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4화
<러시아 김태희>
러시아의 밤.
와아아아아아─!
굉장히 밝다.
백야 때문이다.
고위도 지방에서는 태양이 지평선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다.
한여름에만 일어나는 현상.
한밤중에도 워낙 밝기 때문에 밤놀이를 즐기기에 최적화돼있다.
"어때?"
"있는데. 너도 갈래?"
"흐음……."
러시아의 10·20대는 클럽이나 술집에서 하루 온종일을 보낸다.
아나스타샤와 그 친구들도 그러고 있지만.
"나는 별로."
"응? 왜? 다 사준다는데."
"눈깔 있으면 잘 좀 살펴."
""?""
세계 어느 나라든 클럽에서 여성은 우대받는다.
테이블은 보통 남자 쪽이 잡는다.
'내가 니들처럼 싸게 노는 줄 알아?'
그 대가.
인생이 쌈마이해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아나스타샤는 친구들이 말한 테이블을 가리킨다.
"싸구려 보드카. 안주. 걸친 것도 명품이라고는 없어. 얻어먹는 대가가 하룻밤 애인이야?"
"뭘 그렇게 심각하게 따져?"
"얼굴도 괜찮은데……."
3명의 일행.
얼굴도 제법 생겼고, 잘 꾸미기까지 했다.
하지만 실속이 없다는 사실이 자신의 눈에는 보인다.
'남자는 능력이지.'
저런 껄렁껄렁한 애들과 어울리면 어떻게 되는지.
주위에 예가 한두 명이 아니다.
친구들뿐만이 아니다.
자신의 부모, 이웃들.
전부 평범하게 살고 있다.
남편이 평범한 사람이니 평범한 인생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와아아아아─!
친구들과 헤어져 혼자 도도하게 있는다.
간간이 말을 걸어오는 남자들은 무시.
'돈 많은 외국인 남자가 필요해.'
러시아는 소련이 해체된 이후로 쇠퇴일로를 걸었다.
아니, 그전부터 내상이 만만찮게 쌓였다.
경제가 붕괴.
2000년대에 들어 조금씩 회복을 했지만 경쟁 상대였던 미국과 유럽에 비하면 여전히 처참하다.
그마저도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반토막이 났다.
국가적으로는 어쩌고저쩌고 의미가 있다는 걸 알고 있어도.
'알 바야.'
돈이 파쇄가 된다고!
가만히 있는데 루블화 가치가 땅에 떨어졌다.
해외와의 격차가 더욱 커진 것이다.
이 땅에서 늙어 죽을 노땅들은 참고 살을 것이다.
자신 같은 젊은 세대는 더 이상 구질구질하게 살기 싫다.
와아아아아─!
방법은 하나뿐.
러시아에서 탈출하는 것이다.
자신은 그럴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
'아시아 사람?'
얼굴과 몸매로 어디 가서 꿀린 적이 없다.
몸으로 빌어먹는 년들과 달리 대학교에 재학 중이다.
아나스타샤의 레이더에 한 테이블이 걸린다.
조금 널브러져 있긴 해도 깔려있는 술과 안주가 고급이다.
남자도 제법 부티 있게 생겼다.
심지어 아시아인.
슬쩍 훑어보니 빈 깡통은 아닌 것 같다.
아시아인들 중에는 돈 많은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국적을 따져야 한다는 걸 아나스타샤는 알고 있다.
'한국 사람 같은데?'
일본 사람은 샤이해서 클럽에 오지를 않고, 중국 사람은 매너가 드럽기로 소문이 자자하다.
무엇보다 여자를 막 대한다.
자신이 돈을 냈으니 함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식.
그런 남자와 어울리면 몸만 상하고 팁 몇 푼이 전부다.
"까레이! 까레이!"
"나도 한 잔 줘."
"이 오빠 완전 끝내줘. 다 시켜도 된대!"
슬쩍 눈길을 주자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자연스럽게 동석이 이루어진다.
이미 몇 명의 여자가 들러 붙어있다.
그를 가리키며 까레이(Korea)라고 소리친 것.
'한국인 좋지.'
한중일 세 나라 중에 가장 어울리기 편하다.
매너가 좋다 못해 거의 호구 수준.
아나스타샤는 아주 잘 알고 있다.
자신의 인생 계획으로 세워두었을 정도다.
"안녕."
"쁘리벳. 응?"
"한국말 알아."
한국어학과를 전공하고 있는 것도 그래서다.
한국어는 러시아에서 영어, 중국어 다음으로 인기가 많다.
한류 등의 이유도 있지만 가장 큰 건 정책적인 것이다.
서양과 벽을 쌓은 러시아는 친하게 지낼 나라가 없다시피 하다.
일본은 숙적이고, 중국은 중국이다.
