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해적이란 직업은 사실 애매하다.
'나도 이걸 대체 왜 했는지 모를 만큼.'
솔직하게 말하면 안다. 내가 힙스터 기질이 좀 있어. 아무도 안 하는 직업을 키우고 싶었다.
전체 유저의 단 0.3%. 4차 전직 이상을 따졌을 때 가장 적은 수다. 아니, 비교할 직업이 없을 정도로 마이너하다.
희귀 직업이라는데 당연히 해야지!
그렇게 대책 없이 고른 것은 아니다. 키우기만 하면 보상값이 확실하다는 계산이 섰다.
『? *제목 없음― Windows 메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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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계산을 했다. 물론 지금의 내가 아닌, 과거의 내가 말이다.
'딱히 드문 일도 아니야.'
차후에야 피지컬로 때려잡는 롤, 오버워치, 배그 등이 득세하지만 현재의 주류 게임은 누가 뭐래도 RPG다.
그리고 RPG는 직업빨과 템빨에 크게 좌우된다.
"계산기 두들겨보니까 다른 주류 직업보다 해적이 좋다고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에요."
―음……
―무슨 얘긴진 알겠는데;;
―너무 오바 아닌가?
―님 이과죠
RPG게임을 제대로 즐기는 사람이라면 기본적으로 신경 쓴다.
나 또한 그랬고, 직업 선택에 신중을 기했다.
해적 95/m
(300x0.35+350x0.65)x5x1.2=1995%
표도 99/m
250x0.2+300x0.8)x3x1.5=1305%
듀블 26/m
280x0.45+330x0.55)x12÷2x1.5=2767.5
히로 61/m
(205x0.7+255x0.3)x3x2=1320%
궁수(활) 500/m
(200x0.3+250x0.7)+(150x0.3+200x0.7)x0.4=309%
.
.
.
그것이 남들보다 조금 과했을 뿐.
일부 시청자들이 어처구니가 없다며 채팅을 칠 만도 하다.
'그런데 이게 필요해.'
계산 자체는 초등학생도 할 만큼 쉽다. 어려운 건 자료의 수집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각 직업의 데이터를 하나하나 끌어 모아야 했으니까.
─강팀충님, 별풍선 10개 감사합니다!
%만 보면 듀블이 제일 센 거 아님?
"한 방 딜은 센데 다단 공격이라 방어력 영향을 많이 받고, 무엇보다 공격 속도가 느려요. 옆에 26/m 보이시죠?"
옛날 일찐들이 시전하던 새비지 블로우도 울고 갈 무려 24단 공격이다. 이펙트 자체는 화려하기 그지없지만.
'치도리, 천본앵, 지건, 진심 펀치, 벽력일섬으로 이어지는 유서 깊은 계보지.'
Damage per Second, 초당 데미지로 환산하면 이야기가 다르다.
데미지 비교가 쉽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각 직업이 가진 특성까지 고려 대상이다.
1H Sword 1.10*(4 * STR + DEX) * (Weapon Attack / 100) 2H Sword 1.29*(4 * STR + DEX) * (Weapon Attack / 100) Spear 1.49*(4 * STR + DEX) * (Weapon Attack / 100) Bow 1.15*(4 * DEX + STR) * (Weapon Attack / 100) Claw 2.00*(4 * LUK + DEX) * (Weapon Attack / 100)
Gun 1.60*(4 * DEX + STR) * (Weapon Attack / 100)
.
.
.
스킬 뿐만 아니라 스탯 공격력 공식도 포함된다. 직업과 무기에 따라 계수가 다르기 때문이다.
"스킬 데미지만 따지면 궁수도 엄청나게 세요. 그런데 Bow의 계수가 1.15밖에 안돼서 스탯 공격력이 상대적으로 낮습니다."
―ㄷㄷㄷ
―존나 머리 아프게 사네
―아니 시발ㅋㅋㅋㅋㅋㅋㅋ
―저런 걸 대체 언제 해놓은 거야……
나도 모르겠다. 왜 이런 짓까지 했는지.
하지만 이렇게 쭉 정리된 표를 보면 의미는 있다.
어째서 표창 도적은 부자의 직업일까?
계수가 높아 아이템빨을 잘 받기 때문이란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해적이 꿀직업일 수밖에 없는 이유도.
─어둠의오정환님, 별풍선 10개 감사합니다!
해적은 계수도 높고 스킬딜도 높아서 세다는 거네
"바로 그거에요! 과거의 제가 한 계산도 의미 없는 바보짓은 아니었다는 거죠."
어느 어느 직업이 세더라~
이런 평가는 결국 유저들의 감과 소문에 달렸다. 정확한 수치는 모를 수밖에 없고, 필연적으로 꿀이 한두 개는 숨겨져 있다.
'대부분의 게임은 다 그렇다는 게 내 지론이야.'
롤만 봐도 꿀챔프가 매달 새로이 발견된다. 선입견으로 인해 저평가를 받아왔을 뿐이다. 해적의 상황이 그러했고, 나는 그 본래 성능을 끌어냈다.
