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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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빛 액체가 유리잔 안에 채워진다.
달그락대는 얼음 소리가 고막을 살살 긁는다.
"한 잔 받아야지."
"예."
"아니, 이런 건 사실 요즘 잘 나가는 정환이가 쏴야 하는데."
"그러게나 말이에요~"
""하하하!""
내 심기도 말이다.
예정에 없던 회식을 하게 되었다.
일부 BJ들, 그리고 운영자들과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
'가끔씩 있지.'
기회의 땅 파프리카TV.
기존의 보수적인 방송 업계와 달리, 누구나 끼와 재능만 있다면 성공할 수 있다.
얼핏 그렇게도 보인다.
당연하게도 현실은 그렇지 않다.
기업들이 괜히 정치인들과 친하게 지내는 게 아니다.
"홍이사님."
"반가워요~"
"염부장님."
"이야기는 많이 들었네."
마찬가지의 현상이 파프리카TV 내부에도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폭넓은 인맥을 자랑하는 게.
'김군의 이점이지.'
개그맨 출신.
과거 파프리카TV에서는 드물게도 인정받을 만한 방송 경력이 있었다.
차후에는 흔해 빠졌다.
인기 연예인 출신 BJ도 생길 정도다.
그럼에도 그는 탄탄한 입지를 구가한다.
파프리카TV의 행사를 주관하며, 방송적으로도 엄청나게 밀어준다.
일반 시청자들 입장에서는 정말 듣도 보도 못한 놈이 말이다.
"운영자님들과 직접 만난 적은 처음이네요."
"허허허."
"죄송합니다. 이 녀석이 아직 사회생활을 잘 몰라 가지고."
"그만큼 방송에 몰두하고 있다는 거겠죠."
그 비결이다.
김군이 운영자들의 비위를 맞춰준다.
그렇게 탄탄하게 쌓은 밀월 관계가 밑바탕된 것이다.
파프리카TV에서 손가락에 들 만한 입지를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지만.
'기업들만 해도 사업할 때 규제 한두 개 차이로 수익성이 결정되거든.'
롤로 따지면 정글러가 시팅을 해주냐 안 해주냐의 차이.
메이플로 따지면 거대 길드에 가입했냐 안 했냐의 차이.
엄청나게 크다는 사실은 말해서야 입만 아프다.
그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굉장히 든든하다.
방송을 할 때 눈치 볼 게 전혀 없다.
사소한 사고로도 나락 가는 BJ들이 많은데, 정작 이상한 BJ들이 롱런 하는 이유다.
"운영자가 아니야~ 파프리카TV의 이사님, 부장님."
"예, 예? 잘 못 들었습니다."
"감을 못 잡네, 감을! 파프리카TV가 시총만 수천억 원인 기업인데."
"자자."
"죄송합니다, 염부장님. 제가 하~도 답답한 나머지."
윗사람들이 어지간한 사고는 무마해준다.
어차피 운영자라는 존재도, 회사 입장에서 보면 일개 사원에 지나지 않다.
'염 부장이라.'
회사에서 힘이 있는 이들이 BJ들과 결탁하고 있다.
사실 그들 입장에서 보면 부러울 수밖에 없다.
BJ 새끼들 돈 겁나 버는데!
아무리 직급이 높아도 월급쟁이는 월급쟁이다.
지갑 씀씀이가 헤프기가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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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쉬운 마음을 채워준다.
유리잔에 위스키가 담긴다.
발렌타인 30년이다.
"나도 선물 받은 건 참 많거든."
"염 부장님 정도면 정말 많이 받으셨겠죠~ 저도 한 병 드렸어야 했는데!"
"이렇게 먹고 있으니 괜찮아."
"잔 채워드리겠습니다!"
훌륭한 위스키다.
굉장히 부드럽고, 나무 맛도 명확하게 느껴지고, 무엇보다 피니시가 강렬하면서도 따듯하다.
'위스키에 대한 환상을 그려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지.'
좋은 걸 마셨다는 느낌이 든다.
위스키를 처음 마셔본 사람도 말이다.
선물이나 대접용으로 더할 나위 없는 이유다.
이렇게 쌰바쌰바를 하며 밀접한 관계를 이룬다.
운영자는 일탈이라는 사치를 누리고, BJ는 방송적 이득을 가져오는 것이다.
"오늘 정환이 너를 부른 건 다름이 아니라."
"예, 근데 잠깐."
"응?"
"사실 가벼운 술자리인 줄 알고 온 거라 형이랑 마시려고 술을 한 병 들고 왔거든요."
"이 새끼 또, 또! 좋은 건 같이 마셔 이 새끼야!"
익히 알고 있다.
눈앞의 염 부장과 홍 이사라는 놈에 대해서도 하루 이틀 알고 지낸 사이는 아니다.
달칵!
과거에 그랬다는 이야기다.
