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작은 후회
승부는 났다.
침대 위에서 가쁜 숨을 몰아쉰다. 작은 어깨가 들썩거릴 정도로 많이 힘들었던 모양이다.
“졌어요.”
“그래.”
“패배하고 말았어요…….”
별일을 한 건 아니다.
팔씨름.
딱딱한 책상에서 하면 멍들까 봐 침대에서 사투를 펼쳤다. 봄이는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내 검지손가락 하나에 농락당했다. 적당히 가지고 놀면서 힘을 쭉 빼놓자 침대에서 일어나질 못한다.
“사실 저도 알아요. 저 전혀 강력하지 않아요.”
“그래.”
“하지만 그래도 조금은 달라졌을 거라고 믿었어요.”
줄넘기가 무슨 근력 운동도 아니고. 애초에 남자와 여자는 신체 구조상의 차이가 현저하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안간힘을 써봤자 적수가 될 수 없다.
‘너 같은 캐릭터가 강력할 수 있는 건 일본 애니메이션뿐이야.’
아니면 네이버 웹툰이나.
근육이 많을수록 약해지는 세계관이다. 현실 세계는 당연히 그렇지 않고, 건장한 성인 남성을 이런 꼬꼬마가 이길 수 있을 턱이 없다.
“후우… 이게 바로 패배의 쓴맛이란 거군요.”
“…….”
“지금이라면 아메리카노도 꿀떡꿀떡 잘 마실 수 있을 것 같아요.”
잠깐 질 뻔했어. 과거의 내가 저지른 헛소리가 머릿속을 메아리친다. 아무래도 봄이는 팔씨름도, 커피에 대한 도전도 진심인 듯하다.
‘원래 이 나이 때는 뭘 해도 재밌지.’
공부 빼고.
그 공부를 마치고 온 참이다. 근 한 달간 봄이가 뜸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시험 잘 봤어?”
“그럭저럭 잘 봤어요.”
“묻지 마?”
“그래 주시면 무척 감사할 거예요.”
그럭저럭. 못 봤다고 하기도 좀 그렇고~ 솔직히 잘 본 것도 아니고~ 세상에 이 이상으로 적절한 표현이 없을 것이다.
‘나도 그랬는데.’
시대가 지나도, 시험 후 학생들이 느끼는 부담은 매한가지인가 보다.
그렇게 시무룩할 때! 온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을 때!
“맛있는 거 먹으러 갈까?”
“정말이에요? 저 놀리는 거 아니에요?”
“봄이 힘들게 시험 봤는데 오빠가 한턱내야지.”
“제가 감히 승리의 달콤함을 입에 담아도 되는 걸까요?”
“…….”
기분 전환만큼 좋은 것이 없다. 개인적으로 승리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현재는 버닝썬이 터지기 이전이니 괜찮을 것이다. 그 달콤함을 허하노라.
“뭐 먹고 싶…….”
“떡볶이! 떡볶이! 떡볶이! 떡볶이! 떡볶이!”
속사포처럼 쏟아낸다. 좀 더 맛있는 걸 사주고 싶다는 희망을 또 강제로 접게 만든다.
터벅, 터벅.
본인이 원한다는데 뭐 어떡해.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다르다. 시키는 게 아닌, 나가서 사 먹기로 했다.
날씨가 풀리기도 했거니와, 긴히 할 이야기가 있다. 대충 파카를 껴입고 15분 정도. 신전 떡볶이 가게가 보인다.
“혹시 저 한 가지 사치를 부려도 되는 걸까요?”
“그래? 먹고 싶은 거 주문해.”
도착하자 귀여운 부탁을 해온다. 뭐, 별것도 아니고. 사주기로 한 참에 아낄 만큼 구두쇠는 아니다.
‘돈을 버는 보람이 있다면 이런 거지.’
먹고 싶을 때 마음껏 사 먹을 수 있다는 점. 학생 시절에는 허락되지 않은 즐거움이다. 이를 조금 나눠주는 정도야 어렵지 않다.
“떡볶이 위에 치즈 듬뿍 추가해 주세요!”
“…….”
여중생의 사치는 가벼웠다. 지난번에는 내가 시켜서 추가를 안 했는데, 그걸 무척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던 모양이다.
‘사실 여자들 좋아하는 음식은 다 비슷해.’
꾸덕꾸덕한 치즈, ‘바네스 까르네’처럼 있어 보이는 이름, 인스타 스타들이 먹고 인증.
이 세 개가 겹치면 절대 싫어할 수가 없다. 그중에서도 치즈의 위치는 절대적이다.
“치즈김밥이랑 치즈스틱 포함한 튀김도 적당히 주세요.”
“주문받았습니다!”
