가 조만간 좋은 소식으로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그럼 저도 좋은 소식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아! 그럼 정말 저희는 감사하죠~>
여중생 콘텐츠.
콘텐츠라기보다는 그냥 경험이었지만 현 시점에서는 그렇게 해석이 되는 게 사실이다.
‘따라 하는 사람이 워낙 많았으니까.’
그렇게 될 걸 알고 있었다. 한국이 원래 좀 그래. 그 이전에 대기업 BJ들의 종특이다.
이름값 낮은 BJ들이 뭔가 성공했다? 이 콘텐츠 괜찮은 것 같다? 그러면 바로 베껴오거나 비슷하게 해서 따라 한다.
방송 어그로가 분산될 수밖에 없다. 본래 얻을 수 있는 시청자를 얻지 못한다. 그뿐만 아니라 골치 아픈 문제도 하나 생기고 만다.
‘필연적으로 싸움이 생기지.’
그리고 그 싸움은 옳고, 그름이 문제가 아니게 된다. 파워가 센 쪽이 무조건 이겨. 더러운 난장판에 봄이를 끼어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내 방송적 성장에도 차질이 생긴다. 적은 기본적으로 만들지 않는 편이 좋다. 굳이 맞서야 한다면 그건 승리를 장담할 수 있는 시점이다.
―던파극혐 님, 별풍선 100개 감사합니다!
한 달 동안 건빵이었는데 처음으로 결제해서 팬 가입합니다ㅎㅎ
“100개 팬 가입 감사합니다. 던혐 님 자주 봤는데 이제야 팬 가입하시네~ 앞으로도 자주 와주세요.”
―훈훈하네
―100개 팬 가입은 ㅇㅈ이지
―정환아 단풍잎 방송해야 한다…….
―진짜 단풍잎 방송 볼 거 없음ㅋㅋㅋㅋㅋ
그렇기에 최근 방송.
주 콘텐츠인 단풍잎스토리를 하고 있다.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는 표현이 더없이 적절하다.
‘고정 시청자층도 없이 대형 콘텐츠 진행하면 오래 못 가.’
이해 타산적으로만 생각해 보자. 봄이를 무리하게라도 꼬셔서 방송을 했다? 그러면 당장의 시청자는 몇 배로 늘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그것이 유지가 안 된다면 대형 크루와의 싸움에서 못 살아남는다. 이를 해내려면 고정 시청자층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스토리. 그들이 나를 지지할 이유 말이다. 사건사고를 겪고, 자신이 그 조연 중 하나가 돼야 몰입감이 생긴다.
―메이플아재 님, 별풍선 1, 472개 감사합니다!
힘내야 혀ㅠㅠ
“아, 회장님 일사천리 개……. 회장님의 마음처럼 저의 방송도, 회장님도 일사천리로 풀렸으면 좋겠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와 켜자마자 별풍선이ㄷㄷㄷ
―정환이는 받을 만하지
―기존 시청자들 생각해서 단풍잎 해주는데
―그래도 봄이는 보고 싶다…….
고생과 고난을 함께한다. 그래야 비로소 동질감이 싹튼다. 고정 시청자란, 콘크리트란 그렇게 생기는 것이다.
‘이런 때야말로 고정 시청자층을 키울 기회야.’
나는 아직 방송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지나치게 인기, 인기에 목을 매다가는 언젠가 내 꾀에 내가 넘어간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격언은 새겨들을 만하다. 결정적으로 애초에 할 게 없다.
봄이도 요즘 바쁘다고 자기 할 일 하고 있고. 나도 그사이에 방송을 해야 하니 단풍잎이 가장 알맞다.
방송이라는 건 매일매일이 특별할 수 없다. 기본 콘텐츠가 필요하고, 나에게는 그것이 단풍잎이다.
방송의 성장도 좋고, 돈도 좋지만 초심은 항상 따라붙어야 한다.
“오랜만에 진행하네요. 여러분 탄환 준비되셨죠?”
―오오!
―카쿰 격파가 신호임
―미리 쏘는 놈들 블랙 해야 함 ㅡㅡ
―오정환! 오정환! 오정환! 오정환!
하지만 모든 일이 일사천리일 수는 없었다.
* * *
스카니아는 매우 오래된 서버다. 긴 역사만큼 유저는 교체되어 왔지만, 그 중심에는 언제나 하나의 길드가 우뚝 서있다.
『베르사유』
스카니아 1위 길드로 최대, 최고의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는 레이드를 주로 뛰는 고레벨들은 물론, 대다수라 할 수 있는 일반 유저들까지 예외가 아니다.
올비핫세[CH 01]: ☆―┐☆―┐☆―┐
올비핫세[CH 01]: │아││싸││비│
올비핫세[CH 01]: └―♡└―♡└―♡
펜어[CH 01]: ☆―┐☆―┐☆―┐☆―┐
펜어[CH 01]: │만││렙││축││하│
펜어[CH 01]: └―♡└―♡└―♡└―♡
REAL꼬마법샤[CH 01]: ♡ 베르사유 초대 길마!
REAL꼬마법샤[CH 01]: ♡ 단풍잎스토리 레전드!
REAL꼬마법샤[CH 01]: ♡ 만렙 찍느라 고생했어요!
잉퐁z[CH 01]: ┌☆┐┌――┐┌――┐┌――┐
잉퐁z[CH 01]: ┃싸│└―┐││┌┐││┌┐│
잉퐁z[CH 01]: ┣―┤┌―┘│││││││││
욱모s[CH 01]: ┃비┃│┌―┘││││││││
욱모s[CH 01]: └♡┘│└―┐│└┘││└┘│
욱모s[CH 01]: (ㅇ△ㅇ)↗―┘└――┘└――┘
…
…
잼민이와 급식충의 우상이라 할 수 있는 이가 속해있으니까. 방금 전, 그녀가 단풍잎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는 순간을 맞이했다.
