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J로 산다는 것-98화 (98/846)

98화

여캠과 애프터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BJ들이 방송을 끄면 두 다리 쭈욱 뻗고 꿀잠만 자는 게 아니다.

사생활이라는 게 존재한다.

똑, 똑!

두꺼운 철문 바깥에서 소리가 난다.

초인종이 있음에도 그조차 눌러볼 용기가 안 생긴다.

'그런 경험이 한 번씩은 있지.'

설마 하는 마음이 너무 커지면 일어난다. 눈앞의 현실을 확인하는 것이 두려워진다.

일단 두들겨보고, 한 번 더 해보고, 그래도 반응이 없으면 초인종을 눌러보자.

억측이라 하기에는 그녀의 심리 상태를 잘 알고 있다.

너무 애타게 해버린 걸지도 모른다. 구태여 뜸 들이지 않고 현관문을 열어젖히자.

"아……."

노크를 하는 자세 그대로 굳어있다.

정말로 한 번 더 해보려고 했던 모양이다.

입을 다물 생각도 못 한 채 우물쭈물 엉거주춤하게 서있는 모습이 미우다.

"무슨 일이에요?"

"그게 그……, 와도 된다고 해서."

"용건이 있으니까 왔을 거 아니에요."

그렇게 필사적일 거면 처음부터 잘하던가. 방송 시간 꽉 채우고 갔는데 나만 욕 먹잖아.

내 심기가 불편하다는 걸 눈치챘는지 죄인이 된 표정으로 바들바들 떤다.

샤락―

마치 다친 강아지를 쓰다듬는 것 같다. 볼가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 뒤로 넘긴다. 처음에는 놀란 듯 경계했지만 이내 얌전히 몸을 맡긴다.

"일단 들어와요."

"저 진짜 너무 죄송해서……."

"들어와서 얘기해요."

손님을 현관에 세워두는 건 실례가 되니까.

게다가 워낙 눈에 띄는 외모다.

'동네방네 소문 나서 좋을 건 없잖아.'

또각또각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긴다.

별 볼 일 없는 장소의 안으로 도착한다.

"좁죠?"

"아뇨, 그……."

"솔직하게 말해도 돼요."

8평 남짓한 셋방.

남자 한 명 살기엔 거뜬하지만, 누군가를 초대하기엔 초라한 게 사실이다.

'그리고 BJ들이 보통 허영심이 쩔거든.'

나도 없다고는 말 못 하겠다. 그래도 덜한 것은 사실이고, 비교가 될 테니 신경 쓰일 만하다.

"엄청 유명하셔서 좀 더 좋은 곳에 사실 거라 생각하긴 했어요."

"하하."

"왜 웃어요?"

"리아씨도 여캠인데 크게 신경 안 쓰고 살잖아요?"

"그도 그렇네요 헤헤."

분위기가 조금 풀린다.

조금.

익숙하지 않은 장소에서 단둘이 있는데 어색하기까지 하면 숨 막히는 건 마찬가지다.

또르르―

녹차를 한 잔 내린다. 긴장과 불안을 죽이는 데는 따듯한 차 한 잔 만한 게 없다.

"진정이 좀 됐어요?"

"네."

"울었어요? 얼굴이 탱탱 부었네."

"살면서 이렇게 울어본 적 없어요……."

나와의 방송이 끝난 후의 이야기. 상했던 속을 털어놓자 표정이 조금은 풀린다. 따듯한 차가 온몸에 돌자 창백했던 안색도 돌아온다.

"그럼요."

"네."

"리아씨는 여기 왜 온 것 같아요?"

"……."

병 주고 약 주고.

그렇게 보일 수도 있지만, 내가 그 정도로 잔인한 사람은 아니다.

'사람의 생각이라는 건 입 밖으로 꺼내고 나서야 확신이 들어.'

정말로 그것이 진심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을 때가 있다. 유일한 해결법은 입에 담아보는 것이다.

"저 사실 정환씨가 처음 만나는 타입이라 믿어도 될지……."

중략.

별의별 이야기를 늘여 놓는다. 처음 만났을 때, 이후 합방을 했을 때, 하다못해 시시콜콜한 가정사까지.

'가끔 있지.'

자신도 모르게 말이 술술 나온다. 필요 없는 이야기까지 과하게 내뱉는다. 설명을 하지 않으면 신뢰를 받지 못할 것 같아 불안할 때 생기는 증상이다.

"제가 리아씨의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건 조금 많이 이른 것 같고요."

"아, 아뇨 그게 그런 의도로 말한 게 아니라……."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요."

리아씨의 이야기를 내가 재단할 필요는 없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이미 다 정리가 되었을 것이다.

쓰잘데기 없을 만큼 긴 이야기를 천천히 들어준 연유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알아야 하기도 하고.'

