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핑크린은 총 1단계부터 6단계까지 진행된다.
1단계 : 할배 석상
2단계 : 1단계 + 할매 석상
3단계 : 2단계 + 비둘기 석상
4단계 : 3단계 + 독수리 석상
5단계 : 4단계 + 여신 석상
6단계 : 핑크린 본체
이전 단계와 하나의 석상을 더해 되풀이하는 구조로 초기에는 패치 미스 아닌가? 하는 소리까지 진지하게 거론되었다.
단순히 어렵고, 오래 걸리는 정도를 넘어 유저들에게 무한 츠쿠요미의 패닉을 선사했다.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 봐야 할까?
신규 보스 공략 과정에서 반드시 한 번은 겪는 난관이다. 하지만 확실한 공략 과정이 있고, 그 수순을 지키기만 하면 격파할 수 있는데.
두두두두―!
파바바박―!
수없이 날아가는 표창과 총알. 화려하게 그어지는 칼질도 이목을 사로잡는다. 그 정신 없는 상황에서 내가 짚으려는 건 따로 있다.
─적에게 당했습니다!
내가 비석을 꽂게 된 순간 말이다.
나는 방송을 진행 중이다. 실시간으로 녹화가 되며, 필요하면 이렇듯 돌려볼 수 있다.
“이때네요.”
―호우
―호우?
―와 2만이 박히네
―저걸 피했어야지ㅋㅋㅋㅋㅋ
하늘에서 떨어지는 빛줄기. 5단계의 여신 석상이 사용하는 스킬이다. 이동기가 있는 직업은 피할 수 있지만, 없거나 반응이 늦으면 맞아야 한다.
'특히 해적은 그런 감이 있어.'
스킬 구성상 굼뜨다. 피할 수 있는 반경이 한계가 있다. 페이커가 가렌을 해도 가붕이는 가붕이이듯 말이다.
실수로 맞게 되었다. 그때 들어왔던 데미지. 정리해둔 정보와 상이한 차이점이 있었다.
“원래는 높아도 1만 4천까지 들어오고, 위협을 걸면 1만 전후로 나와야 하는데…….”
보스 몬스터의 데미지를 줄여주는 성기사의 위협이 걸렸음에도 2만이 넘어갔다.
본래 데미지는 그 이상이라는 소리다.
원거리 직업의 체력은 특수하게 높아봐야 1만 1천.
근거리 직업도 2만 5천이 넘어가는 건 일부 유저 뿐이다. 사실상 맞으면 죽으라고 내놓은 수준의 어처구니없는 즉사기다.
“최근에도 핑크린을 해봤지만 그때는 분명 1만대인 걸 확인했거든요?”
―잠수함 패치했네
―돈슨ㅋㅋㅋㅋㅋㅋㅋㅋ
―돈슨이 돈슨했는데 문제라도?
―문제지
잠수함 패치.
별도의 공지를 하지 않은 업데이트. 사실 핑크린이 갑작스레 상향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유저들이 킹리적 갓심을 하는 이유가 있다고.'
할매 석상만 해도 원래는 언데드화 라는 패턴이 없었다. 핑크린 공략이 활성화되자 조바심이 난 듯 추가한 것이다. 오크통을 활용한 공략 등도 발 빠르게 없애는 등 별별 견제를 다 했다.
─메이플아재님, 별풍선 100개 감사합니다!
돈슨 새끼들 역겨움이 도가 넘었네ㅋㅋㅋㅋㅋㅋㅋ
“100개 감사합니다. 하……, 쓰린 속을 달래주네요.”
―속상하겠다
―옛날 영상 확인해보니까 진짜네
―돈슨 미침?
―설마 저거 하나 때문에 못 깨는 건가……
빅뱅 전에 핑크린을 깨는 건 불가능하다. 내가 가진 미래의 지식과 영향력, 자금 etc의 상승 효과로 부딪혀보는 것이다.
'아슬아슬 될 것 같다는 계산은 섰지만.'
글자 그대로 아슬아슬하다. 표현하자면 한계까지 가득 찬 잔이다. 물을 몇 방울 떨어뜨리는 정도로도 흘러넘친다.
캐시 아이템 '운명의 수레바퀴' 등의 추가로 죽음이 이전만큼 치명적이진 않지만, 이미 한계에 도전하는 상황이었기에 체감되는 난이도가 더 큰 것이다.
심지어 나까지 죽게 되자 공대의 통제가 안 됐다.
미들마치 : 아 진짜 개빡치네ㅋㅋㅋㅋ
자리삽니다 : 하아;;
언덕위의달 : 우리 같이 돈슨 본사 쳐들어가죠
첬첬 : 에라이 돈슨!
