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1화
대학교 생활.
사실 별 의미를 두고 있지는 않다.
'한 학기 정도야 흥미 본위로 할 수 있는데.'
주구장창 다니기는 너무 빡세다.
널널한 학교면 모를까 우리 학교는 강도가 센 편이다.
"학교 생활 힘들지 않아?"
"에헹, 괜찮은데."
"강의 안 어려워?"
"다른 건 할 만한데 리만 가설이 뭔지 모르겠어요."
"그거 어렵긴 하더라."
솔직히 말해서 한시름 놓는다.
어려울 때는 내 일 아니라 생각하고 넋 놓고 있으면 된다.
'정말 내 일이 아니니까.'
졸업까지는 생각이 없다.
군대 두 번 만큼이나 토 나오는 게 대학교 두 번일 것이다.
"선배, 선배!"
"응?"
"스테이크 맛있지 않아요?"
"그래, 맛있네."
"입에서 살살 녹아요~"
"소영이도?"
"?"
그냥 한 명의 BJ로서, 크리에이터로서 자극을 받고 싶었다.
경험만큼 재산이 되는 것이 없으니 말이다.
'얼마나 풋풋해.'
이런 새싹들은 현지에 가지 않으면 만나볼 수 없다.
그것만으로도 대학을 가는 이유는 충분하다.
우물우물
내돈내산.
소영이 자신이 쏜 스테이크를 맛있게 먹는다.
아웃백의 스테이크 맛이 굉장히 감동적인 모양이다.
"선배, 선배!"
"응?"
"여기 와인도 팔아요."
"아, 글라스로 파네."
"우리 한 잔씩 마시는 거 어때요?"
"좋은 생각이야."
이제 막 스무 살.
머리에 피가 막 말랐으니 여러 가지 해보고 싶다.
특히 와인에 환상을 가지는 건 드문 반응이 아니다.
"어떤 와인이 맛있을까요?"
"스파클링이나 모스카토 붙은 게……."
"선배 저 그거 마시고 싶어요!"
"뭐?"
"붉은 거. 한번 마셔보고 싶었어요."
대개 실망하지만 말이다.
특히 레드 와인은 맛을 느끼려면 시간이 좀 필요하다.
졸졸졸
본인 돈으로 사는데 내가 왈가왈부할 건 없다.
직원이 와서 와인을 한 잔씩 따라준다.
"에헹."
예쁜 와인 잔에 검붉은 액체가 담긴다.
신이 난 소영이 와인 잔을 들고 감상한다.
"건배?"
"건배가 뭐예요. 이런 건 좀 더 우아하게."
재밌을 만하다.
이제 막 스무 살.
마신 술이라고 해봤자 편의점 맥주와 소주가 전부일 테니 말이다.
꿀꺽!
어디서 본 건 있는지 분위기를 잡고 마신다.
목을 45도나 꺾으며 중세시대 백작 부인이 빙의하신다.
그것도 잠시.
채 세 모금을 마시지 못하고 내려 놓는다.
상상했던 맛과 많이 다른 모양이다.
"입맛에 안 맞아?"
"네, 좀."
"그럴 수 있지."
"좀 더 비싼 걸 시켰으면 괜찮았을까요?"
그럴 수밖에 없다.
레드 와인 특유의 씁쓸한 탄닌감은 하루이틀로 적응되지 않는다.
가격이 문제가 아니다.
애초에 와인은 가격과 맛이 전혀 상관 관계가 없다.
'수십 년 경력의 와인 평론가들도 구별을 못 할 정도인데.'
고급 와인병에 담긴 가성비 와인과, 가성비 와인병에 담긴 고급 와인의 맛 차이를 구별하지 못한다.
와인계에서 쉬쉬하는 오점이다.
소믈리에들이 구분 가능한 건 지역에 따른 특색 정도다.
맛이 있고, 없고는 추상적인 개념이라 사람마다 너무 다르다.
"선배는 어때요?"
"먹을 만해."
"구체적으로."
"이베리아 반도에서 탱고를 추는 여인. 하지만 그 여인이 친숙하게 느껴지는 그런 느낌이랄까?"
"헤, 헤에……."
이상과 현실의 괴리.
비싼 레스토랑에서 큰 마음 먹고 시킨 음식이 실망으로 남는 건 너무 쓰라리다.
낯간지러운 듯 열심히 스테이크를 썰고 있다.
돈까스라도 먹는 것처럼 조각조각 썰어 놓았다.
'그만큼 쪽팔리시단 거겠지.'
무야호를 외친다고 해결되진 않는다.
레드 와인의 맛은 포도주스와 많이 다르다.
한 번쯤 저지를 수 있는 귀여운 실수를.
"줘봐."
"넹?"
"맛있게 마시게 해줄게."
"어떻게요?"
다른 기억으로 덮어 씌워준다.
소영의 와인 잔을 빼앗는다.
그리고 음료수를 하나 주문한다.
'술이 어른의 맛이라고 포장하기도 하지만, 나는 본인이 맛있는 게 정답이라고 생각해.'