그들의 기호와 취향, 개인적인 사정까지 전부 꿰고 있다.
"24년?"
"예,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증류소라서."
"설명을 해야지 설명을! 홍 이사님, 염 부장님 이게……, 물론 아시겠지만 싱글 몰트라서요."
블렌디드의 30년보다 가치가 높다.
나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딱히 비위를 맞추려고 가지고 온 술은 아니다.
'술이라는 게 알면 알수록 순수한 마실거리로만은 안 보여.'
투자 대상으로 보이지.
돈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귀가 솔깃할 수밖에 없는 속사정이 꽤 복잡하게 얽혀있다.
"음? 으으음~!"
"어떻게 입맛에 좀……."
"이거 굉장히 특이하네. 맛있어. 아주 맛있어!"
"그렇죠? 그렇죠? 이 자식이 사회생활은 서툴러도 술은 거의 알중 수준이라."
"……."
그런 증류소 중 하나.
글렌드로낙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안다.
셰리 위스키, 그것도 올로로소 캐스크에서 숙성된 건 호불호가 갈린다.
"알겠어?"
"예."
"제대로 안 거 맞아?"
"그럼요."
"우리가 아무 걱정 없이 방송에 몰두할 수 있는 이유가 홍 이사님, 염 부장님 같은 분들께서 고생을 하시기 때문이라고~"
"고생은 무슨 허허."
"홍 이사님 흰머리 생기신 거 봐. 난 볼 때마다 가슴이 찢어져 가슴이! 한 잔 받으시죠."
"허허."
하지만 한번 마음에 든 사람은 빠져든다.
캐스크에 은은하게 배어든 와인이 수십 년에 걸쳐 숙성되면서 만들어낸 고급스러운 단맛이 있다.
'그게 엄청난 여운을 주거든.'
설탕물을 삼키고 나면 단맛이 훅 꺼진다.
꿀물은 같은 단맛이어도 여운이 길게 남는다.
당도가 높은 만큼 산미도 있기 때문이다.
산미가 높은 와인이 숙성까지 되었으니 향이 엄청나다.
그러면서도 달지 않다.
어디까지나 배어들었기 때문에 맛은 드라이하고, 삼키고 난 후의 여운에 영향을 미친다.
"음~"
"오……."
그것을 셰리? 붐이라고 부른다.
글자 그대로 입안에서 폭발한다.
정확히는 목구멍 안에서 향이 꿀렁꿀렁 넘어온다.
어느샌가 회식 자리가 조용해진다.
김군 혼자 열심히 떠들고, 나머지 술을 마시며 알딸딸해진 정신으로 듣고 있다.
'문제는 지금부터인데.'
이러한 자리를 마련한 이유.
보라판 콘텐츠에 협력시키기 위함이다.
한사코 거부할래야 거부할 수가 없다.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칼자루를 쥔 사람을 무시하는 것은 용기 있는 게 아니라, 멍청한 것이다.
* * *
BJ의 일상.
내 개인적으로는 그냥 지인들 만나면서 무료하게 지낸다.
'뭐, 별거 있겠냐고.'
하지만 대부분의 BJ는 그렇지 않다.
유흥 쪽으로 많이 쏘다니는 편이다.
강남 가면 클럽과 몇몇 룸에 고정된 장소가 있다.
사석에서 만났다고 떠드는 BJ들 대부분이 거기서 얽힌다고 봐도 무방하다.
BJ들이 돈을 아주 펑펑 뿌리고 다닌다.
자신을 대단한 사람 취급해주기 때문이다.
역사책을 보면 간신에게 휘둘리는 군주가 많은데, 그 심정을 백분지 1은 이해할 수 있다.
"죄송합니다. 바로 온다고 온 건데."
"괜찮아. 내가 미안하지. 쉬는 날에 괜히 불러 가지고."
"염 부장님 부탁이신데 바로 와야죠."
오늘은 내가 그 간신 짓을 하게 되었다.
얼마 전 김군의 소개로 만난 파프리카TV의 운영자.
내가 판교에 살고 있다고 하니 반색을 하며 약속을 잡아왔다.
파프리카TV 본사가 근처에 있으니 말이다.
'친하게 지내야 하는 사람이기도 하고.'
파프리카TV는 상당히 큰 기업이다.
직원 수만 해도 수백 명으로 얕볼 규모가 아니다.
그렇게 회사가 크면 파벌이 갈린다.
염 부장은 업체 쪽 파벌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다름이 아니라 저번에 그 마셨던 술 말이야."
"아, 글렌드로낙 24년 말씀이시죠?"
"그래, 그게 꽤 맛이 있더라고."
취향에 맞췄으니 맛이 있을 수밖에 없다.
자신의 입지를 활용해 자주 대접을 받은 그의 입맛은 고급지다.
'염탐꾼이라는 별명이 있지.'
