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이이제이
두두두두―!
파바바박―!
난공불락의 보스 몬스터, 핑크린을 향해 30인 공대의 화력이 쏟아진다.
1단계의 할배 석상이 채 3분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진다.
─할배 석상이 무너지며 핑크린의 종속에서 풀려납니다!
─1단계가 끝났습니다. 곧 2단계가 시작됩니다!
하지만 쉴 틈이 없다. 바로 다음 단계가 시작된다.
할배 석상이 부활하며 맞은 편에는 할매 석상까지 일어서지만.
“바로 넘어가서 할매 석상부터 때립니다. 언데드화가 있어서 무조건 먼저 잡는 게 좋아요.”
―무조건?
―오
―순서가 있네
―무한 츠쿠요미 공략법ㄷㄷ
순서만 바르게 공략한다면 난이도를 대폭 낮출 수 있다.
2번째 시도.
앞서와 마찬가지로 질서정연하게 내 오더를 따라 움직인다.
'당연하지.'
내 고정 공대원은 물론이고, 아닌 이들도 스카니아의 베테랑들이다. 전원이 핑크린 경험을 가지고 있다. 레이드의 숙련도도 발군이다.
두말해서야 입 아프지만, 실수라는 건 구멍이 있기에 생기는 것이다. 구멍이 없으니 이렇듯 실수가 나오지 않는다. 일반적인 난이도라면 말이다.
─아군이 당했습니다!
적 더블 킬!
3단계부터 비둘기 석상이 쓰는 공격 반사.
근접이면 모를까, 체력이 낮은 격수들은 1초만 한눈 팔아도 즉사한다.
핑크린의 공략이 더뎌지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인데.
오정환 : 선 넘지 말라니까요?
타락파워닼나 : 아 스탠스가 풀려서
타락파워닼나 : ㅈㅅㅈㅅ
첬첬 : ㅋㅋ
“제 마우스 포인트 보이시죠? 여기만 안 넘어가면 공반이 안 걸려요.”
―그렇구나
―저 창기사가 트롤했네ㅋㅋ
―근데 걸릴 수밖에 없음
―??? : 마지막 구호는 생략한다
실수 안 한다며?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이건 엄밀히 따지면 실수가 아니다.
'심지어 마지막 구호 생략은 대통령도 걸려봤대잖아.'
군 생활 당시 말이다.
한 10명 정도면 모를까. 수십 명씩 있으면 무조건 한 명은 긴장이 풀릴 수밖에 없다.
중요한 건 그 한 명이 타산지석이 돼서 다음 실수가 나오지 않는 것이다.
역시 정예 of 정예 of 정예.
3단계도 무난하다.
오정환 : >>>>>
언덕위의달 : 오른쪽?
미들마치 : 왼쪽 스타트는 쓰레기임
―오우
―말 잘 듣는 거 봐
―공대장 말을 따라야지
―히비키급 정리ㄷㄷ
4단계는 오른쪽 스타트가 매우 중요하다. 새로이 생기는 독수리 석상이 단체 유혹을 걸기 때문이다.
'걸리면 그냥 단체로 떼죽음이야.'
카오스 라테일에서 걸리는 단체 유혹은 생존률이 생각보다 낮지 않다.
왜냐?
날개와 각 머리가 소환하는 잡몹들이 맵 전체를 돌아다닌다.
그리고 단풍잎스토리는 피격되면 1초의 무적 시간을 가진다. 1/1과 번개 등 각종 위협적인 공격을 피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핑크린은 그렇지 않고, 생으로 노출이 되는데.
“여기 제가 긋는 선 보이죠? 여기만 안 넘어가면 유혹을 안 써요.”
―오
―그래서 오른쪽이구나
―왼쪽은 쓰레기!
―크큭~ 선이 보인다
공대장의 통솔만 잘 듣는다면 애초에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오른쪽에 있는 할매 석상과 독수리 석상을 격파하고, 왼쪽으로 넘어가 부활한 할배 석상의 모가지를 딴다.
'진짜 문제는 여기서부터지.'
어, 실수만 안 하면 ㅈ밥이네?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돈슨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사실을 문의 답변을 통해 배웠다.
4단계가 끝나면 바로 5단계가 시작된다.
석상이 부활한다는 특성상, 이동 중에 불가피하게 선을 넘게 된다. 핑크린의 공략이 어려운 이유 중 하나다.
“4단계 실피에서 표도 한 명만 왼쪽에 남기고 나머지 29명은 오른쪽으로 이동합니다.”
―죽으면?
―버리는 카드네ㅋㅋ
―왼쪽은 쓰레기!
―쓰레기니까 안 살리는 거야?