1차 시도가 실패. 밖으로 나온 공대원들의 말씨가 사납다.
돈슨 게임을 하는 유저 중에 돈슨을 좋아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와 네임드들 다 빡쳤네
―자리삽니다도ㅋㅋㅋ
―돈슨 이거 감당 가능?
―돈슨 본사 불지르고 싶다 ㄹㅇ
우스갯소리고, 빡쳐서 하는 소리긴 하겠지만 돈슨 본사 불지르고 싶다는 사람이 대한민국에 못해도 100만 명은 넘을 것이다.
'용케도 안 타고 잘 운영이 되네.'
미국이나 파키스탄 쪽에 있었으면 얄짤이 없었을 텐데.
평화로운 나라다 보니 위기 의식이 결여돼 있다.
한국 사람들은 너무 착해서 탈이다.
─타락파워법사님, 별풍선 10개 감사합니다!
어캄? 운영자한테 따지는 수밖에 없지 않음?
“그러게요. 지금이라도 문의 메일을 보내봐야 하나.”
―그전에 빅뱅 패치될 듯ㅋㅋㅋㅋ
―그거네
―돈슨 노렸구나?
―답변 오는데 최소 2주는 걸림!
돈슨의 온라인 고객센터는 악명이 높다.
롤·오버워치·배그가 득세하게 된 후로는 그나마 얌전해지지만 현재는 완전히 배째라주의다.
짧게 잡아도 1주일은 기다려야 한다.
“제가 지금부터 30분만에 문의 답변 받는 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나에게는 30분이면 족하다.
돈슨 홈페이지에 로그인해 키보드를 두들긴다. 문의 메일 작성 시 가장 신경을 써야 하는 건 바로 제목이다.
─캐시가 없는데 캐시 아이템이 구매돼요.
뻥이고요
핑크빈 원정을 하는데
여신석상 빛줄기 데미지가 2배로 올랐습니다
비교 사진 첨부할 테니, 신속한 답변 부탁드립니다
“이렇게 쓰면 반드시 보게 돼있어요.”
―천잰갘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자본주의는 못 참지
―돈슨 어리둥절행
―ㅋㅋㅋㅋㅋ뻥이고요 너무 당당
근데 이게 실제로 먹히는 방법이다. 돈슨 고객센터는 문의 메일을 받았을 때 심각도를 상·중·하로 나눠서 분리해 대응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보낸 순서대로 보는 게 아니라고.
'캐시라는 단어가 들어가면 무조건 상으로 분류돼.'
왜?
돈슨이니까.
사실 그래도 30분은 오바고 화가 난 시청자들을 달래줄 콘텐츠 겸해서 보내본 거였는데.
─[New] 문의 메일 답변이 도착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언제나 모험가님의 행복을 기원하는 ★GM돈슨★입니다.
단풍잎스토리의 개선을 위해 소중한 의견을 보내주셨어요!
당장 도움을 드리진 못하지만, 모험가님께서 말씀해주신 내용을 토대로 핑크빈 데미지에 대해 신중히 검토해보겠습니다.
게임 내 적용이 된다면 단풍잎스토리 홈페이지를 통해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_ _) 귀한 시간 내어 소중한 의견을 보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답변에 대한 모험가님의 의견을 남겨주세요!
“X발ㄹ…… 아니 고생한다고 남겨드려야겠네요.”
―야발련아!
―딜교환 클라스 보소
―어림도 없지! 매크로 500배
―멍군 장군 주고 받누ㅋㅋ
하지만 돈슨도 만만치 않았다. 그에 대한 대처까지 완벽한 모습이, 어째서 돈슨이 돈을 그렇게 많이 벌 수 있었는지 깨닫게 해준다.
'물론 문의 메일 답변하는 분들은 그분들 나름대로 고충이 있지.'
감정 노동이라 할 수 있는 상담원한테 화를 내는 건 할 짓이 아니다.
그런 대응을 하게 만든 기업측의 메뉴얼 잘못이 크다. 그들을 방패막이로 삼는 것도 포함된 것이겠지만.
“문의 메일은 반장난이고요. 사실 제가 돈슨 개발부에 아는 분이 계셔요. 직접 전화를 해보겠습니다.”
―오오?
―설마 돈슨이 일을 하나?
―크~ 인맥
―어림도 없을 거 같은데ㅋㅋㅋ
바로 전화를 걸어본다.
* * *
「후회~ 하고 있어요. 우리 다투던 그 날―!」
핸드폰의 벨소리가 울린다. 장연수는 당황하지 않고 조금 뜸을 들인 후 통화 버튼을 누른다.
“예, 개발부 장연수입니다. 아~ 오정환씨?”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BJ오정환의 방송. 실시간으로 모니터링을 하며 주시 중이다.
