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J로 산다는 것-197화 (197/846)

197화

우리 봄이의 손이 닿지 않는 벽걸이 선반 위.

발렌타인 라인업이 연도순으로 정리되어있다.

'전시해두면 예쁘거든.'

실제 인테리어 목적으로도 활용된다.

다 마신 공병이 몇천 원에서 몇만 원의 가격에 거래될 정도다.

술집에서 산다는 이야기다.

집안에 굳이 공병을 둘 필요는 없다.

하지만 애주가 입장에서는 가치가 충분하다. 다 마신 병에도 향은 남는다.

맡아보면 아~ 이 술이 이런 맛이었지!

참고도 되고, 그냥 내가 좋아서 안 버리고 뒀다.

'…….'

회귀 전에 선물 받았던 술과 착각했던 모양이다.

선반 위에 있던 발렌타인들은 17년도, 21년도, 30년도 전부 다 마신 빈 병뿐이었다.

「30분 남은 거 알지?」

「빨리 와!」

그런데 바로 김군 집에 가야 한다.

다른 술이 있기는 하지만 막입에 주기에는 아깝고, 본인도 분명 발렌타인을 원하고 있을 것이다.

'이마트도 닫아있을 시간이고…….'

남던이나 와앤모는 꿈도 꿀 수 없다.

들릴 수 있는 건 기껏해야 편의점이다.

편의점에서 살 수 있는 저가, 저숙성의 위스키로 만족할 김군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시계는 째깍째깍 흘러간다.

없는 묘안이 짜낸다고 떠오를 리 없다.

없는 술을 만들어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니, 있지.'

혹시 몰라 뒤져본 부엌 한 구석.

마법의 하얀 가루, 미원이 보인다.

* * *

연예인이다.

아무리 안 나간다, 안 보인다, 방송에서 못 찾겠다 꾀꼬리 해도 일반인은 알 수 없는 세계를 공유한다.

"그런 거 있지 확실히! 내가 누구라고 딱 잘라 말할 수는 없는데……."

"말하면 안되죠. 보통 분들이 아니잖아요."

"그러킨 해애~!"

김군이 고급스러운 도자기병을 치켜 올리며 침이 튀기도록 떠벌린다.

자신의 연예인 지인이 좋아하는 술이라며 말이다.

―오 로얄 샬루트!

―우리 아빠 술장에 저거 있는데

―소주보다 맛있음?

―맛있으니까 먹겠지ㅋㅋㅋㅋㅋㅋ

김군과 오정환의 합방.

오정환이 김군의 집에 찾아오며 예정대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 내용은 별 거 아닌 술먹방이다.

한 가지가 독특할 뿐이다.

주당이라는 컨셉을 과시하는지 귀한 양주를 마신다.

개인 방송 갤러리에서도 화제가 된다.

─김군이 양주 마시니까 존나 있어 보이네

김정은이 마시는 것 같아서

└아 위대한 령도자는 ㅇㅈ이지

└그 관상ㅋㅋㅋㅋㅋㅋ

└설득력이…… 있어!!

└돼지 새끼 욕심 드럽게 많은 것까지 똑같네

자칫 잘난 척으로 보일 수 있음에도 반응이 괜찮다.

보통 양주라는 게 집에 몇 병씩 있기는 하지만, 마실 기회가 많지는 않기 때문이다.

먹방의 연장선.

연예인이라는 어그로.

상대적으로 연령대가 높은 김군의 시청자층엔 잘 먹혀들기도 한다.

─쿤☆돼지님, 별풍선 1000개 감사합니다!

로얄 샬루트 맛나지~ 김군이 술을 아네

"돼지 형님 1000개 감사합니다! 역시 클라스 있으신 형님들이 안목이 있어. 연예인들도 이거 엄청 좋아하거든~."

풍력이 달달하게 뒷받침된다.

아재들 치고 양주에 관심 없는 사람이 없다.

열혈들의 수금을 거둬들이며 방송의 시작을 연다.

"형님 시청자분들은 술을 잘 아시는 분들이 많네요."

"너는?"

"아 저는 단풍잎을 주로 하다 보니까."

―단풍잎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급식들 드글드글

―술맛을 모르제~

―둘이 친한데?

분위기가 안 좋을 수가 없다.

술자리의 분위기도 점점 무르익는다.

목적을 달성하는 것은 시간 문제에 불과하다.

"내가 정환이를 아낄 수밖에 없는 게 방송 성향이 비슷해."

"그렇죠.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나랑 사이 안 좋다는 새끼들 다 어디 갔어? 어? 어그로 새끼들……."

김군과 오정환의 불화설.

개인 방송 갤러리를 중심으로 나오던 이야기가 가볍게 불식된다.

잔을 주고 받으며, 방송도 막힘없이 이어진다.

둘의 사이가 나쁘다면 불가능한 광경이다.

방송을 보는 시청자들이 전부 증인이다.

"아 술냄새!"

"이제 왔냐? 왜 이렇게 늦게 와?"