남미와 동남아시아는 경제적으로 부족하다.
유일하게 한국만이 명분과 실리를 전부 챙긴다.
"정말?"
"지금 배운다. 조금 어색해."
"아니야! 잘하는데? 알아듣는 데 전혀 문제없어."
러시아 사람 입장에서도 취직할 만한 기업은 국영 기업 아니면 한국 기업이다.
나라의 특성상 웬만한 기업은 전부 국가 소유.
다른 나라의 기업은 러시아가 경제적 위기를 맞을 때마다 뒤통수를 친 이력이 있어 선호 받지 못한다.
안정적이지 않은 직장으로 인식된다.
"조금 딱딱하긴 한데 문법 같은 건 한국인이랑 거의 판박이야."
"칭찬 고마워."
"학교에서 잘 배웠나 보네~"
"우리 대학교 좋은 곳이다."
한국어를 배우면 취직에 매우 큰 도움이 된다.
눈앞의 남자에게는 그렇다고 이야기한다.
'병신 같은 년들. 니들 차례 없으니까 얼른 꺼져.'
라고 소개한 것은 싼티 나게 보이지 않기 위함이다.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저런 걸레년들과 다르다.
자신이 특별하다는 사실을 인식시킨다.
낯선 이국 땅에서 말이 통하는 여자는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야, 둘만 무슨 얘기하는 거야?"
"우리 말도 좀 전해줘!"
"내가 왜?"
"뭐?"
"하고 싶으면 니들이 하든지. 아니면 꺼지든지."
실제로 그렇게 취집을 한 여자들이 많다.
한국 남자들은 조금만 잘해줘도 넘어온다.
아나스타샤는 동석한 여자들을 내쫓는다.
한국인인 남성이 눈치를 못 채게 말이다.
"무슨 일이야?"
"그게……, 저만 이야기해서 화가 났나 봐요."
"그래?"
"늦게 합석한 주제에 눈치가 없었어요?"
"아니야. 내가 신경을 못 썼네."
차분한 어조로 말을 했다.
그에 반해 다른 년들.
말투만 봐도 화가 났다는 게 전해진다.
'어차피 못 알아듣는데.'
속이는 건 일도 아니다.
남자는 저 여자들이 자신한테 시비를 걸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 년이 그렇게 좋으면 둘이 놀든가!"
"꺼져 칭챙총!"
"널리고 널린 게 남자인데 참나."
여자들은 남자가 자신의 편을 들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여자의 세계에서는 그렇게 해석된다.
저주를 퍼부으며 떠난다.
"어떡하죠? 저 때문에 싸움 났어요."
"미안해?"
"미안해요."
"그럼 책임지고 같이 마셔줘."
"좋아요."
물론 그녀들의 말도 맞다.
널리고 널린 게 남자.
클럽에는 이 남자 말고도 다른 외국인들도 있다.
'다 같은 수준의 놈들이 아니지.'
외국인이라고 전부 부자가 아니다.
자신의 나라에서 간신히 살아가는 인간이 부지기수.
때문에 디테일하게 봐야 한다.
아나스타샤는 테이블 위의 보드카를 잡으며 재빠르게 살핀다.
「BELUGA Gold Line」
러시아에서 생산되는 최고급 보드카다.
웬만한 위스키나 브랜디의 뺨을 칠 정도로 비싸다.
그중에서도 등급이 있다.
노블이 가장 낮은 등급.
골드는 가장 높은 등급.
꼴꼴꼴
남자의 잔을 채워준다.
같이 마시자는 의미라는 걸 눈치채지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술 세?"
"러시아 사람이에요."
"난 한국 사람이고."
"자신 있어요?"
면세점에서 사도 수천 루블은 나간다.
클럽에서 깔려면 1만 루블은 넘게 지불해야 한다.
그만한 걸 벌써 몇 병이나 비웠다.
아까 그 년들이 물처럼 마셔댄 것이다.
'널리고 널린 남자는 아니야.'
한국인들은 이상할 정도로 앱솔루트를 좋아한다.
스웨덴산 보급형 보드카를 말이다.
그에 반해 눈앞의 남자.
프리미엄 보드카의 상위 라인을 주문한 건 우연은 아닐 것이다.
"혹시."
"네?"
"한국에서는 연장자를 오빠라고 부르는데 알아?"
"알죠."
"불러주면 안 돼?"
입고 있는 옷도 자세히 보면 명품이다.
엄청나게 값이 나가는 건 아니지만, 그렇기에 더 신뢰가 간다.
'얼굴도 아시아인치고는 호감이고.'
적어도 똥차는 아니라는 확신이 든다.
아나스타샤는 과감하게 남자의 옆에 붙어 앉는다.
"저는 나이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아요."
"그래?"