먹고 뒤지라고 신전 떡볶이 치즈 풀코스로 달린다. 본인이 무척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으니 틀린 답을 고른 건 아닐 것이다.
“저 혹시 콜라도 마셔도 돼요?”
“쿨피스 안 마시고?”
“아니에요. 중간맛 떡볶이에는 콜라예요!”
나름대로 떡볶이학파의 권위자인 듯 취향이 확고하다. 음식보다 먼저 나온 유리병 콜라. 잔에 콸콸콸 따르더니.
“크아~ 이 맛이에요!”
아빠 미소가 절로 지어진다. 두 손으로 들고 꿀꺽꿀꺽 해치운다. 이윽고 아르바이트생이 주문한 메뉴를 들고 온다.
하나하나 내려놓는 접시가 묵직하다. 봄이랑 같이 음식점에 오면 좋은 점이 하나 있는데.
‘서비스가 졸라게 많이 나와.’
말로만 듣던 2인분 같은 1인분을 목도할 수 있다. 물론 매번 그런 건 아니지만 최소 내가 사 먹을 때보다는 눈에 띄게 많다.
그 이유.
“듬뿍 드렸어요~”
“와~ 정말요? 정말 정말요?”
어떻게 안 주겠냐고. 남자는 당연하고, 아줌마들 눈에도 참 귀엽다. 여하튼 서비스 더 받자고 이 추운 겨울에 밖에 나온 건 아니다.
‘고민이 되는 게 있어서.’
누구한테 상담하기는 뭣한 내용이다. 그리고 솔직하게 상담할 사람이 없기도 하다. 그래서 봄이한테 그 결정에 대한 자문을 구해보려 한다.
“봄이야, 먹으면서 들어.”
“네!”
“너는 만약에 인생에 큰 후회 말고 작은 후회…를 바로잡을 기회가 오면 어떡할 거야?”
선택 장애.
짜장면, 짬뽕 정도가 아니라 그 이상. 큰 건 아니지만 섣불리 결정하기는 애매한 사안 말이다.
“잘 모르겠어요.”
“예를 들어 그 친구랑 친하게 지냈으면 좋았을 텐데~ 이런 거 있잖아.”
“헉! 알 거 같아요.”
글자 그대로 작은 후회다. 그 정도 바로잡는다고 내 인생에 파격적인 변화가 오진 않는다. 깔끔하게 없던 일로 쳐도 상관은 없다.
‘당사자에게는 다소 상관이 있긴 하겠지만.’
적어도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다. 그대로 마이웨이를 밟아도 될 일이다. 마음속 작은 응어리를 풀지 못한 채 말이다.
“그런 건 싫어요.”
“그래?”
“저는 친구들이랑 전부 다 사이좋게 지내고 싶어요.”
“그렇구나.”
사이좋게 중요하지. 상관이 없다고 어느 한쪽과 척을 지는 것보다는 좋게 좋게 가는 것이 인생 편하게 사는 방법이다.
‘물론 봄이가 거기까지 생각해서 말했을 리는 없겠지.’
그래도 명안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갈리지 않는다. 돈슨의 처우가 결정됐다.
* * *
한번 불이 붙은 화제는 쉽게 꺼지지 않는다. 특히 ‘공적’으로 몰리게 되면 모든 말과 행동이 도마 위에 오른다.
―운영자가 전화 건 장면은 다시 봐도 레전드네. 언제부터 지들이 유저 친화적이었다고. 오우~ 보스 몬스터 깨셨어요? 축하 전화라도 했나ㅋㅋㅋ└오우 축하 좀 할 줄 아는 놈인가?
└대체 뭐라고 들었길래 방송 끈 거지?
글쓴이―오늘 방송에서 말해준다고 함.
└난 전화 걸었다는 부분이 가장 소름인데…….
평소였다면 유야무야 넘어갈 수 있었던 일도 하나하나가 의심의 대상이다. 이미지, 특히 기업의 이미지는 그래서 중요하다.
무언가 사건이 터졌을 때, ‘이유가 있겠지~’ 하고 생각하는 것과 ‘그러면 그렇지~’ 하고 생각하는 건 느낌이 전혀 다르다.
돈슨의 이미지가 그러하다. 대부분의 유저들에게 안 좋은 쪽으로 박혀있다. 소위 말하는 ‘킹리적 갓심’의 대상이 되어도 실드를 쳐줄 여론이 없다.
[Best Comment]―전화번호는 어떻게 알았대? 개인 정보 줄줄 새고 있는 거 아님?
└와 소름
└돈슨은 하고도 남지…….
└돈슨이라면 전화로 협박했을 수도 있음 ㄷㄷㄷ
이미 이야기는 나오고 있다. 악성적인 루머들이 퍼진다. 개발부 부장인 장연수의 똥줄이 탈 만도 하다.
