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2화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는 법이다.
"봄이에요."
"그래."
봄이가 비장한 각오로 현관문을 지나쳐 들어온다.
아장아장 걸어가는 모습이 귀엽기 짝이 없다.
'사실 기럭지가 길어서 비율은 정말 좋은데.'
몸이 가볍고 뼈가 얇다.
섹시함과는 거리가 있다.
말하자면 아기 사슴 같은 느낌.
긴 다리를 쭉쭉 뻗으면서 걷는다.
그런데 보폭은 좁아서 걷는 모습만 봐도 그냥.
"꾸웨엑……."
"너무 귀여워."
깨물어주고 싶을 만큼 귀엽다.
세렝게티 초원의 사자가 어째서 가젤떼의 대이동을 기다리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머리가 정말 작고 탐스러워.'
등을 돌린 봄이의 대가리를 깨무는 걸 참을 수 없다.
평소였다면 예정된 인사였겠지만 오늘 하루는 봄이도 만만치 않았다.
"저 화가 단단히 났어요."
"그렇구나."
"오빠는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는 거예요?"
분노한 봄이의 볼따구가 부풀어 오른다.
그 찹쌀떡을 쭉― 늘어뜨리며 놀기에는 본인이 워낙 완강하다.
─하와와와와플님, 별풍선 10개 감사합니다!
봄이 화가 잔뜩 났네?
"후~ 그런 거예요."
―딱 봐도 화나 보임ㅋㅋㅋ
―귀엽다
―입 댓 발 나왔네
―근데 왠지 별거 아닌 거 같음
오늘 방송의 주제이기도 하다.
예정된 합방.
한창 봄이 어그로가 잘 끌리고 있었기에 방송 흥행에는 문제가 없다.
'봄이가 한창 철이기도 하고.'
방학.
급식충들이 미쳐 날뛰는 시기다.
매번 신바람이 나서 먹방 겸 포식을 하는 봄이가 복귀를 하지 않으니 애가 탈 만도 하다.
"오빠는 제가 무슨 비상식량인 줄 아나 봐요."
"그래."
"볼 때마다 물어뜯어요. 제 머리를 복숭아처럼 와구와구!"
"그렇구나."
얼핏 내가 물어뜯어서.
두피 마사지의 정도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렇게 보일 수 있지만 이 대화의 논점은 다른 데 있다.
"오빠가 우리집에 놀러 왔어요."
"그래."
"복숭아를 세 개나 먹고 갔어요. 그리고 어젯밤에 아빠가 두 개 먹었어요. 저, 저 하루에 한 개씩 아껴 먹고 있었는데 순식간에 사라졌어요."
"그렇구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봄이야
―복숭아 집착하는 거봐
―진짜 그것 때문에 화난 거임?
복숭아.
우리 봄이의 볼따구처럼 탐스럽게 생긴 복숭아를 봄이네 집에서 잔뜩 먹고 왔다.
'너 봄 복숭아가 맛있단다.'
예쁜 어머님과 함께 먹으니 술술 들어간다.
그 광경을 봄이가 두 눈이 땡그래져서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저 완전 삐졌어요."
"미안해."
"엄마랑 수다 떨면서 복숭아를 다 먹어버렸어요."
"근데 그 복숭아 오빠가 선물 드렸던 거야."
"헉!"
식탐 많은 봄이가 그 특별함을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다. 백화점 가면 그림의 떡처럼 걸려있는 고급 복숭아 선물 세트다.
'하나가 우리 봄이 대가리만 해.'
침이 질질 흐를 만도 하다.
한입 베어 물면 우리 봄이 대가리처럼 과즙이 입안에 넘쳐 흐른다.
그렇게 맛있는 걸 3개씩이나 먹다니!
─오정환환환님, 별풍선 100개 감사합니다!
화낸 이유 너무 귀엽다ㅋㅋㅋㅋㅋ
"죄송해요. 몰랐어요. 정말 몰랐어요……."
"우리 봄이가 한창 먹을 때라 그래."
―복숭아가 대체 얼마나 맜있길래?
―아ㅋㅋ 어디 복숭아냐고
―그녀의 식탐은 진짜야……
―진짜 한 박스 선물해주고 싶다ㅋㅋ
물론 복숭아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대한민국 고등학생들이 으레 그렇듯 학업에 찌들어 산다.
'삶의 낙과도 같았겠지.'
우리 봄이의 표현을 빌리자면 말이다.
일련의 결말을 예상하고 사둔 복숭아로 봄이를 달래준다.
"복숭아 엄청 부들부들해서 맛있어요."
"그래."
"저도 지금 부들부들해요. 창피해요."
"그렇구나."
당연히 설계였다.
거하게 낚인 봄이가 화를 자체 전소한다.
'우리 봄이의 식탐을 아니까 일부러 보란 듯이 먹었지.'
요즘 사춘기다.