“일단은 확인을 해봐야 하는데……, 제가 아는 선에서는 조정을 한 적이 없고 버그일 가능성이 있어 보입니다.”
<버그요?>
“햄버거를 씹었을 때 의도치 않게 양상추가 튀어나오는 것처럼 프로그래밍이라는 게 원래 그래요~.”
대꾸할 말도 준비해두고 있었다. 원래 그래.
프로그래밍의 흉악함은 일반인들도 이러니저러니 듣는 게 있다.
물론 실상은 다르다. 일부 데미지 수치를 고쳐 넣었다. 서버를 내리지 않고 할 수 있는 최대한이었으니까.
'빅뱅 업데이트 때 다시 고쳐 넣으면 자연스럽잖아.'
오정환의 공략을 봤을 땐 간담이 서늘했다.
이러다 설마 깨는 거 아니야? 멤버도 무슨 스카니아 올스타를 다 섭외해왔다.
하지만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 운영자의 직권을 이길 수 있는 건 없다. 패치까지 남은 이틀 동안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어쩔 수가 없네요. 어쩔 수가 없네…….>
“이용에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다음 업데이트까지 꼭! 고쳐 놓을 테니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전화를 끊고 다시 모니터링을 한다. 화면으로 보이는 오정환은 통화 내용을 곱씹으며 투덜대고 있다.
'네까짓 게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야.'
고작해야 시청자들에게 불만을 토로하는 정도.
다소의 항의는 충분히 묵과할 수 있다. 버그라는데 어쩔 수 없는 거잖아?
어쩔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여라. 그만 좀 귀찮게 하고.
장연수는 드디어 의자를 젖히며 편안한 기분을 맛본다.
자신이 중심이 되어 2년간 준비한 '빅뱅 업데이트'. 그 출시를 앞두고 논란이라니 절대 있을 수 없다. 오정환이라는 변수를 사전에 차단해둔다.
'이 정도 해두었으면 안심하고 업무에 집중해도 되겠지.'
안 그래도 바쁜 와중에 시간을 너무 지체했다. 그토록 원하던 빅뱅 패치의 업무로 돌아간다.
* * *
대단한 인맥을 기대한 건 아니다. 그래도 개발자라는 직함을 가졌으니 뭐라도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분이 페스티벌때 단풍잎스토리 부스 현장 안내하시던 분인데 권한이 딱히 없나 봐요.”
―쫄따군가 보네
―누구였지
―기억이 안 나
―아 그 배 나온 아저씨?
그렇게 능력이 있진 않은 모양이다. 흔하디 흔한 버그 하나 어떻게 하지 못하는 것 보면 말이다.
'정말 버그라면 그렇다는 소리지만.'
더블 캐스팅을 한 것도 그렇고, 속내가 있어 보이던 양반이다. 사실은 고칠 수 있었던 걸 수도 있고, 아니면 알면서 입을 다물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괜한 추측이다. 의심을 하자면 끝이 없다.
그럼에도 생각을 곱씹는 건 내가 조금 화가 났기 때문이다.
“제가 있는 인맥, 없는 인맥 다 동원해서 스카니아 랭커를 29명이나 잡아두고 있고. 시청자분들도 핑크린의 첫 격파를 보기 위해 무려 8천 명이나 기다리고 계신데……. 버그 하나 때문에 일이 이렇게 돼버렸네요.”
―미션도 다 날아감ㅋㅋㅋㅋㅋㅋㅋ
―지금 미션이 문제냐
―와 보는 내가 다 빡치네
―진짜 버글까? 타이밍 너무 공교롭지 않음?
나 하나 귀찮은 건 이해해줄 수 있는데 너무 많은 사람들이 엮여있잖아.
그걸 어쩌다 생긴 버그 때문이라고 퉁 치는 게 말이 되냐고. 이런 일이 지금까지 한두 번이었던 것도 아니다.
'사실 나 하나 귀찮은 것도 이해해주긴 싫은데.'
여하튼 대의명분을 세우자면 그렇다는 소리다.
게임사든 나발이든 간에 지들 ㅈ대로 하면, 나도 ㅈ대로 하는 방법이 존재한다.
“님들 혹시 이이제이라고 아세요?”
―EEJ?
―以夷制夷?
―이이제이 아시는구나!
―근데 그게 왜
말 그대로 오랑캐를 오랑캐로 제압한다는 뜻이다.
돈슨이니까 돈을 먹여야 된다는 소리는 아니고.
패치를 이틀 앞두고 우연히 버그가 생긴 거라면, 나도 우연히 버그를 사용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어쩔 수 없잖아.'
사람이 좋게 좋게 말하는데 듣지 않으면 나도 더 이상 좋게 좋게 해줄 이유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