"여기 처음 온단 말이에요. 오는데 어두워서 엄청 무서웠어."

"그래쪄?"

└몰래 온 손님!

└이거 리아네

└여캠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게스트 지리고 오지고 레릿고 스무스~

물론 남자 둘이 술만 마시면 심심하다.

김군이 자랑으로 내세우는 방송 포맷이 따로 있기도 하다.

시청자들의 기대를 충족시키고도 남을 인선이다.

최근 가장 잘 나가는 여캠이다.

묵은 오해가 해소될 때쯤, 리아가 초인종을 누르며 나타난다.

시청자들로서는 환영해 마지 않는 상황이지만.

"이거 21년 말고 한 단계 위는 없어요?"

"어? 갑자기 왜?"

"급이……, 떨어질까 봐."

―지도 웃음 못 참눜ㅋㅋㅋㅋㅋㅋㅋ

―아 이건 ㅇㅈ이지

―자학 개그로 간다고?

―쫄려서 먼저 터트렸네

참석자 한 명이 제 발을 저린다.

그렇기에 기대를 충족시키고도 남는다.

이 셋의 스토리를 시청자들은 전부 알고 있다.

김군과 오정환, 그리고 리아.

각자가 이미 대기업급이기도 하다.

스토리텔링도 탄탄하다 보니 방송 시청자가 안 몰릴 수가 없다.

─김군 방송 왜 보는지 알겠네

로얄 샬루트에 여캠

이건 틀딱도 벌떡 스지ㅋ

└ㄹㅇㅋㅋ

└리아도 아이돌급이니 사실상 연예인 끼고 마시는 거 └김군 여론 좋누└빌드업 존나 잘 짰음!

커뮤니티의 반응은 더욱 더 올라간다.

어차피 어그로는 한 때고, 계속 보려면 눈길이 가는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조금 과하게 달려있다.

─젖군을조심해님, 별풍선 10개 감사합니다!

젖군님 각 좀 그만 보세요

"아니, 내가 뭐 각을 봐! 누가 들으면 오해할 소리하네."

"?"

―응 다 티나~

―리아 모르나 본데?

―'젖'군

―하꼬였으면 절대 가만히 안 뒀지ㅋ

빼어난 외모와 빼어난 몸매.

특히 흔하게 볼 수 없는 수준의 바스트는 시청자들의 이목을 자연스럽게 사로잡는다.

'아니 얘는 진짜 갈수록 더 이뻐지네. 하아~ 어떻게 안되나?'

방송을 진행하는 입장에서는 더욱 와닿는다.

실물이 엄청나다.

일전에 솔로몬이 되어 판결을 한 적이 있지만, 그때보다도 훨씬 미모가 물이 올랐다.

안 그래도 연예인급.

이제는 아이돌 중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수준이다.

연예인인 김군은 그 점을 더욱 확실하게 알고 있다.

─김군 시선 관리 안되네

─리아 의상 ㅗㅜㅑ. jpg [1] +7

─대놓고 사심충이라 좋닼ㅋㅋㅋㅋㅋ +2

─아니, 방송 빌드업 레전드임 [3]

.

.

.

그리고 이는 티가 난다.

무슨 007 제임스 본드나, 프로 도박사도 아니고 일반인이 표정을 감추려고 해봤자 진심 앞에서는 한계가 있다.

─쥬지가아파요님, 별풍선 100개 감사합니다!

정환이 아다 뗀 거 맞니?

"아 아다 아니라구요."

"왜 화를 내냐? 버럭하니까 의심 받는 거야!"

"형까지 왜 그래요 진짜!"

―ㅋㅋㅋㅋㅋㅋㅋㅋ

―들켜버렸쥬?

―김군 좋아하는 거 아니냐

―김군아 정환이 조심해야겠다……

그와 상반된다.

물과 기름 같은 특성이 방송의 재미를 더해간다.

'남친도 없는 것 같던데 나랑 잘되면 방송도 대놓고 밀어줄 수 있고 얼마나 좋아. 저 큼지막한 게 진짜 자연산이라니 쓰읍…….'

김군의 생각도 말이다.

본래부터 탐을 냈지만, 합방 제의를 할 때마다 번번이 거절의 의사를 표명해왔다.

그러다 마침 오늘 시간이 났다.

이 황금 같은 기회를 그냥 보내긴 아쉽다.

잔머리가 빠른 속도로 굴러간다.

* * *

해명 방송이라고는 하지만 별 건 없다.

친분을 증명하는 것이 목적이다.

자연스러우면 자연스러울수록 더 무난하게 시청자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다.

─클럽죽돌이님, 별풍선 100개 감사합니다!

와 저거 100만원 넘는 술인데ㄷㄷ

"100개 감사합니다. 룸에서 마시면 그쯤 든다고 하더라고요. 근데 면세점 같은 데서 사면 30이면 떡을 치니까."

"오빠 떡도 쳐요?"

"……."