생각이 쓸데없이 많아지고 있다.
평소에 관리를 잘 해둬야 엇나가지 않는다.
"이런 맛있는 과일이 있으면 군것질 안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그냥 군것질해. 그게 가성비가 좋으니까."
"힝……."
―ㅋㅋㅋㅋㅋㅋㅋㅋ
―봄이 시무룩해
―아니 너무 하잖아ㅋㅋㅋㅋㅋ
―진짜 당도 높게 생겼다
굉장히 비싸다.
돈이 있어도 굳이 사먹을 생각이 나지 않는 고급 과일.
그냥 맛있는 게 아니라 졸라 맛있다.
기품스런 단맛이라는 게 뭔지 한입에 깨닫는다.
'겨우 골려 먹기 위해 선물하기에는 부담스럽지.'
아무래도 필요하다. 허례허식이라는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봄이의 부모님께 정식으로 부탁드리기 위함이었다.
"우리 봄이가 정식으로 저랑 동거를 시작합니다."
"그런 거예요?"
―?
―갑자기?
―왜 본인은 모르는데
―이 새끼 또 뭔 짓을 저질렀누ㅋㅋㅋㅋㅋ
지난 2년간 많은 것이 변했다.
'개인 방송'도 일반인들이 알 만한 인지도를 가지게 되었다.
'특히 봄이의 경우 그 사건이 있었으니까.'
그 사건 말이다.
우리 봄이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든 여파는 많은 부분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부모님도 알고 계시다.
더 이상 평범한 인생을 살아가기 힘들다.
BJ 전업을 진지하게 고려해봄 직하다.
─봄이의삼촌팬님, 별풍선 100개 감사합니다!
봄이 다시 방송하나요!
"그렇습니다. 제가 봄이네 부모님과 담판을 짓고 왔습니다."
하지만 불안하다.
부모님 입장에서는 게임하고 노는 것과 진배없다.
진짜 BJ인 나와 살며 배우기로 했다.
'실상은 그냥 봄이랑 놀고 싶어서 그런 거긴 한데.'
봄이에게도 유익할 것이다.
막말로 살판이 났다.
부모님의 감시에서 벗어난 급식충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매한가지다.
인강 등으로 학업을 지속해나가야 한다는 전제가 붙긴 하지만, 그마저도 콘텐츠로 살릴 수 있는 게 BJ라는 직업이다.
실제로 드물지도 않다.
노잼봇 등 공부 방송을 하는 스트리머.
굳이 먹방과 게임에 한정하지 않아도 우리 봄이는 무럭무럭 성장할 수 있는 아이다.
"오빠, 오빠!"
"그래."
"저 롤 시작했어요. 친구들이랑 재밌게 하고 있어요~."
"손절해."
"?"
그거 말고.
메이플스토리나 하면서 침 질질 흘리면 됐지 엄한 짓을 하고 있다.
'사춘기라니까.'
내 눈에 흙이 들어와도 허락할 수 없는 짓이다.
세상에는 열어서는 안 될 판도라의 상자도 존재한다.
"하지 마. 하지 말라면 하지 마."
"할 거예요!"
"너 어차피 서포터로 버스 탈 거 아니야?"
"아닌데요오~ 저 미드 하고 있는데요오~."
"아리 할 거지?"
"헉!"
―바로 들켰누ㅋㅋㅋㅋ
―아링 아니면 럭키
―롤은 안돼 롤은……
―정환이 말 듣자 ㅎㅎ
동거를 하다 보면 별의별 일이 다 생길 수 잇다.
그 전초전에 지나지 않은 사소한 해프닝.
'좋잖아.'
이번 겨울은 정말 따듯하고 행복하게 보낼 수 있을 것만 같다.
집안에 봄이 한 마리 들여놓은 보람을 느낀다.
─펑이조님, 별풍선 10개 감사합니다!
롤 배우고 싶은데 지금 님 집에 가도 될까요?
"갑자기?"
―찐임?
―뜬금없네
―진짜 펑이조야?
―Wls은 맞는 거 같은데……
조금 쓰잘데기없는 것이 들이닥친다.
* * *
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가장 답답한 것은 그 자체를 모른다는 사실이다.
부우웅─
빠르게 넘어가는 창문 밖 풍경.
펑이조는 택시 안에서도 생각을 멈추지 않고 있다.
'내가 뭐가 부족해서?'
살면서 수많은 게임을 해왔다.
일반적인 게임은 물론 불법 도박까지.
항아리 도박으로 큰돈을 벌 수 있었던 건 자신의 수완이다.
메이플 뿐만 아니라 다른 게임에서도 이름을 날렸다.
하다못해 학창 시절 학종이 따먹기도 에어본 한 방에 100장씩 넘겼다.
끼익─
그런데 LOL은 브딱이.
오히려 게임을 돌릴수록 내려가기까지 한다.
