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카오스 라테일.
체력만 기존 라테일의 여섯 배가 훌쩍 넘으며, 온갖 사기적인 패턴과 함께 두 시간 30분의 제한 시간까지 있는 거지 같은 스펙의 보스 몬스터다.
“대충 보시면 감이 잡히겠지만 6인 파티로는 어림도 없어요. 최소 18인은 꾸려야 얼추 시간을 맞출 수 있겠죠.”
―왜?
―체력 보고 계산해 본 거겠지
―실전은 그보다 시간 더 들 텐데…….
―베르사유는 30인 가서 실패했대요!
아무리 베르사유가 훼방을 해도, 나도 내 인맥이 있기 때문에 열댓 명 정도는 어렵지 않게 구한다.
그조차 부족해서 문제다. 근 20명에 가까운 원정대를 꾸려야 한다.
한 명, 한 명이 랭커급의 정예 스펙을 요구한다. 제대로 시작도 못 하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 이유인데.
첬첬[스카니아―20]>> 야
오정환[스카니아―15]<< 왜? 화면 꺼야 돼?
첬첬[스카니아―20]>> ㄴㄴㅋㅋ 표도 한 명 구해서
얼마 전, 베르사유의 속내를 알려준 친구. 스카니아의 3위 길마이기도 한 첬첬이 좋은 소식을 들고 왔다.
―올ㅋ
―딜러가 제일 구하기 어려운데 대박이네
―갓정환 인맥ㄷㄷ
―근데 저러다 저분도 해코지당하는 거 아님?
아니다. 갑질이란 것도 상하 관계에서나 성립된다. 어느 정도 세력이 있는 길드의 수장은 줄타기를 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건 자기가 알아서 하는 거고.’
자기 앞가림도 못 할 멍청이가 수십, 수백 명이 소속된 길드의 장을 할 수는 없다.
아무튼 좋은 소식이다. 슬슬 신물이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스카니아에서 카오스 라테일 도전하고 있다고 합니다.
베르사유라는 여러분도 아실 법한 아싸비, 올비핫세 님이 소속된 전통 있는 길드에서 대규모 공대를 조직했습니다.
1, 2단계가 25분 컷이라고 들었으니 화력은 충분할 듯합니다.
└오 베르사유!
└와 화력 진짜 미쳤네요
└스카니아면 오정환 님이 있는 서버군요. 그분이 있다면 격파는 시간문제겠죠글쓴이―아뇨, 그분은 ㅋ
그 커뮤니티.
플레이포럼에도 소식이 올라온다. 아무래도 스카니아뿐만 아니라 모든 서버에서 관심을 기울이는 화제다.
“시간문제가 아니었나 보네요.”
―ㅋㅋㅋㅋㅋㅋㅋ
―알짜가 빠졌으니
―플포에서는 지금 사건 모름?
―난 인소야만 하는데
커뮤니티별로 유저 성향이 조금씩 다르다. 초보 유저들이 이용하는 곳은 인소야닷컴. 고인물들이 이용하는 곳은 플레이포럼.
‘필연적으로 연령대가 좀 있어서.’
인터넷 방송을 안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관련 이야기는 올라온다. 그도 그럴 게 아직 미격파 보스 몬스터다.
그 진행 상황을 알고 있는 것과 큰 차이가 없다. 정보원인 지인의 말도 비슷하니 확신해도 될 것이다.
―메이플고인물 님, 별풍선 10개 감사합니다!
ㅋㅋ그 X랄을 하고 아직도 못 깼나 보네
“아무래도 공략법이 안 나온 보스고, 합도 잘 맞아야 돼서 쉽지 않죠.”
즉, 지금부터 공대를 규합해도 늦지 않다. 그 시기가 더 늦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생각보다 너무 잘돼서 문제다.
밝은달의사신: 네! 저 껴주세요!
S2여리: 시간 불러주시면 맞춰볼게요.
l슈l: 저 2조에 좀ㅎ 흰경각 좀 노려보게
어중이떠중이를 구하는 게 아니다. 랭커급의 정예만이 영입 대상이다. 그 랭커급의 정예가 넝쿨째 굴러 들어온다.
‘이상해.’
의아함이 생길 수밖에 없다. 요 며칠 그렇게 구해도 안 구해지던 공대 문의가 빗발치고 있다.
특히 상대적으로 기준이 높아 구하기가 매우 까다로운 딜러진이 말이다.
―160닼나ing 님, 별풍선 100개 감사합니다!
와ㅋㅋ 이러면 오늘 카오스 라테일 시도 가능? 혹시 시간이 없나?
“100개 감사합니다! 할 수 있으면 할 거예요. 미격파 보스라 시간은 거의 신경 안 써도 됩니다.”