이렇듯 공략 루트만 잘 지키면 사고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 아무도 선을 넘어간 적이 없게 되니 유혹도 걸리지 않는다.
'다소의 희생은 따르지만.'
왼쪽에 남은 한 명이 반드시 죽는 건 필요한 희생이다.
전세계 유저들이 합심하여 알아냈다. 선의 존재를 명확히 한 것이 중국 유저들이고, 공략 루트를 정립한 건 한국 유저들이다.
그리고 내가 그 정보들을 활용하여 격파한다. 여기까지는 계획대로. 아니, 이전 첫 번째 시도 때도 무리 없이 성공시켰다.
─아군이 당했습니다!
적 더블 킬!
변수는 언데드화 등으로 간간히 터져 나오는 죽음.
약간 정도는 부활로 살릴 수 있지만, 한도를 넘어가게 되면 통제가 불가능해진다.
'운명의 수레바퀴는 만능이 아니야.'
부활 효과를 가진 캐시 아이템이다. 얼핏 만능 같아 보여도 성직자가 가진 것과는 명백한 차이점을 지닌다.
1. 버프가 완전히 리셋
2. 유혹 순번이 마지막으로 이동
3. 부활 자리가 맵 좌측 지점으로 강제됨
1, 2번이야 그렇게 치명적이지 않지만 문제는 3번이다.
맵 좌측 지점. 즉, 부활하는 순간 오른쪽에서 벗어나 버린다.
단체 유혹이 오며 의도치 않은 패닉 상태를 유발시킨다.
부활이 부족함→ 운명의 수레바퀴 사용→ 단체 유혹
뫼비우스의 띠에 갇히며 공략을 실패한다.
'카오스 라테일처럼 부활을 잘 돌려막아도 한계가 있어.'
카오스 라테일은 제한 시간이 2시간 30분이다.
비석이 돼도 최대 10분까지는 마을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점을 활용해 극한의 효율을 추구할 수 있다.
하지만 핑크린은 겨우 1시간. 딜러가 딜을 하지 않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된다.
딜로스가 누적되면 결국 격파하지 못한다는 결과는 매한가지이기 때문이다.
이 점을 돈슨도 안다.
할매 석상의 언데드화 패턴 등 불확정 요소를 추가한 이유다. 유저들의 원성을 최소화하기 위해 철두철미하게 잠수함 패치로 말이다.
쿠루룽―!
빛줄기의 데미지가 엄청나게 강력해진 것 또한.
무려 2만에 달하는 사실상의 즉사기가 내 머리 위로 떨어진다.
“안 죽어요. 이이제이라고 했잖아요.”
―???
―헐
―뭐야? MISS 났나
―설마 회피한 거임??
아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롤에서 평타나, 채팅창 강퇴도 무빙 잘하면 피할 수 있다.
'그런 건 아니고.'
애초에 무빙을 못 한다. 통통배에 타서 공격을 하는 해적의 특성상 말이다. 배에서 내리면 경직 상태에 걸리는 버그도 있어서 마음대로 못 움직인다.
그렇게 움직이지 못할 때. 키보드에서 Alt + Tab키를 살포시 누른다.
딱히 위기에 처한 타조처럼 눈앞의 현실에서 눈을 돌리는 게 아니다.
“유구한 역사를 가진 단풍잎스토리는 유저들의 창의성에서 태어난 여러가지 플레이 방식이 있습니다.”
―해석) 개똥겜이라 잡버그 개많음
―ㅁㅊㅋㅋㅋㅋㅋㅋㅋㅋ
―무적이 된다고??
―와 나 저거 상상으로만 해봤는데
전체 화면 모드로 플레이할 시 Alt + Tab을 눌러 바탕화면으로 가면 렉이 발생한다.
그 과정에서 캐릭터는 반쯤 튕긴 상태가 되어 무적이 되어버린다.
'다른 맵으로 이동할 때 점프 상태에서 가만히 있는 거 말이야.'
이를 인위적으로 유발시킨 것이다. 아무리 강력한 공격이라도 맞지 않으면 소용 없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공대원들에게 알려 일련의 회피기를 사용하자.
─여신 석상이 무너지며 핑크린의 종속에서 풀려납니다!
─5단계가 끝났습니다. 핑크린이 왕좌에서 일어납니다!
길고 길었던 츠쿠요미가 끝이 난다.
마지막 6단계.
핑크린을 영접할 순간만을 남겨두었다.
* * *
오정환의 핑크린 레이드.
빅뱅 패치라는 대규모 업데이트를 눈앞에 두고 가장 화제가 되고 있다.
