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fail 미국·영국 [fe? l]
1. 실패하다, …하지 못하다
2. …하지 않다
3. (시험에) 떨어지다; 불합격시키다
미국식으로든 영국식으로든 뜻이 헷갈릴 염려가 없다. 현재 내 모니터 화면에 뜬 네 글자는 헛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FAIL』
레이드에 실패했다. 어째서? 잠깐 뇌정지가 온 김에 고민을 해봤지만 떠오르는 것이 없다.
“물론 환불은 안 되는데 참… 재밌는 일이 일어났네요.”
―환불ㅋㅋㅋㅋ
―고객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설마 2페이즈 있음?
―2페이즈 있으면 환불해 줘야지!
안 잡아봤으면 모를까. 미래에서 이미 잡아본 입장이다. 카오스 라테일의 마지막 부위를 떨어뜨리면 CLEAR라는 메시지와 함께 보상 맵으로 이동한다.
반대로 깨지 못하면 FAIL.
현재 일어나고 있는 상황의 요점이다. 분명히 격파했음에도 실패한 것으로 처리가 되어버렸다.
‘환불은 에바잖아.’
물론 증인이 한두 명이 아니다. 굳이 정색까지 할 필요는 응당 없다. 하지만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난 것도 사실이다.
벨소리―「꽃이 언제 피는지 그딴 게 뭐가 중요한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 적어도 내가 고민할 내용은 아니었다.
* * *
DONXON.
NCSOFT, Netmarble과 함께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3대 게임사 중 하나다.
최초의 MMORPG ‘바람의 왕국’을 비롯해 수많은 명작들을 탄생시켰으며, 그 돌풍은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되리란 보장은 없다. 그렇기에 지금 이 자리가 마련된 것인데.
“무너진 밸런스가 캐시템의 수요를 만듭니다!”
강남구 역삼동에 위치한 돈슨 본사.
그 5층에서 개발자 컨퍼러스가 진행되고 있다. 한 개발자가 열정적으로 외치는 ppt가 이목을 사로잡는다.
‘미친 거 아니야?’
‘아무리 상업적인 요소가 중요해도 그렇지…….’
‘그건 너무 노골적으로 막 가자는 거잖아!’
당연하게도 반응은 싸늘하다. 평가단의 표정은 반쯤 얼이 빠졌다.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데 저런 망발을 내뱉어.
물론 어느 정도 눈치를 주기는 했다. 상업적인 성공과 직결될 수 있는 그런 거 다 알잖아? 알아서 잘 ppt를 마련해 오라고 말이다.
“크흠…….”
“사, 사장…님!”
“얼른 뭐 해! 끌어 내리지 않고!”
자신들끼리 있는 회의실이면 상관없다. 고위 임원은 물론 사장까지 주시하는 컨퍼런스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값싼 언어를 휙휙 던져서는 문제가 될 소지가 다분하다.
‘누가 저런 미친 작자를 단상에 세운 거야?’
컨퍼러스를 기획한 김진표 이사의 이마에 식은땀이 흥건하다. 그것이 흘러 셔츠 목덜미가 흠뻑 젖었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사장의 눈치를 본다.
게슴츠레한 눈초리로 발표자를 흘겨보고 있다. 손을 가볍게 들자 그를 제지하려던 사원이 멈춘다. 사장은 질타 대신 직접 마이크를 쥐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묻는다.
“자네.”
“저 말씀이십니까?”
“자네 말고 누가 있겠나? 어느 부서 소속이지?”
이례적인 상황이다. 사장이 직접 심사에 개입하는 건. 무겁게 떨어지는 마디마디마다 전 임직원들이 침을 꼴깍 삼키며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바라본다.
“단풍잎스토리 개발팀 장연수입니다!”
“단풍잎스토리……. 우리 회사에 아주 중요한 게임이지.”
“네, 그렇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계획을 갖고 있지?”
회장의 이목이 단 두 사람에게 쏠려있다. 발표하는 당사자와 사장. 그 시점에서 어떤 식으로든 깨지는 건 확정이다.
“너 끝나고 보자.”
“죄, 죄송합니다…….”
진표는 친한 후임이며 개발부 부장인 창우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한숨을 내뱉는다. 미리 하는 내리갈굼. 심정이 복잡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그래도 만에 하나…….’
ppt의 주제는 어그로고, 내용은 굉장히 건실할 수 있다. 만약 그것이 회장의 심기를 만족시키면 해프닝으로 넘어갈 수도 있는 노릇이다.
진표는 최대한 행복 회로를 굴려봤지만.
“대형 업데이트를 펑펑 하는 겁니다. 신규 보스, 신규 사냥터, 신규 아이템! 그것도 기존과 차원을 달리하는 것들을요!”