‘아니, 그게 다 알 만하니까 아는 건데 너희가 뭘 근거로…….’
자신의 스마트폰으로 커뮤니티 여론을 확인하며 마른침을 삼킨다. 테이블에 놓인 아메리카노를 마셔도 갈증이 해소되는 건 잠깐이다.
「운영자 권한 남용? ‘돈슨’ 단풍잎스토리 신규 보스 논란!」
「미구현된 신규 보스 격파하자 울린 전화기… 운영자는 어떻게 연락할 수 있었을까?」
커뮤니티뿐만이 아니다. 이런 재미있는 사건을 기자들이 놓칠 리가 없다.
돈슨의 눈치를 보는지 내용은 순화되어 있지만 기사가 떴다는 것 자체가 매우 불쾌하다.
사건이 커지면 책임도 늘어난다. 이를 지게 되는 건 결국 자신이다. 회사 입장에서는 누구 한 명에게 독박을 씌우는 편이 싸게 먹힌다.
「[12월 1주 차 게임 순위] ‘단풍잎 사태’ 경쟁 게임들 반사 이익 누린다?」
「[이슈] 영혼노동자, ‘소매넣기’ 깜짝 이벤트 진행… 제대로 노 젓네」
경쟁 기업에서도 움직임이 있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위기를 기회로 여긴다. 특히 몇몇 게임은 노골적으로 이벤트를 진행하며 신규 유저 몰이에 나섰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초기 단계다. 진압만 한다면 정상화가 가능하다. 연수가 따듯한 카페 안에서 초조하게 다리를 떠는 이유였다.
‘오늘까지야.’
이틀. 총괄 디렉터도 이만하면 시간을 상당히 준 편이다. 때문에 어제 바로 연락을 해서 당사자를 만나보려 했다.
그런데 당사자가 안 만난대.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는다. 군 시절 5분 대기조처럼 스마트폰만 부여잡고 있던 도중.
「부장님」
「오정환이 장소를 제시했습니다.」
「일산역 5번 출구 건너편의 카페에서 5시까지 만나고 싶답니다.」
「알겠다. 내가 가지.」
부하 직원에게 카톡이 와 직접 차를 몰고 나왔다. 그것이 두 시간 전. 약속 시간이 거의 한 시간이 넘었음에도 함흥차사다.
‘자기가 무슨 푸틴도 아니고.’
속이 끓지만 기다리는 것이 최선이다. 만약 교섭이 실패한다면? 더 이상 시간도, 방법도 남지 않는다.
적어도 지금은 참는 것이 최선이다. 자신보다 한참은 어린 녀석. 구슬려 삶아 사태를 진정시켜야 한다.
드르륵―
카페의 자동 유리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나타난다. 연수는 이미 그의 개인 방송을 통해 얼굴과 인상에 대해 확인을 마쳤다.
“여깁니다. 안녕하세요. 개발부 부장 장연수입니다. 오정환 씨 본인 되시죠?”
“예, 맞습니다.”
“조금 늦으셨네요~ 벌써 제가 한 시간이나 기다렸거든요.”
20대 초중반의 새파란 애송이다. 지각했다는 점을 지적하며 가볍게 대화의 주도권을 가져오려 했는데.
“제가 돈슨 게임을 많이 하다 보니까 늦는 게 라이프 스타일이 돼버렸네요. 고쳐야 되는데 쉽지 않아서.”
“하하하……. 그, 그렇네요. 이번 일도 회사 내부에서 교훈이 되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만만치 않다. 상대의 직업이 무엇인지 잊고 있었다.
‘BJ를 하는 놈이라 그런지 말발은 있네.’
하지만 그뿐이다. 게임의 홍보와 관련하여 비슷한 직업을 가진 이들을 숱하게 만나보았고, 그들을 상대하는 법도 꿰고 있다.
“정말 시기가 안 좋았던 게… 카오스 라테일에 치명적인 버그가 있어서 저희가 내부적인 검토를 하고 있었는데 그게 바로 이번 주였습니다.”
“그래요?”
9할의 진실과 1할의 거짓. 동정의 시선이 향하도록 만든다. 이것만으로도 대부분은 넘어간다.
‘그런 직종들은 주위에서 띄워주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이거든.’
그리고 기분파다. 적당히 비위만 맞춰주면 대개 좋은 쪽으로 진행된다. 하지만 사태가 사태. 만에 하나의 경우를 대비해 비장의 카드를 들고 왔다.
“아싸비 님 아시죠?”
“음… 그렇네요.”
“오정환 님도 단풍잎 BJ로서 최근 인지도가 그에 못지않으신데, 저희와 이벤트를 한번 진행해 보면 좋겠다, 이번에 마케팅팀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왔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