남들 눈에 어떻게 보이든 말이다.
점원이 가지고 온 레몬 환타.
와인 잔에 콸콸콸 따른다.
샐러드에 딸려 나온 레몬도 하나 퐁당 빠뜨린다.
그 광경을 소영이 기겁하며 지켜본다.
"뭐, 뭐 하시는 거예요?!"
"칵테일."
"네?"
"틴토 데 베라노, 간단하게 만든 상그리아라고 보면 돼."
"아……. 상그리아는 알아요. 카페에서 팔던데."
비싼 와인에 싸구려 음료수를 섞다니?
편견보다는 맛으로 말한다.
미심쩍어하며 입에 댄 소영의 얼굴이 놀라움으로 물든다.
스페인 와인으로 만드는 스페인 칵테일이다.
마침 와인이 스페인산이다 보니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베리아 반도의 여인이 탱고를 추잖아.'
한국이 한반도에 있다면, 스페인은 이베리아 반도에 있다.
기본적인 와인 표현이라고 한다.
"먹을 만해?"
"맛있어요! 음료수 같은데 뭔가 깊은 맛이 있어서."
"한 잔 더 시킬까?"
"그럴까요?"
"콜라로도 칵테일 만들 수 있는데."
"콜라래 에헹."
술이 들어가며 들뜬다.
스테이크에 와인.
상상한 것과 조금 다르긴 해도 즐거운 마음만큼은 매한가지다.
꼴깍! 꼴깍! 꼴깍!
잘 마신다.
마음에 들은 모양이다.
와인과 콜라를 스깐 칼리모쵸도 꿀떡꿀떡 목으로 넘긴다.
"에헤헹."
"취한 거 아니야?"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래?"
"에헹."
히죽히죽 웃는다.
취한 사람의 특징, 취했다고 절대 안 말함이 나오고 있다.
'술버릇 귀엽네.'
기분이 들뜨는 타입인가 보다.
평소보다 톤이 올라가고, 말도 좀 많아진다.
"오빠는 평소에 뭐하고 지내용?"
"집에 있거나, 친구집에 놀러 가거나 하지."
"친구랑 뭐해용?"
"그냥 밥 먹고, 놀고, 잠 자고."
"에헹~ 별거 없구만!"
리아네 집에서 놀고, 수빈이네 집에서 놀고, 예빈네 집에서도 놀고 그 정도다.
그렇게 별다를 거 없는 평범한 일상이다.
'소영이네 집에도 가고 싶네.'
그 날이 머지않아 보인다.
얼굴이 점점 빨개지고 있다.
상기된 정도가 아니라 대놓고 색깔 변화가 느껴진다.
딱히 레이디킬러가 아니다.
와인 베이스 칵테일은 기껏해야 맥주와 비슷한 도수다.
당도가 있어서 많이 마시지도 못한다.
"에헹~ 에헤헹~!"
두 손으로 와인 잔을 들고 실실 쪼갠다.
고개가 위아래, 앞뒤로 까닥까닥 흔들린다.
뭔가 오뚝이 같아서 귀엽다.
저러다 잔 엎고 정신이 번쩍이 들면 큰일 나기 때문에 잡아서 떼낸다.
"소영아."
"에헹."
"잠 깨."
"에헤헹~"
"와!"
"꺄!"
귓가에 대고 소리친다.
화들짝 놀라며 좋은 반응을 보여준다.
'진짜 나쁜 오빠였으면 이대로 업어간다고.'
좋은 선배를 두는 일이 이래서 중요하다.
반쯤 혼이 나간 소영을 일으켜 세운다.
"소영아. 오빠가 계산할까?"
"아뇨. 제가."
"직원분께 카드 드려."
"넹."
아직도 휘청휘청한다.
어깨를 감싸고 있지 않으면 정말로 넘어졌어도 이상하지 않다.
'어우, 작은 거 봐.'
150대 중반.
힐도 신고 있지 않아 왜소하다.
소영을 데리고 나가 가게 밖의 벤치에 앉힌다.
잠이 깰 때까지 기다려준다.
찬 바람 좀 쐬고 있으면 금방 정신이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소영아."
"……"
"소영아?"
"네! 네, 네!"
"정신이 들어?"
"네……."
"일어나서 체조 좀 해. 몸 좀 움직여."
벌떡 일어나서 팔을 허우적댄다.
도수 체조를 하는 건지, 헤엄을 치는 건지 모르겠다.
이내 몸의 자유가 돌아왔는지 모양이 잡힌다.
차가운 밤공기는 취기에 특효약이다.
꿀꺽! 꿀꺽!
물도 먹인다.
점점 정신이 돌아온다.
슬슬 상황이 파악됐는지 쭈뼛대며 내 눈치를 본다.
"죄송해요……. 취해 가지고."
"괜찮아. 신입생 땐 다 실수하는 거야."
"너무 맛있어 가지고. 에헤헹……."
"더 큰 실수만 안 하면 돼."
"?"
귀여운 후배다.