여캠은 사정이 복잡한 경우가 많다. 스스로를 비운의 여주인공이라고 생각하는 애들이 많은 이유이기도 하다.

"비밀로 해줄 거죠……?"

"이제 와서 뭘요."

"저 빚이 좀 있었어요."

대부분의 사정은 빚이다.

요즘 사회가 어떤 사회인데 어떤 염전이나 섬 지방도 아니고 사람을 납치해서 방송시킬 수는 없잖아?

빚 탕감을 미끼로 많이 꼬신다. 액수가 심각한 경우는 그 이상에도 발을 디딘다. 세상은 넓고, 골빈 년은 너무나도 많다.

"저 한심하죠?"

"아뇨."

"정환씨도 솔직하게 말해도 돼요."

"집에 손 벌리거나 나쁜 쪽에 발 디디는 것보다는 훨씬 나아요."

진심으로 하는 소리다. 사람은 실수를 할 수 있다.

나의 인생 가치관 중 하나다.

'타인을 비웃지 말지어다.'

그 실수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만 아니면 괜찮다. 그리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것.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휴학까지 하고 고민 많았는데 정환 씨 덕분에 다음 학기 전에 해결될 것 같아요."

돌이킬 수 없을 경우 손님도 받는다.

별풍선 만 개 단위로 펑펑 쏘는 호구들?

뒤에서 성접대 받고 그 계산을 하는 케이스가 대부분이다.

그런 시스템이 짜여있다. 업체들과 큰손들의 커넥션이 끈끈하다. 내가 여캠에 대한 선입견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본인은 모르는 것 같지만.'

물론 이는 일부 여캠에 한정된다. 별풍선이 엄청나게 터지는 이들 말이다.

아무리 별창별창 해도 정상적으로는 그렇게 안 터진다.

"그럼 이제 아무 문제 없네요."

"네."

"근데 왜 왔어요?"

"알면서 왜 그래요 진짜……."

딱히 탓을 하는 분위기가 아니다.

같은 질문, 같은 내용이지만 주고받는 표정이 전혀 다르다.

웃음을 되찾았다. 이 자리가 편하다는 방증이다.

평소라면 못할 이야기도 하게 된다.

"저 이성으로서 매력 없어요?"

"왜 그렇게 생각해요."

"이렇게 단둘이 있는데 미동도 없는 건 처음이라 조금 충격이에요."

해달라고 아주 안달을 한다.

아니.

돌려 말하는 게 귀찮아서 그렇다.

'나도 많이 썩긴 했구나.'

고인물이다.

사람을 케이스별로 구분하는 게 안 좋은 편견이긴 하지만, 이쪽 업계에서 오래 발을 담그다 보니 그런 경향이 생긴다.

자신을 이해해주는 사람. 모든 것을 다 주고 싶은 남자. 조금 잘해주면 그런 식으로 착각하는 애들이 좀 있다.

"그럼 제가 확 덮치기라도 하면 좋겠어요?"

"아뇨, 그런 게 아니라……."

"그런 게 아니면 뭔데요?"

뭐, 뻔한 레퍼토리를 읊고 있어.

어깨에 손을 대놓고 올려도 거부하는 기색이 없다.

그 얇은 피부 밑에 흐르는 뜨거운 피가 느껴질 정도로 꽉 움켜쥔다.

"심장 엄청 두근대네."

"조금 놀라서……."

"다른 남자도 이렇게 꼬셔요?"

"아, 아니에요!"

"그래요? 꽤 익숙한 것 같은데."

차려진 밥상이다.

먹지 않는다면 그건 그거대로 어색하다.

가볍게 입술을 두어번 빠니 흥분해서 몸을 밀착해온다.

맛은 제법 있다. 입술도 도톰하니 탱탱하고, 살도 제법 지방이 있어 부드럽게 맞닿는다.

이런 행위 자체가 귀찮아서 문제지.

'하아.'

닳고 닳은 년들 달래주는 건 이골이 난다. 까놓고 말해서 줘도 별로 먹고 싶지 않다.

조금 차갑게 호응하자 지레 놀라서 변명을 속삭인다.

"저 그……, 처음이에요."

"아~ 그래요?"

"진짜에요! 천주교 신자라 마지막까지는 안 했어요."

마지막까지는.

많은 걸 의미하는 단어지만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겠다.

'그런 애들도 있지.'

종교적 신념.

혹은 보수적인 가정 사정 등으로 남자 관계가 깨끗한 여자들도 있다.

특히 예쁜 애들 중에 말이다.

저렇게 예쁜데?

주위 남자 다 병신이야?

너무 예쁘면 오히려 건들지 못하기도 한다.

리아씨의 경우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말이 그렇다는 거고. 대부분 어떻게든 홈런이 터지게 돼있는데.

"전 남친들이 성욕이 뭐 고자였나 봐요."

"딱 2명인데……."

"인데?"

"가끔 손으로만 조금."