―오
―그 적폐랑만 안 겹치면 되지ㅋㅋ
―베르사유도 별거 없네
―지들이 제재해서 뭐 어쩔 거야~
이 기세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이미 구했던 인원과 합하면 공대가 완성된다. 카오스 라테일을 오늘 당장이라도 도전할 수 있다.
―메이플아재 님, 별풍선 100개 감사합니다!
카오스 라테일 드디어 잡는 겨? 미션 ㄱㄱ?
“100개 감사합니다! 오, 회장님이 미션 걸어주시면 오늘 안에 반드시 하죠~”
분명 그러하다. 간만에 미션도 당기고, 방송적으로도 상승세를 타고 있다. 지금까지 안 구해진 만큼 갑자기 구해질 수도 있는 노릇이다.
그럼에도 꺼림칙한 느낌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이윽고 그 나쁜 예감은 현실이 되어 다가온다.
프로[스카니아―11]>> 님
오정환[스카니아―08]<< 네
프로[스카니아―20]>> 잠깐 화면 꺼주실 수 있나요. 드릴 말씀 있는데
내가 주관하는 여러 공대에서 힐러를 수행하고 있는 프로 님. 일반 유저들에게는 그보다 더 와닿는 명함이 있다.
―아이디 개쩐닼ㅋㅋㅋㅋㅋ 닉값만 50만 할 듯
―프로 길드 길마잖아
―나 진짜 프로 길드 들어가는 게 소원인데 ㅠㅠ
―대체 무슨 이야기길래 둘만 속닥속닥하는 거야!
소위 말하는 S급 닉네임이다. 단풍잎스토리는 그런 아이디가 굉장히 비싸고 희귀한 데다 동명의 길드를 이끌다 보니 나름대로 유명하다.
‘여하튼.’
나와도 친해서 믿을 만한 분이다. 방송에 나가지 않게 화면을 꺼달라고 한 이유, 확실히 시답잖은 부류의 이유는 아니었다.
프로[스카니아―11]>> 그 지금 공대 온다고 하는 애들이요프로[스카니아―11]>> 베르사유 원정대에 속해있던 애들 많던데 조심해야 할 것 같아요
호사다마, 아니 필연일지도 모른다. 부연 설명까지 들어야 할 정도로 눈치가 없지는 않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
지난번, 펑이조가 6인텔을 도전했을 때,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곰승민이 탈주한 척 연기를 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를 악의적으로 저질러도 이상한 사이는 아니다.
“별거 아니에요. 그냥 개인적인 일이에요.”
―정말?
―궁금해
―해명해! 해명해! 해명해! 해명해! 해명해!
―혹시 러브 라인인가요? ㅎㅎ
확실하지도 않은 것으로 일을 벌이는 건 난센스다. 아무리 방송이 어그로가 중요하다고 해도, 나의 이미지를 깎아가면서까지 저지를 건 아니다.
‘어차피 상관없기도 하고.’
카오스 라테일의 핵심은 딜러가 아니다.
* * *
아싸비: 들어갔어?
REAL꼬마법샤: 네, 성공했어요, 언니
올비핫세: 오정환 그놈 사실 알고 나면 오열하겠네, 깔깔깔!
라프레 마을의 촌장집.
그 내에서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베르사유와 핫세팸을 중심으로 형성된 스카니아 최대 파벌이.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그놈 잘되는 꼴은 못 보지.’
아싸비는 오정환을 매우 싫어하고 있다. 사사건건 부딪히는 일이 많아서.
사실 그건 하나의 핑계에 가깝다. 앞에서는 편을 들어줘도, 속으로는 모르지 않다.
왜 그거 하나 못 해서 언니들을 귀찮게 해? 말만 예쁘게 했다면 좋게 좋게 끝냈을 것이다.
쫌노는뇬s: 다 지 업보지 업보
연순니: 맞아요 언니
연순니: 실수할 수도 있는 거지. 존나 정색질이야 ㅡㅡ잉퐁z: 어머어머! 너도 당했니?
그 과정이 문제다. 말을 안 예쁘게 해. 띠꺼운 말투로 밉상이 쌓이며 어느샌가 생리적으로 그를 싫어하게 되었다. BJ라는 것을 하며 유명해진 이후로는 더더욱.
자신과 같은 선상에서 언급된다는 게 몸서리쳐진다. 때문에라도 이번 ‘트로이의 목마’ 작전을 반드시 성공시켜야 한다.
아싸비[스카니아―02]<< 잘되고 있는 거 맞지?
아싸비[스카니아―02]<< 멍청하게 들키지 마라. 입단속 잘하고
드물게도 아싸비 본인이 직접 관여한다. 그 정도로 필사적이다. 그에 맞춰 길드원들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n시프1: 잘되고 있대요ㅋㅋ
i즐꺼려i: 이쪽도 완료! 걱정 뚝 붙들어 매십쇼 이모!