신입생 때는 술자리에서 토 한 번 해도 봐주는 게 통과 의례다.
'특히 여자애들은 많이 봐주지.'
오히려 좋아하는 선배들도 있고.
나한테 술을 배우는 편이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나을 것이다.
"집에 가야지?"
"네."
"바래다 줄게. 어디야?"
"저 가까워요. 학교 가까운 데로 자취방 잡아서."
"그래?"
지방에서 올라온 모양이다.
부모님이 좋은 집을 잡아주셨다.
소영이 살고 있는 자취방으로 향한다.
딸랑♪
가는 길에 편의점을 들린다.
후배의 자취방에 가는데 빈손으로 들리는 것도 박한 일이다.
과자와 육포, 그리고 캔맥주.
아침으로 먹을 죽과 ldH.
그리고 슬쩍 콘돔도.
"이거 계산해 달라 그래."
"넹~ 계산 부탁드릴게용!"
소영이 나를 대신해 장을 본 물품을 계산한다.
그런 그녀의 어깨를 힘주어 안는다.
'우리 곧 할 예정입니다, 라고 과시하는 것 같잖아.'
딱히 쓰려는 목적은 아니지만 장난기가 치솟았다.
직원 눈에는 오붓한 연인으로 보일 것이다.
쓰레기로 보일 수도 있고.
요즘 세상이 참 팍팍해져서 사소한 장난을 치는 것도 눈치가 보인다.
"오빠가 들게."
"아니에요. 제가 들게용~"
"그래? 근데 뭐 산지 봤어?"
"뭐 샀더라……. 맥주? 과자?"
"그거면 됐어."
얘가 아직 술이 덜 깼다.
역시나 장난을 눈치채지 못했다.
소영의 안내를 받아 자취방에 도착한다.
낡았지만 깔끔한 외관을 유지하고 있는 빌라.
계단을 따라 3층까지 걸어 올라간다.
<문이 열렸습니다!>
소영의 작은 손이 63635를 눌러 현관문을 연다.
그냥 별거 없는 대학생의 자취방이다.
"아!"
"응?"
"청소 안 해놨는데……."
"괜찮아. 들어가자."
그런 게 대수일까.
별거 없는, 평범한 느낌이 좋은 것이다.
'뭐, 이 정도면 깔끔하지.'
여자들 태반이 쓰레기장을 해두고 산다.
훨씬 제대로 된 자취를 하고 있다.
"소영아."
"넹?"
"2차 할래? 캔맥주 하나씩."
"네, 할게요!"
"취했으면 콜라 마시고."
"저 맥주 마실 수 있어요~ 편의점 맥주 좋아해요!"
원형 탁자.
적당히 펴서 편의점에서 사온 것들을 풀어놓는다.
콘돔만 몰래 빼서 주머니에 넣는다.
"그래서 그때 어떻게 됐는지 아세용?"
"내가 어떻게 알아."
"에헹, 제가 안 돼! 시청자들 싸우지 말라구~"
재잘재잘 떠드는 이야기를 들어준다.
기분이 엄청 고양된 듯 평소의 5배는 수다스럽다.
'편안한 장소니까.'
자신의 방.
주위 신경 쓸 것도 없이 이야기에 몰두할 수 있다.
말이 적은 사람일수록 담아둔 이야기가 많은 법이다.
꿀꺽! 꿀꺽!
탁자 위의 안주가 반쯤 사라진다.
맥주도 한 캔씩 비우고 다음 캔을 땄다.
그러던 와중.
"히끅!"
소영이 고개를 푹 하고 떨군다.
탁자 위에 머리를 아파 보이게 찧는다.
일으켜 세우자 눈이 감겨있다.
완전히 정신을 놓은 듯 흔들어도 깨지 않는다.
'그렇겠지.'
아무리 체조를 하고, 물을 마시고, 산책을 해도 마셔 놓은 게 어디 가는 건 아니다.
이렇듯 한 번 더 마시면 정신이 확실하게 끊긴다.
소영을 들어 침대 위에 눕힌다.
너무 작고 아담해서 무슨 리얼돌 같다.
곤히 자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한숨이 나온다.
'어휴, 왜 이렇게 철이 없니.'
외간 남자를 집에 들여놓는 의미를 생각해봐야지.
OK 사인으로 봐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다.
소영의 볼을 쓰다듬는다.
젖살이 채 빠지지 않아 빵빵하다.
애석하게도 가슴 쪽은 그렇지 못한다.
'체형이 나쁜 건 아닌데.'
글자 그대로 아직 애.
채 여물지 못한 꽃봉오리 상태다.
하지만 방송 재능도 있고,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다.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문 천연기념물이다.
바보 같을 정도로 순진해서 여러 가지 가르쳐주고 싶다.
쓰읍?
소영의 배에 코를 댄다.
딱히 향수를 쓴 게 아님에도 달달한, 딱 이 나이대에서만 있을 냄새가 난다.
여름과 한 약속이 있으니 손을 대진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냥 가기는 섭한 노릇이다.
'손만 대지 않으면 되겠지.'
밤은 이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