"절 이기면 불러주지 못할 것도 없지만."
오빠라고.
귓가에 속삭인다.
십중팔구도 아니고 100% 넘어올 것이다.
'남자 새끼인데 뻔하지.'
남자들은 자존심이 강하다.
그중에서도 술부심은 얼척이 없을 지경이다.
여자한테 도발을 당하고 넘어간 남자.
살면서 한 명도 본 적이 없다.
꿀꺽!
꿀꺽!
역시나 받아들인다.
더블샷잔에 가득 담긴 보드카를 한 입에 털어 넣는다.
자신도 어울린다.
차이가 있다면 가득이 아닌 2/3가 조금 안되게 채웠다.
'실제로는 절반 정도.'
아래가 좁고 위가 넓은 구조.
물론 그래도 많긴 하지만 이 정도는 충분히 마신다.
"좀 마시네?"
"당신도."
"당신이라고 하니까 설레는데."
"오빠라고 하면?"
"완전 설레지.
러시아 여자니까.
러시아 남자들과도 술 대결을 하는데 아시아 남자 정도는 별것도 아니다.
'흐응, 그래도 남자라 그거지?'
흥분했는지 손이 엄한 곳을 향한다.
골반을 더듬는 손길에 사심이 섞여있다.
꼴꼴꼴
여유롭게 받아주며 술을 따른다.
어차피 곧 꽐라가 돼서 테이블에 엎어질 것이다.
꿀꺽!
꿀꺽!
벌써 다섯 잔.
그것도 60ml 용량의 더블샷잔이다.
40도짜리 보드카를 반 병가량 마신 셈이다.
'아, 아직도?'
그럼에도 템포가 느려지지 않는다.
분명 취하지 않은 건 아닐 텐데 말이다.
손길이 점점 거칠어지고 있다.
자신의 배를 움켜쥐듯이 어루만진다.
"취했어?"
"별로!"
"한 잔 더?"
"한 잔 더!"
배를 만져대는 남자는 처음이다.
흥분도 창피도 아닌 묘한 기분으로 달아오른다.
꿀꺽!
정신이 오락가락한다.
기계적으로 술잔만 비우고 있다.
너 한 잔, 나 한 잔.
남자가 곯아떨어지면 호텔로 끌고 갈 생각이다.
그리고 소지품을 뒤져서 어떤 사람인지 확인한다.
정말 괜찮은 사람이면?
덮쳐서 기정 사실을 만든다.
신분과 연락처를 확보하면 가능하다.
"취한 거 아니야?"
"……."
"한 잔 더?"
"еще один напиток!"
굳이 그러지 않아도 순진한 한국 남자는 대개 책임을 진다고 한다.
자신 정도 되는 여자라면 확실히.
'내가. 응? 얼마나. 응? 응?'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되고, 무엇보다 말이 통한다.
호감을 가지고 접근한 척했으니 무조건 넘어올 것이다.
인생 역전의 찬스.
결혼을 하면 한국 국적이 생기게 되고, 설사 이혼을 해도 이는 유지된다.
똥차라면 버리고 벤츠라면 질릴 때까지 타면 된다.
아나스타샤의 망상은 어느새 뚝 끊긴다.
* * *
끼익―!
택시를 타고 도착한다.
갈 때는 혼자였지만 올 때는 동행이 생겼다.
철컥!
도심 외곽 지역.
으리으리한 저택이 세워져 있다.
미리 받아둔 열쇠로 대문을 연다.
'전세로 빌리는 별장 같은 거지.'
나름 합리적인 가격이기도 하거니와 여행까지 왔는데 놀지 못하면 섭할 노릇이다.
물론 혼자 놀 곳은 아니다.
"딸꾹! 딸꾹!"
클럽에서 만난 여자.
취했는지 정신이 완전히 OFF가 돼버린 상태다.
'아무거나 먹으면 체하긴 하는데.'
이래 봬도 미식가인지라 고르는 눈은 있다.
외모도 반반하고, 헛바람이 들어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
무엇보다 대학생.
심지어 한국어과가 있을 정도면 모스크바 주변 대학일 테니 신분은 확실하다.
"흐흐흐~♪"
주인과는 이미 이야기가 되어있다.
오늘 밤 전세를 내기로 했다.
둘러업고 안으로 들어간다.
내부는 환하다.
조명이 밝혀져 있다.
영화나 미드 같은 데서 보던 유럽식 저택이다.
듣고 온 바에 의하면 여러 가지 오락 시설이 많다.
밖에서 봤을 때 널찍했으니 큰 과장은 아닌 것 같다.
'기왕 러시아까지 온 거잖아.'
가족 여행이라 아주 마음대로는 못해도 조금 마음대로는 해도 될 것이다.
가볍게 현지 사람의 포장을 벗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