아싸비: 뒤질래?
만에 하나의 경우를 대비해 길드 채팅에도 직접적인 이야기를 금한다. 하지만 무언가 벌어지고 있다.
신난 듯한 분위기는 눈치가 나쁜 이라도 알아챌 수밖에 없을 정도다. 그런 길드원들의 대화를 씁쓸하게 지켜보던 한 사람.
삼형제: 알사탕 삼촌도 만렙 아니셨나?
삼형제: 삼촌도 하시지ㅋㅋ
알사탕k: 뭘?
n시프1: 야 알사탕형 성기사잖아
삼형제: 아 그랬었지ㅎ 죄송요
알사탕k: 하하, 그래…….
대화에 끼지를 못한다. 친하지 않아서? 아니, 친분을 따지면 길드 내에서도 손가락에 꼽힐 것이다.
베르사유의 창단 멤버이기도 하며, 나이도 아싸비보다 다섯 살 위로 지긋하다. 인망도 있어 어린 길드원들의 정신적 지주이기도 하다. 분명 그랬었다.
‘게임이 참 많이 달라졌어.’
단풍잎스토리는 여러 가지 직업이 있다. 그리고 그중 몇몇은 ‘비주류’라는 낙인이 찍혀있다.
준식이 하고 있는 성기사가 가진 이미지가 그러하다. 일반 사냥은 무리가 없지만 레이드에서는 존재감이 차이 난다.
선호도가 낮을 수밖에 없다. 수익성이라는 게 대두된 이후로는 특히 말이다.
돈이 걸린 일이다. 기왕이면 좋은 직업 쓰지. 자연스럽게 비주류 직업은 레이드에서 도태되고 말았다.
3차 전직 시절만 해도 아니었다. 직업 간의 격차는 그리 크지 않았다. 어느 정도 차이는 있었지만, 레벨과 아이템으로 극복이 가능했다.
그 시절이 조금 그립다. 아니, 진정 그리운 건 따로 있다. 서로 부족하더라도, 합동해서 무엇이든 이루어냈다는 점이다.
안 그래도 선호되지 않던 직업. 이제는 아무도 하지 않는 직업. 정말 드물게도 만렙까지 키우게 된 버팀목이었다.
‘슬슬 단풍잎도 접을 때가 됐어.’
언젠가 다시 변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 그런 생각이 있던 것도 얼마 전까지다. 서버 제1의 길드로 부상하며 삭막했던 분위기는 점점 더해진다.
모두가 중요한 것을 잊었다. 자신들이 하는 건 이 길드가 아니고 게임인데. 표현 못 할 속내를 담고 함께하는 것도 여간 곤욕이다.
오정환[스카니아―11]>> 형 있어요?
알사탕k[스카니아―08]<< 어, 그래
유일한 낙이다. 오정환. 길드 내에서는 별별 소리 다 듣고 있지만 실제로 이야기해 보면 나쁜 녀석은 아니다.
‘아니, 비슷한 녀석이지.’
자신들이 처음 이 게임을 시작했을 시절을 닮았다. 무엇이든 해보고, 안 되면 더 해보고, 또 안 되면 다 같이 해보는 그 막무가내의 재미 말이다.
게임 자체를 즐기고 있다. 새로운 도전을 마다하지 않는다. 녀석이 하는 플레이를 보고 있자면 옛날의 자신을 보는 것 같아 즐겁다.
오정환[스카니아―11]>> 혹시 시간 되시면 레이드하실래요?
알사탕k[스카니아―08]<< 뭐, 카쿰? 시간은 돼
하지만 그건 자신의 생각이다. 요즘 같은 시대, 이해타산적으로 따지면 가깝게 지낼 이유가 없다. 성기사는 모든 직업을 통틀어 가장 낮은 대우를 받는다.
오죽하면 비주류 삼대장 성·불·신 중에서도 독보적인 쓰레기라고 까인다. 라테일은 물론이고, 카쿰조차 눈치 보인다.
그래도 만렙인데? 레벨이 높은 팀원이 있으면 경험치 덜 먹는다고 싫어하는 유저들도 있기 때문이다.
오정환[스카니아―10]>> 아뇨, 카텔이요
알사탕k[스카니아―15]<< 라테일?
오정환[스카니아―10]>> ㄴㄴ 카오스 라테일
알사탕k[스카니아―15]<< 나 성기사인데……?
만나는 것은 우연이지만, 이어가는 것은 필연이다. 비록 게임, 30대가 되어버린 나이를 먹고도 계속 해나가고 있던 까닭이었다.
‘정말 내가 필요한 거라면…….’
마지막 가는 길. 6년 가까이 함께했던 길드의 동생과 친구들을 위해 해주고 싶은 일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