베르사유 길드가 단합하여 채팅 창을 시끌벅적하게 만들고 있는 이유다.
단풍잎스토리 특유의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전 채널에 자신의 채팅을 띄우는 고성능 확성기로 축하한다.
이렇듯 유명 인사라면 확성기 Art로 그림을 그리는 일도 드물지 않다.
소년마하[CH 17]: 만렙은 축하드리는데 고확 도배 좀 멈춰주세요.
메론맛오징어[CH 11]: 고확 살 돈 모아서 선물이나 사줘라, 메창 새끼들아만렙강아지[CH 05]: 메창인지 M창인지 어휴…….
물론 민폐다. 아무리 경사라도 적당히 해야지. 1절, 2절, 3절에 뇌절까지 해버리며 거의 5분 동안 채팅 창을 마비시키고 있다.
짜증이 난 몇몇 유저들이 똑같이 고성능 확성기로 항의한다. 그 항의. 분명 틀린 것은 아니지만 철저하게 묵살될 수밖에 없다.
싸비빠돌이[CH 03]: 어디 감히 싸비 님께…….
급식매니아[CH 14]: 가이드북도 안 본 찐따들인가? ㅋㅋ강남일찐[CH 07]: 우리 스카니아의 자랑 아싸비와 오정환~!!
괜히 잼민이와 급식충의 우상이 아니다.
아싸비는 스카니아는 물론 단풍잎스토리 전체를 따져도 한 손에 꼽히는 초특급 네임드. 공식 가이드북은 물론 웹툰까지 제작하며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팬들이 어마어마하게 많다. 스카니아 유저의 절반 정도는 그녀를 보기 위해 서버를 결정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분명 얼마 전까지는 그러했다.
REAL꼬마법샤: 싸비 언니, 다시 한번 축하요!
i즐꺼려i: 화력 보소ㄷㄷ
n시프1: 싸비 님인데 기본이지
n시프1: 근데 오정환은 뭐야?
서버 내에서 유명하다. 하지만 그것은 고레벨층에 한정된다. 오정환의 입지는 끽해야 아는 사람만 아는 레이드 고수였다.
최근에 이르러 완전히 달라졌다. 파프리카TV의 BJ로 데뷔. 눈 깜짝할 사이에 아싸비에 준하는 스카니아의 네임드가 되었다.
상아12: 요즘 BJ 한다고 깝치고 다니잖아
n시프1: ㄹㅇ? ㅋㅋㅋ
눈꽃빙수a: 나 걔 싫음
은인: 일반 유저들한테 카쿰의 투구 나눠주고 꼴값을 떨더라
그것이 마음에 안 든다. 안 들 수밖에 없는 집단이다. 베르사유는 스카니아 1위 길드임과 동시에 카르텔 최상위에 위치한다.
길드의 힘과 아싸비의 영향력이 합쳐진 결과다. 그것이 위협받는다.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오정환이 거슬린다.
은인: 비성수기라 안 그래도 똥값인데 무료로 나눠주고 ㅈㄹ이야 법사매직112: 착한 척하는 거지 A급l표도l: 쟤네 공대 애들 제재하면 안 됨?
은인: 솔쿰이래 ㅅㅂ
A급l표도l: …….
단순한 흥미, 혹은 재미로 한 게임의 1위 클랜을 유지할 리 없다. 그로 인해 떨어지는 이권. 그 달콤한 과실은 한번 맛보면 헤어 나오지 못한다.
때문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어떻게든 그의 영향력을 축소시켜야 한다. 하지만 억지로 밀어붙이다가는 역풍을 맞을 수도 있다.
아싸비: 걔도 팬이 있으니까 섣부르게 일 벌이지 마
돋뜯긴악마: 네 이모!
아싸비: 뒤질래?
억지가 아니라면 된다. 길드 단위의 항전은 대의명분이 중요하다. 별것도 아닌 일로 싸우고 싶은 병사는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
법사매직112: 와 진짜 개빡치네 ㅡㅡ
n시프1: 왜?
법사매직112: 아니, 설이가 텔 갔다가 차별당했대. 여자라고!
베르사유 길드 채팅 창.
얼마 지나지 않아 사건이 생긴다. 길드의 한 유저가 레이드에 갔다가 망신을 당했다.
이픈설이S2: 저 진짜 하라는 거 다 하고~ 평소대로 잘했는데~ 자꾸 트집 잡히다가 쫓겨났어요 ㅠㅠ n시프1: 대체 어떤 놈이 그랬어??
돈뜯긴악마: 우리 베르사유 길드한테 감히!
그것도 여성 유저가.
길드 내 남성 유저들이 들고 일어난다.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흑기사를 자처하는 이가 줄을 선다.
길드의 위신이 달려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1위 길드를 유지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스카니아에서 자신들을 대적할 이가 없게 하기 위함이다.
돈뜯긴악마: 대체 어떤 놈이 그랬어!
이픈설이S2: 오정환이라는 놈이요!
돈뜯긴악마: …….
어지간한 이라면.
오정환은 이야기가 조금 다르다. 서버 내 영향력이 있으며, 최근에는 팬덤도 못지않게 커졌다.
섣불리 건들기에는 만만찮은 상대다. 분명. 하지만 계기, 대의명분을 만들기에는 좋은 건수다.
상황을 보고 있던 아싸비가 미소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