그보다 직위가 높은 사람은 분명히 많다.
하지만 염 부장은 그들에게 가는 정보를 담당하고 있다.
현장을 맡고 있는 실세.
그의 환심을 살 수 있다면 간신 짓 한두 번은 해줄 만하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구입해보려고 했는데."
"물량이 별로 없죠?"
"음, 가격도 너무 비싸서 나 같은 월급쟁이에게 이런 건 사치겠어. 에혀~"
사치면 부르지를 말든가.
선물을 원한다고 에둘러 표현한다.
주는 것 자체는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한 번 주기 시작하면 밑도 끝도 없지.'
그런 뇌물을 주는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기도 하다.
출혈 경쟁을 하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다.
"사실 저도 같은 보틀은 더 없거든요?"
"그래? 에잉."
"근데 비슷한 보틀은 있습니다."
"오~"
"한번 맛보러 가시겠습니까? 바에."
"좋지!"
간신 짓이라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당연하게도 대부분의 군주는 멍청하지 않았다
누구보다 고급 교육을 받았고, 유능한 사람들이 주위에 널려있다.
'그래서 보통 취미에서부터 연을 만들지.'
공통의 취미.
대체 불가능한 사람.
김군의 설명처럼 알중은 아니지만 술에 대해서면 유익한 정보를 알려줄 수 있다.
달칵!
그리고 돈.
중년 이상의 부유한 남성 중에 이 두 가지 키워드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글렌드로낙 12년 주세요. 2잔."
"네, 잠시만요~"
몰트바에 왔다.
위스키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바로, 가격은 다소 비싸더라도 취급하는 술 종류가 많다.
"이거야?"
"예."
"하아~ 12년이면 저번에 마셨던 거랑 두 배 차이……."
"실망하긴 이릅니다."
같은 증류소 오피셜 라인의 12년 숙성 제품이다.
세간에는 그렇게 알려져 있다.
'이 증류소에는 비밀이 하나 있지.'
96년부터 2001년까지 문을 닫았다.
당시 위스키 시장의 침체로 이곳뿐만 아니라 여러 곳이 그러했다.
그렇기에 의문이 하나 생긴다.
2002년에 만든 술이 12년 숙성이 되려면 2014년이 돼야 하는데?
"그럼 이 술은 그전에 숙성시켜둔 술이라는 거네?"
"역시 염 부장님!"
"으음~! 95년도부터면 이게 17년? 18년?"
"18년입니다."
"오, 그러고 보니 향이 꽤 짙어!"
증류소가 속이는 게 아닌 이상 한 가지 결론이 도출된다.
지금 이 글렌드로낙 12년은 사실 18년 이상 된 술이다.
'이런 일이 가끔 있지.'
현재는 물론이고 차후에도 말이다.
2021년으로 따지면 21년 제품이 그러하다.
마찬가지의 이유 때문에 26년 이상 숙성된 원액이 들어간다.
3년만 차이 나도 가격이 1.5배 이상이라는 걸 생각하면 가히 파격적이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환영할 만한 병크가 찾아보면 은근히 있다.
"그럼 왜 18년이 아니라 12년으로 내놨을까?"
"오피셜 라인이라고 해서 매년 내보내야 하는 물량이 정해져 있거든요."
"오호……."
물론 증류소도 바보가 아니다.
나름대로 계산을 한 것이고, 한 번 닫았던 증류소를 되살리기 위해 선심 쓰는 측면도 있다.
나중에 이것이 알려지고 나서 품귀 현상이 일어난다.
같은 12년, 15년 제품이어도 몇 년도에 나왔냐에 따라 차이가 생긴다.
"그럼 이건 가격이 오르겠네?"
"역시 혜안이 있으십니다."
"오호라~ 덕분에 좋은 걸 알아가네. 좋은 걸."
술 이야기.
돈 이야기.
취향까지 맞다면 관심이 안 갈 수가 없는 정보다.
'남자들끼리 모이면 원래 술 얘기, 돈 얘기지.'
특히 위스키는 넓은 의미에서 투자의 개념에도 포함된다.
맛있는 술이 말이다.
"15년도 한 잔씩 주세요."
"15년은 상대적으로 별론가?"
"아, 근데 15년은 올로로소 캐스크만 쓴 거라 저번에 마신 것과 느낌이 비슷할 겁니다."
"그걸 사야겠네. 그걸!"
맛있는 걸 먹으면서 돈도 벌 수 있다.
효율성을 떠나서 그 자체만으로도 구미가 당길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런 걸 한번 알게 되면.
또 다른 것은 없나 기웃거리게 된다.
개인적으로 조사를 해볼 테고, 그럴수록 더욱 깊게 파고든다.
취미가 같다면 친해지기 못하기도 힘들다.
그것도 상대가 나에게 매달리는 일방적인 관계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