─오정환 작정했네 ㄷㄷ
별풍도 막아두고 빡집중하고 있음
카텔 깰 때도 후원은 열어뒀던 걸로 아는데
└진심 모드네
└다 쇼지ㅋㅋㅋ
└ㅇㅇ 절대 못 깸
└나도 정환이 방송 보지만 핑크린은 안돼……
난공불락의 보스 몬스터다. 쓰러지는 모습 자체가 상상이 안 간다. 그런 핑크린을 오정환이 과연 격파할 수 있을지.
─절대 못 깬다는 새끼들은 뭐지?
오정환이 지금까지 보스몹 아다 다 깨고 다녔는데ㅋㅋ카텔 깰 때도 절대 안된다던 새끼들은 ㅇㄷ?
└마 카텔이랑은 다르지
└ㅄ?
글쓴이― 그래서 절대 못 깬다는 증거는?
└아니, 패치 이틀 놔두고 깬다는 것 자체가 쇼라니까?
찬반 여론이 불똥을 튀긴다.
찬성쪽은 오정환이니까. 반대쪽은 오정환이라도.
아무리 지금까지 승승장구의 행보를 밟고 있는 오정환일지라도 확신이 안 선다.
그만큼 핑크린이 가진 위상이 대단하기 때문인데.
─(정리글) 현재 오정환 공대 핑크린 공략 상황. txt
1~4단계 18분대 격파로 역대 최단 기록 갱신
무난하게 5단계 격파하고 핑크린 가는 분위기였는데
여신 석상 데미지가 2배 가량 올라있음(???)
패닉 와서 오정환까지 죽고 ㅈㅈ
└2배면 얼마 박히는데?
글쓴이― 2만 이상
└2만ㅋㅋㅋㅋㅋ 타락파워전사 체력이 1.2만이다
└어케 깨누 X발련ㄴ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를 써내리는 듯했다. 그 광경을 정말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았다. 누적 시청자 수가 10만 명을 돌파했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그런데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버그라니?
RPG 유저들이 세상에서 제일 듣기 싫어하는 단어가 나온 것이다.
─돈슨 X발 새끼들이네ㅋㅋㅋㅋㅋㅋㅋ
─'돈슨'해버렸다
─카텔 때처럼 깨려고 하니까 X랄하는구나
─이건 빼박 의도된 버그다 ㅇㅈ?
…
…
안 그래도 불타던 커뮤니티에 기름이 들이부어진다.
돈슨의 만행.
지켜보던 유저들의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그뿐이다. 합리적 의심과 확신은 엄연히 다르다. 회의적인 여론도 일부 찾아볼 수 있다.
─어차피 못 깬 건데 돈슨이 막타 쳐준 거 아님?
1~4단계 깨면 뭐해
가장 큰 문제는 핑크린 본체인데
애초에 진짜 버그일 수도 있는 건데 과몰입하는 놈들이 문제임 ㅉㅉ└?? 별 희한한 병신이 다 있네 └개돼지인가?
글쓴이― 네 다음 인방충
└무작정 빠는 놈들도 역겹긴 함ㄹㅇ
물론 다수 의견이라고 보긴 힘들다. 대부분의 유저들이 돈슨에게 작든 크든 화가 나있다.
문제는 이런 일이 지금까지 한두 번이 아니었다는 부분이다.
시간이 지나면 어느새 잊힌다. 신규 패치에 대한 관심이 더 앞서게 된다.
이 또한 '빅뱅 업데이트'라는 거대한 흐름에 묻힐 조그마한 반항에 지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오정환 X발 이 새끼도 정상은 아니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버그 때문에 못 깨게 생기니까 직접 버그 써서 깨고 있음 핑크린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뭔 버그?
└설띵 좀
글쓴이― 잘은 모르겠는데 알탭 하면 무적되나 봄
└헐ㄷㄷㄷ 진짜 미친 새끼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버그로 인해 강화된 데미지. 그것만 쏙 무시하며 여신 석상을 때려잡는다.
일련의 행위가 잘못인지에 대한 비판은 흥미의 대상이 아니다.
정면으로 맞서고 있다.
유명한 네임드, 1만 명에 육박한 시청자를 가진 BJ가 총대를 멘다. 직·간접적으로 지켜보고 있는 수십 만의 돈슨 피해자가 이를 지지한다.
「Maple) 오정환. 핑크린을 버그 때문에 못 깨야 한다고? ㅋ」
? 본방 : 1421 (PC: 705/ MOBILE: 716)
? 중계방 : 8, 874
? 누적 시청자 수 : 131, 569
물론 해프닝으로 끝나선 안 될 일이다.
오정환의 방송.
역대급의 시청자가 실시간으로 지켜보고 있다. 어쩌면 거대한 흐름에 묻혀 사라져야 했을 조그마한 반항이 기적을 일으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