아니, 어떻게 보면 그럴 수 있다.
게임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으니까.
만약 다른 비교 대상이 없었다면 될 때까지 한사코 부딪혔을 것이다.
'뭔가 있어. 뭔가 있어.'
오정환은 됐다.
자신보다 더한 0승 10패의 브론즈 나락에 떨어졌음에도 기적적으로 반등에 성공했다.
그 비결.
실력만으로 가능했을 리 없다.
무언가 편법을 썼을 것이 분명하다.
딩동―♪
막무가내로 오정환의 집에 쳐들어온 연유다.
갑자기 들이닥치면 숨길 수 없을 것이다.
"안녕하세요. 어쩐 일로……."
"오정환 님 롤을 그렇게 잘하신다길래 배우려고 왔습니다."
오정환의 새집.
집들이 파티 때 들린 적이 있다.
혹시 몰라 주소를 기억해두길 잘했다.
'방송 중이고.'
오는 길에 모바일로 확인했지만 대비를 하는 움직임은 없었다. 그렇다면 녀석의 집에 찾아온 자신의 판단은 반드시 옳다.
─환빡이님, 별풍선 10개 감사합니다!
뭐임? 뜬금없네
"티어를 올리고 싶은 마음이 굉장히 절실하신가 봐요."
"……."
―뭐지
―??
―둘이 저렇게 친했나
―펑이조 어제 연패 꼬라박고 강등됨ㅋㅋㅋㅋㅋㅋ
약간의 수모를 감수해도 말이다.
시청자들의 반응이 달갑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은 상정했다.
'실례고 나발이고.'
녀석의 부정.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낼 수만 있다면 상관없다.
자신의 생각대로라면 무언가, 무언가 분명 있을 것이다.
갑자기 롤을 잘해진 비결이.
전문 강사를 뒀다거나, 대신해 주는 사람이 있다거나, 극단적의 경우 프로그램의 악용 등.
실제 다른 게임에서는 드물지도 않다.
자신만 해도 항아리 도박 방송을 할 때 지인의 도움을 받아 수익을 극대화시켰다.
"근데 오늘은 저도 손님이 있어가지고."
"봄이에요……."
"다음에 날 잡고 하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봄이둥절
―봄이는 복숭아가 먹고 싶어
―아무 생각이 없어
―여긴 어디고 나는 누구인가ㅋㅋ
방송 비결이 탄로 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이렇듯 빌미를 만들어 거절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어딜 도망가려고 이 새끼가.'
이미 눈이 돌아가 있다.
자신의 생각이 맞다고 확신에 차버린 상황에서 다른 선택지가 보일 리가 없다.
"반드시 오늘 배우고 싶습니다."
"아……, 오늘 꼭요?"
곤란해하는 오정환의 표정.
맹점을 찔렀다는 확신이 더해진다.
다른 생각 자체가 들 수가 없는 상황이다.
'나보다 자쿰도 느리게 잡는 새끼가.'
메이플에서도, 롤에서도 자신의 위에 서있다.
자신이 못 하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해낸다.
분명히 무언가 있다.
그게 아니라면 말이 안 된다.
펑이조는 비결을 알아내기 위해 눈을 부릅뜬다.
* * *
삶은 당황스러움의 연속이다.
'생방송의 특성상 특히 그런 감이 있지.'
오랜 BJ 경력은 폼이 아니다.
별별 일을 다 겪어봤다.
그렇다 보니 어지간한 일이 생겨도 무덤덤하다.
"롤을 배우고 싶다고 하셨는데 지금 티어가 어떻게 되세요?"
"브론즈2입니다. 배치 3승 7패하고 브론즈1이었는데 팀운 때문에 몇 번 져가지고~"
―브론즠ㅋㅋㅋㅋㅋ
―펑브딱 펑브딱 신나는 노래~♪
―오정환도 브론즈긴 했지ㅋ
―0승 10패보단 낫네!
객관적인 관점에서 상황을 어찌 이용할지만 떠오른다.
어처구니없는 상황이지만 그렇기에 할 수 있는 것도 있다.
'개똥도 약에 쓸 수 있다는 말처럼.'
마침 곤란했다.
우리 봄이가 탈선을 하려고 한다.
LOL이라는 못된 게임을 배우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이다.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선택인지.
사춘기인 봄이에게 설득하는 일이 쉽지 않다.
그런 상황에서 적절한 실험체가 도착한 것이다.
"본인 실력은 그 이상이라고 생각하시고?"
"당연하지! 메이플에서 내가 얼마나 잘 나갔는지 알잖아요?"
"아~ 그런 관점도 있겠죠."
그렇게 생각을 한다면 오히려 환영할 만하다.
내가 어떻게 다뤄도 뒤탈은 없을 테니 말이다.
'타격감도 있고.'
반면교사의 역할로 이보다 더 제격인 인재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