“계획은 좋은데… 현실적으로 인력과 시간이 있나?”
“없습니다!”
“…….”
그 당당한 대답에 회장의 모든 이들이 진심으로 얼어붙는다. 특히 진표는 망치로 세게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다. 한때 단풍잎스토리 부서를 이끌었던 과거가 있다.
‘패치 하나 하는 데 얼마나 걸리는지 알아?’
유저 입장에서는 별 대단치 않은 것들도 검토의 검토를 거쳐 신중히 추가된다. 하물며 대형 콘텐츠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럼에도 부작용을 피하기 힘들다.
그만한 것들을 단기간에 낸다? 게임을 망치자는 소리밖에 되지 않는다. 물론 인력과 시간이 부족하다는 걸 빙 둘러서 어필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조차 우문. 돈슨의 슬로건은 ‘최소한의 인력으로 최대한의 효율을!’이다. 정식 슬로건은 아니지만 회사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다.
그 효율은 바로 돈을 의미한다. 돈을 버는 일에 돈을 투자하면 의미가 없다는 소리다. 예산 추가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고, 쟤도 자신도 이제 ㅈ망한 것이다.
“일정을 맞추기가 쉽지 않을 텐데.”
“괜찮습니다!”
“무슨 근거로?”
“속 빈 강정이거든요.”
“…….”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천연덕스럽게 내뱉는다. 지금까지 말한 것도 도저히 뒷감당이 안 되는데 그 이상의 것을 말이다.
“이를테면 절대로 못 깨는 보스 몬스터를 만드는 겁니다.”
“계속해 봐.”
“그리고 이에 꼭 필요한 캐시템과 유료 서비스를 내놓는 거죠.”
점입가경도 유분수다. 들을수록 이런 가관이다. 보여주기식의 화려한 패치와 오직 돈만을 바라보는 상술이라니.
‘유저들이 무슨 개돼지도 아니고…….’
당연히 기업의 존재 이유는 돈이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적당한 선에서 해먹어야지. 그렇게 노골적으로 돈을 빨아먹으면 유저들이 가만히 있겠어?
단기적인 수익은 올라갈 수 있다. 장기적인 게임 수명에 악영향을 미친다. 이어지는 대답은 화를 낼 힘마저 잃게 만들어버린다.
“절대로 못 깨는 보스를 잡기 위해 유저들은 돈과 캐시를 쓸 수밖에 없을 겁니다!”
“…….”
무너진 밸런스가 캐시템의 수요를 만든다. 판은 판대로 벌리고, 과금 유도는 과금 유도대로 한다.
하나만 해도 문제가 될 소지가 다분한데 이를 동시에 저지르자는 것이다.
“누, 누가 쟤 좀 멈춰!”
“지금 끼어들라고?”
“난 못 해……. 이번에 아내가 둘째를 낳았는데 어찌나 귀여운지…….”
굳이 정의하자면 카드 돌려 막기식 업데이트다. 단발성 빨아먹기로 끝날 리가 만무하다. 한번 저지르면 계속해서 인플레이션 패치를 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그야말로 미친 짓. 사장이라고 이를 모를 리 없다.
막 출시한 신작이면 모를까, 돈슨을 대표하는 3대 게임 중 하나인 단풍잎스토리에 그런 짓을 저지르면 기업 이미지에도 치명적인 결과를 야기한다.
“미친…….”
공식 석상에서 나와서는 안 될 말이 사장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 노여움이 가득 찼다는 걸 숨길 여력도 없어졌다는 방증이다.
이렇게 된 사장은 누구도 못 말린다. 컨퍼러스 관계자 중 최소 세 명은 좌천이 확정이다. 그 하나가 자신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진표는 눈을 감았는데.
“그런 미친 듯이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원했다네.”
“감사합니다, 사장님!”
“…….”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결말을 맞게 된다. 사장의 마음에 쏙 들며 발표자는 특급 승진의 영광을 누린다.
“선배님?”
“너 끝나고 보자……. 내가 쏠 테니까.”
“…네.”
그 직속 상관인 창우와 컨퍼런스의 책임자인 진표도 말이다.
단풍잎스토리뿐만 아니라 돈슨 전체 게임의 방향성이 수정된 전무후무한 사건이었다. 그것이 지금으로부터 불과 2년 전이다.
개발부 부장에서, 단풍잎스토리 총괄 디렉터가 된 창우는 아찔했던 그날의 일을 회상했다.
“어차피 깨는 데 1년씩 걸리는데 굳이 세부적인 작업까지 해서 내놓을 필요가 없잖아요?”
“그러게.”
그리고 현재, 그 발표자였던 장연수와 업데이트 방향성에 대해 논의 중이다.