두두두!
두두두두두―!
그 결과.
통통배에서 엄청난 속도로 포탄이 쏘아진다.
DPS 하나는 단풍잎스토리 최고라고 할 수 있는 해적의 위엄이다.
"체력 깎이는 거 보이시죠? 이걸 맛보고 어떻게 다른 직업을 해요."
―오우……
―딜은 진짜 살벌하네
―펑이조보다 센데?
―요즘 겜도 안 했으면서 언제 풀템을ㄷㄷ
빅뱅 패치가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건 아이템이다.
레이드의 인원수 감소와 직업별 밸런스는 부수적인 결과에 지나지 않다.
'근데 결국 캐시 바르는 거라서.'
따로 아이템을 맞출 필요도 없이 잠재력만 잘 일깨우면 된다.
짬날 때 조금씩 해두었다. 최상은 아니어도 그럭저럭 구색은 갖추고 있다.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카쿰을 물리친 원정대여! 그대들이 진정한 설원의 수호자다!』
가벼운 솔로쿰.
전투력을 측정을 겸한 레이드가 끝난다. 빅뱅 패치 이전 기준으로 40분가량 소요되었다.
"지금은 겨우 7분 걸리네요."
―미친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게 빅뱅인가?
―운영자가 미쳤어요!
―펑이조보다 빠르네. 역시 클라스는 여전한가……
단순 계산으로 6배 가까이 세진 셈이다.
기존에 6인 파티로 진행하던 레이드가 솔로잉으로 전환되는 것도 자연스럽다.
'원래는 내가 먼저 하려고 했는데.'
보라 콘텐츠 진행으로 바빴다. 그 잠깐 사이에 펑이조에게 빼앗겼다. 경쟁 의식을 꽤나 불태우고 있던 모양이다.
솔로 레이드의 어그로를 빼앗긴 건 아쉽지만 되찾아오지 못할 것도 없다. 이렇듯 딜은 강력하다. 해적은 절대 표도보다 부족한 직업이 아니다.
─거품팡님, 별풍선 10개 감사합니다!
그래봤자 유혹 맞으면 꼼짝 못해!
"……."
―유박꼼ㅋㅋㅋ
―해적은 생존기가 없어서
―딜은 ㅇㅈ인데
―ㅇㅇ 그래서 파티 플레이해야 함
물론 딜적인 면에서는 말이다.
LCK에서 생존기 있는 원딜러가 각광 받듯, 솔로 레이드도 생존이 빈약하면 한계가 명확하다.
'확실히 문제이긴 해.'
일련의 약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해적을 만렙에 가깝게 키웠으니 만큼 당연하다. 열심히 키운 캐릭터를 돈슨의 변덕 하나로 잃는 것은 사양이다.
「Maple) 오정환. 해적은 솔텔을 못한다고 누가 정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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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어그로 좀 끌어볼 시간이다.
* * *
술이 깨고 냉정해진다. 어젯밤 곱창집에서 마른 오징어 안주를 씹으며 나눴던 통화.
'그래서 어떻게?'
이른 아침 출근하고 있는 장연수는 의문이 차오른다. 그때는 감정도 북받치고, 술김도 있어서 될 대로 떠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연히 족치고 싶으니까.
문제는 현실성이 없다는 부분이다. 막말로 가능했으면 진작에 했다.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그 부하 직원부터 찾는다.
자신의 생각에는 도저히 불가능해 보인다.
"아 부장님!"
"어제 했던 전화 빈말 아니지?"
"당연하죠~ 커피나 한잔하면서 얘기하시죠."
오정환이 플레이하는 직업.
빅뱅 패치로 인해 다소 아쉬워지는 감이 생기는 것은 맞다.
'근데 그만큼 장점도 있어.'
DPS 하나는 최강으로 설계되었다.
장점이 있는 대신, 단점이 있는 건 어느 게임이든 마찬가지일 것이다.
고작 그런 이유로 클레임을 건다고?
"보세요. 얘."
"펑이조?"
"얼마 전에 솔텔을 했더라고요~."
커피 자판기 앞.
핸드폰을 꺼내더니 한 BJ의 녹방을 보여준다.
그 내용 자체는 솔직하게 놀랄 건덕지가 없다.
'그야 그렇겠지.'
개발자들이 아무 생각 없이 패치를 내놓는 게 아니다.
변경점들이 어떠한 여파를 미칠지. 그 파급을 당연히 고려한다.
딜이 엄청 세진다고? 그럼 솔로 보스도 가능해지겠네.
예상을 하는 것이 딱히 어렵지 않기도 하다.
"다 예상했잖아?"
"그렇긴 하죠."
"그래서 그걸 뭐 어쩌라고."
이미 전례가 있으니까.
파툴라푸스.
가장 약한 보스 몬스터지만, 4차 전직 추가 전에는 6인 파티로 공략해야 했다.