―헐ㅋㅋ

―반격도 하네

―오정환 리아한테 먹혔눜ㅋㅋㅋㅋㅋㅋㅋㅋ

―눈나 나 쥬지가 이상해……

가지고 온 발렌타인 30년을 개봉한다.

살살 흔들어 얼음을 채운 위스키잔에 따른다.

김군이 기다렸다는 듯 가져가 향을 맡더니 단숨에 삼킨다.

"로얄 샬루트도 맛있지만 양주는 역시 발렌타인 30년산이지! 입에 착착 붙네."

"확실히 그런 감이 있네요."

"아니, 나는 진짜 이거 마신 후로는 20년산 이하는 마시지도 못하겠다니까? 이게 너무 맛있어서."

맛이 썩 좋은 모양이다.

장본인이 만족하고 있으니 애써서 가지고 온 보람이 생긴다.

참으로 다행이 아닐 수가 없다.

'여하튼.'

방송은 잘 진행되고 있다.

시청자들의 오해도 불식되는 분위기고, 김군도 흥분했는지 입을 닫을 줄을 모른다.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다.

추가적인 성과도 있는 편이 더 좋다.

리아도 슬슬 보라판에 적응할 때가 됐다.

"근데……, 너희는 아직도 사이 안 좋냐?"

"그냥 농담으로 하는 거죠."

"업보."

―업보 ㅇㅈ

―마음에 담아뒀네

―진짜 그 발언은 정말……

―그 발언이 뭥미?

방송을 시작한지 거진 1년은 흘렀다.

합방도 많이 해봤고, 일반 시청자들에게도 알려진 만큼 한 명의 BJ로서 자립이 필요하다.

"가끔 쉬는 날에 같이 놀기도 하고 그래요."

"오~ 둘이? 괜찮아?

"괜찮죠 뭐. 너무 안전한 오빠니까."

"……."

스스로 찾아갈 길이다.

이런 식으로 티키타카 하다 보면 싫어도 늘게 돼있다.

방송 경력이라는 게 생각보다 별 게 아니고, 짬이 쌓이다 보면 저절로 몸에 익는다.

'이런 식으로 하나 썰을 풀어두는 것도 그렇고.'

세상 일이라는 게 완벽할 수가 없다.

우리집에 리아가 놀러 왔는데 누군가가 봤다.

헐?

그대로 스캔들 비스무리한 게 터져도 이상하지 않다.

평소에 유비무환으로 준비해두면 여차할 때 변명할 것도 많아진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대비책이다 보니 그 실효성을 망라하고 있다.

─분홍상어님, 별풍선 100개 감사합니다!

정환아 답은 쥬아다ㅋㅋ

"아니, 자꾸 그런 쪽으로 몰아가는데. 저는 한 여자만 사랑하고 싶어요. 그래서 그런 거예요."

"리아야, 니가 보기엔 어때? 저런 새끼가 진짜 위험한 거 아니야?"

"웅~ 근데 정환 오빠는 좀 특이한 것 같긴 해요."

―특잌ㅋㅋㅋㅋㅋㅋㅋ

―삐슝빠슝! 쌀 수 없는 남자가 있다?

―리아도 만만하게 보네

―차라리 김군처럼 대놓고 밝히는 게 낫다 ㄹㅇ

잡담을 하면서도 술잔은 비어간다.

나도 그렇고, 김군도 주량이 상당히 되는 편이다.

700ml에 달하는 위스키 한 병을 결국 마지막까지 비운다.

"형 저 더 마시면 여기서 자고 가야 될 것 같은데요?"

"아 그래? 갈래? 근데 갈 수는 있어?"

"갈 정도의 정신은 남아있죠. 그리고 택시 부르면 되니까."

그렇다 해도 적은 양이 아니다.

빨간 뚜껑 기준으로 소주 4병 분량이다.

로얄 샬루트랑 맥주도 좀 마셨으니 취할 만하다.

「야야!」

「방송 알지?」

「형은 리아랑 방송 좀 더 진행할 테니까 먼저 퇴근해」

물론 진짜 이유는 그게 아니다.

화장실을 간 척하며 몰래 톡을 보내왔다. 아무래도 리아에게 진심으로 사심이 있는 모양이다.

'뭐, 그럴 수도 있지.'

BJ업계에서는 드문 일도 아니다.

BJ들끼리 사귀거나 하는 경우 말이다. 그 정도를 넘어 주지육림을 하는 크루도 심심찮다.

구멍 동서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많아지기도 한다. 정말 별의별 짓거리를 해대서 역으로 감탄이 나오는 연놈들도 있다.

─쿤☆군대님, 별풍선 2000개 감사합니다!

오늘 방송 수고하셨어요!

"우와~ 2천 개 감사합니다 군대님! 정환이랑 저랑 방송이 진짜 잘 맞긴 해요. 다음에 또 한 번 해야겠네."

"저는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병은 지나가는 길에 버릴게요."

"그래, 그래 살펴가고!"

그런 꿈과 희망에 부푼 모양이다.

방송이 무난하게 끝이 난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