오른손을 가슴 높이까지 들어 쓱쓱 흔드는 모션을 취한다.

본인도 하면서 부끄러운지 빠르게 손을 내린다.

'아니, 다 알면서 왜 그래.'

그 나이 먹고 모르면 그게 더 이상하지. 심지어 다른 직업도 아니고 여캠을 하면서.

"저도 손으로 해주게요?"

"저 정환씨는 괜찮아요."

"그래요? 근데 저는 안 괜찮아요."

"……."

아니.

순간의 치기에 혹해서 뒤처리도 힘든 책임을 짊어지고 싶지 않다.

'꼴리냐, 꼴리지 않냐를 따지면 당연히 전자지만.'

여캠을 어디 한두 명 봐왔을까?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리아씨는 상당히 수준대가 있는 편이다. 아예 골이 빈 년도 아니고.

너무 발정 나면 도리어 식어버린다. 솔직히 말해서 간만에 살짝 진심이 됐다.

"정말 짓궂어요. 일부러 오해하게 말하는 거죠?"

"리아씨 반응이 귀엽잖아요."

"다행이다……. 절 싫어하는 게 아니면 됐어요."

능동적으로 입을 맞춰온다. 감추고 있던 손으로 바지를 쓰다듬는다.

'한두 번 해본 솜씨는 아니네.'

헛웃음이 나온다. 내 입장에서는 그게 더 낫다.

무슨 인형 놀이하는 것마냥 가만히 있으면 힘들지.

문제는 한다는 사실 자체다.

종교적 신념. 약간 애매하긴 해도 분명히 존재하는 순결.

"저도 이제 정환씨에 대해 조금은 알아요."

"뭘요?"

"귀찮게 안 할게요. 정환씨가 나중에 제가 좋아지면 오케이 하는 걸로 괜찮아요."

푹신하고 따듯한 가슴을 팔목에 비비며 자신의 망상을 속삭인다.

그것이 구현될지, 아닐지는 둘째 치고.

'그럼 괜찮지.'

나라고 사람을 한사코 싫어하는 게 아니다. 진짜 게이라서 남자랑 부둥켜안고 싶은 것도 아니고.

누군가에게 속박되어 행동이 제한되는 것이 불편하다. 그 점을 알고 있다면, 나를 실망시킨 적이 있다면, 이야기가 잘 통하니 환영하는 바다.

그리고 이는 계산적인 속셈도 포함돼있다.

"그거 알아요?"

"어떤 거요?"

"난 나한테 안긴 여자 반드시 내 것으로 만들어요."

언제까지 방송을 혼자 할 수는 없다.

크루를 형성해야 하고, 이는 도원결의 마냥 한 날 한 시에 맹세한다고 끝나는 시스템이 아니다.

믿을 수 있는 사람.

방송적 기대치가 넘치는 인재.

그 초석으로 충분히 어울리다는 판단이 섰다.

"정환씨는 제게 아닌데, 저만요?"

"불공평해요?"

"그런 점이 저를 너무 애타게 만들어요."

빨리 좀 해달라고 안달을 한다. 가만히 두면 내 바지 지퍼까지 내려버릴 기세다.

'전 남친들이 정말 개호구였던 모양이네.'

여자쪽에서 원하게 좀 만들지.

대놓고 하려고 하니까 이솝 우화의 북풍과 태양 나그네처럼 외투를 더 꽁꽁 여미는 거 아니야.

여자도 당연히 성욕이 있다. 그리고 관계는 상징성도 가진다. 그 사람과 깊게 이어졌다는 증거 말이다.

"저 안 지 얼마 안 됐잖아요. 버림당하면 어쩌려고."

"치, 정환 씨는 나쁜 사람이라 오해받는 게 취민가 봐요."

내가 그렇게 보수적인 사람은 아니지만, 너무 쉽게 결정할 일도 아니다.

민하 씨만 해도 상당히 공을 들였다.

그에 반하며 너무 빠른 것도 사실이다.

"저 더 후회하고 싶지 않아요."

"그랬어요?"

"정환씨한테라면 속아도 상관없어요."

하지만 본인이 원한다는데 뭐 어떡해.

이 정도면 설명도 많이 했고, 기회도 차고 넘치게 줬다고 본다.

'나도 가끔은 사욕을 채워야지.'

대놓고 유혹하는 걸 이만하면 잘 참았다.

자기 객관화를 해봐도 기특하기를 넘어 성인에 가까운 수준이다.

무엇보다 본인에게도 나쁜 일은 아니다. 인간 관계는 서툴러도, 일적인 부분은 칼 같다.

방송적으로 좋은 시너지가 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게다가……."

"응?"

"지금 그런 거 말하면 흥분하기만 하거든요."

"어떤 점이?"

"오빠한테 당하는 상상요 헤헤."

몸의 시너지부터 확인해봐야 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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