4차 전직 추가 후 화력이 세지자 솔로 클리어가 당연시됐다.
마찬가지의 현상이 생기는 것도 자연스럽다. 왜 그런 것 가지고 소란을 떠는지.
"걔는 BJ잖아요."
"뭐, 그렇지."
"펑이조는 하는데 지는 못 하면 가오가 상하겠죠."
"흠……."
젊은 직원의 이야기도 들어보고 볼 일이다.
자신도 늙은 나이는 절대 아니지만, 확실히 인터넷 방송을 잘 아는 세대는 다르다.
'확실히.'
경쟁 심리가 생길 만하다. 수많은 시청자들이 지켜보고 있으니 말이다.
그것도 실력 때문이 아닌 직업이 가진 한계 때문이라면 납득하기 힘들 수 있다.
"솔텔을 실패한다!"
"음."
"오정환이 해적 상향을 요구한다!"
"음~."
"그러면 그 자식 시청자들이 난리가 나겠죠."
"오호라."
승승장구하며 콧대가 높은 녀석이다. 시청자들도 그에 못지 않게 오만방자하다. 요구를 하면 운영자들이 대가리 박고 다 들어줘야 하는지 안다.
'그때 확실하게 선을 그어버리자?'
여론만 믿고 날뛰는 오정환과 그 시청자들을 길들인다. 확실한 명분과 근거가 있는 건 이쪽이니까.
그렇다 해도 불안한 감을 지울 수 없는데.
"그리고 우리가 펑이조를 밀어주면……."
"너 혹시 천재냐?"
"사실 학창 시절에 좀 듣긴 했습니다 헤헤."
짐승의 싸움에 인간이 끼어들 필요가 없다.
이이제이(以夷制夷).
짐승은 짐승에게 맡겨두는 것이 베스트다.
'이 짐승 새끼.'
카페인이 몸에 돌며 정신이 말똥해질수록 분노 또한 선명해진다.
오정환에게 가진 원한은 고작 그 정도가 아니다.
민하 씨.
관심이 있던 안내데스크의 그녀마저 빼앗겼다.
데이트를 하는 둘의 모습을 떠올리면 지금도 속에서 열불이 끓는다.
"그럼 제가 펑이조를 섭외해서 경쟁을 한 번 붙여보겠습니다."
"그래, 필요한 거 있으면 직통으로 연락하고."
"저만 믿어주십시오!"
다음 날 오후.
기다리던 소식이 들려오긴 했는데.
* * *
오정환의 복귀 소식.
그와 동시에 걸려온 돈슨의 전화.
갑작스러운 상황이지만 오히려 바라고 있던 바다.
'딱 대 이 새끼야!'
한때 단풍잎스토리 1위를 고수하던 펑이조.
오정환의 등장으로 나가리되며 방송적 위기를 겪었다. 재기를 한 지금까지 해온 고생은 이루어 표현하기 힘들 지경이다.
하지만 본연의 자리를 되찾았다.
빅뱅으로 새로워진 단풍잎스토리.
그 중심에 서는 건 자신이라고 돈슨에게까지 인정받은 것이다.
─거품팡님, 별풍선 10개 감사합니다!
오정환이 작정하고 표도 키우면 무섭긴 할 듯ㅋㅋ
"……."
물론 이전과는 다르다.
오정환도 더 이상 하꼬가 아니고, 작정하고 돈을 쏟아붓는다면 피를 말리는 치킨 게임이 돼버린다.
자신이 없다는 건 아니다. 그래도 피하고 싶은 것이 사실이다. 다행히 오정환은 가장 멍청한 선택지를 고르고 말았다.
─fldkdla892님, 별풍선 10개 감사합니다!
그냥 해적으로 한다는데요? 자긴 자신 있다고 지금 템 맞추는 중!
"흠흠! 뭘 좀 아는 친구네. 사람이 정정당당해야지."
―???
―펑이조와 정정당당이라^^;
―방송 간만에 보는데 개그도 많이 늘었네ㅋㅋ
―양심이 펑 터져서 펑이조?
충신지빡이님이 강제퇴장 되었습니다!
오정환의 직업인 해적.
펑이조도 이제는 알 만큼 안다. 게임 지식도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다.
그렇기에 불가능하다고 확신한다. 설사 악전고투 끝에 깬다고 하더라도 만신창이다.
'수십 번 죽고, 제한 시간 꽉 채워서 깨봤자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
체면만 와장창 구기는 것이다. 그것도 두 시간이 넘게 실시간으로.
그에 반해 자신은 1시간 50분만에 몇 번 죽지도 않고 격파했다.
돈슨이 자신을 괜히 높게 평가하는 것이 아니다.
단풍잎 원탑 자리는 이미 되찾았다.
그가 망신살을 뻗치는 모습을 여유롭게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데.
『수많은 도전 끝에 라테일을 격파한 원정대여! 그대들이 진정한 라프레의 영웅이다!』
그 기다림이 1시간가량 단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