그는 자신의 뒤를 이어 개발부 부장으로 승진해 굵직굵직한 사안을 도맡듯이 하고 있다.
‘틀린 말은 아니지.’
자신이 신입 사원일 때 만들어진 카쿰도, 개발부 부장일 때 만든 라테일도 얼마나 두근대며 출시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격파는 1~2년 후. 심지어 너무 안달이 난 나머지 운영자를 파견해 도와준 선례도 있다.
그렇다면 차라리 대충 내놓자! 어차피 깨는 데 한세월 걸리잖아?
일련의 방식이 도입된 이후 돈슨 게임의 수익성은 차원이 다르게 늘어났다.
“만에 하나라도 깨면… 큰일 나겠지?”
“그럴 리가 없다니까요! 대미지가 2만씩 떨어지고, 필킬 패턴을 네다섯 개 넣어 놨는데 막말로 성직자가 풀파티로 들어가도 부활이 부족할 겁니다~”
이는 당연히 단풍잎스토리에도 적용이 된다. 얼마 전 추가된 카오스 라테일. 빛 좋은 개살구라는 사실은 개발부와 자신만이 알고 있다.
어처구니없지만 실행 중이다. 이 방식을 도입한 당사자가 장연수다. 더불어 게임 이해도가 깊기에 가능한 일이다.
“우스갯소리긴 한데 정말 막말처럼 돼버리면?”
“디렉터님도 참~ 레이드 안 해보셨어요? 체력을 100억 넘게 설정해 뒀습니다. 격수 없이는 때려 죽여도 못 잡아요.”
“…….”
그리고 격수는 상상을 초월하는 대미지와 필킬 패턴 탓에 생존조차 허락받지 못한다. 한마디로 그림의 떡이다.
그렇게 유저들이 침을 질질 흘리며 발만 동동 구를 때.
‘아이템 강화 캐시템과 부활 캐시템을 내놓는다라…….’
만약 그 정도의 캐시템이 그냥 나온다면 구설수를 피할 수 없다. 하지만 이렇듯 유저들이 원할 때 추가한다?
게임 내 콘텐츠로 자연스럽게 자리 잡는다. 천재적이며, 악마적인 발상이다. 이미 단풍잎스토리뿐만 아니라 다른 게임에서도 실효를 보았다.
앞으로는 더더욱 심화되며 돈슨 게임 전체의 수익성을 극대화시킬 것이다.
“그럼 이 일정에 맞춰서 진행하겠습니다?”
“그, 그래.”
자신의 소속 부하임에도 눈치를 보는 입장이다. 사장에게서 받는 절대적인 신임.
진행한 프로젝트의 연이은 성공으로 쌓은 실적. 대외적인 민심 관리까지 훌륭하다.
이따금 터져 나오는 유저들의 불만? 마케팅팀과 협력해 깔끔하게 해결하고 있다.
‘아싸비 등의 네임드를 잘 이용하고 있다고.’
차기 이사 후보 1순위로 거론될 만하다. 너무 능력이 좋아서 시기조차 안 들 지경이다.
하지만 그 방향이 옳은지에 대해서는 항상 의문이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개발부의 공기는 달랐다.
이따금 시찰을 가면 이상하게 텁텁하다. 환기를 해봐도, 가습기를 틀어봐도 고쳐지지 않는 미스터리다.
따르릉~♪
연수가 떠난 사무실에서 잡생각을 하며 커피를 마시던 도중, 긴급 회선을 통해 걸려온 연락이 사고를 끊는다.
창우는 커피 잔을 내려놓고 업무로 돌아간다.
<디렉터님!>
“무슨 일이지?”
<지금 스카니아에서 엄청난 일이 벌어졌습니다.>
“백섭이라도 일어났나?”
회선이 연결된 곳은 개발부. 목소리가 다급한 것이 보통 일은 아닌 듯싶다. 하지만 헐레벌떡 보고해야 할 사안이면 레퍼토리가 정해져 있다.
‘열에 아홉은 백섭이지. 골치 아픈데…….’
Back Service.
일정 서비스 시간 이전의 데이터로 되돌아가는 현상이다. 이따금 영문도 없이 터져 담당 부서를 완전히 뒤집어 놓는다.
원인을 찾는 것도 문제거니와, 그로 인해 야기된 게임 내 사고를 처리하는 건 또 별개의 일이다.
터지는 순간 최소 1주일은 야근 확정! 개발부 시절에는 농담으로도 섬뜩했다.
그런 백섭을 담담히 얘기하는 것을 보면 자신도 많이 달라졌다.
시답잖은 감상에 젖어있을 때가 아니었다. 보고의 내용은 상상도 못 한 것이었으니까.
<카오스 라테일이… 격파되었다고 합니다.>
공기가 조금 달라지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