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6화
<인맥 쌓기>
로컬푸드 일행.
차를 타고 이동 중이다.
"선생님 기분이 좋아 보이시네요?"
"기분 좋지!"
"하긴 저도 고향 내려가면……."
천종원의 입꼬리가 한층 올라가 있다.
딱히 설탕을 붓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사실은 진작에 가야 했는데 더 급한 곳부터 챙겼어야 하니까."
"그렇죠."
"이번에는 예산도 큰일이라고 하던데요?"
충청남도 예산이 촬영지이기 때문이다.
천종원의 고향으로 특산물은 사과가 유명하다.
충청북도 충주와 겹치는 감이 생긴다.
재고 이슈도 없어서 순서가 미뤄졌지만.
"아이고 센세!"
"예산군 최고 아웃풋!"
"쏴리 질러엇 천종원~!"
최근 사태가 하나 생겼다.
천종원이 도착하기 무섭게 농민들이 구름떼처럼 모여든다.
"여기 천종원교 하나 만들어도 되겠는데요?"
"아우~ 그러지 마. 소름 끼쳐."
""하하하하!""
10월.
사과가 제철이다.
농민들로서는 가장 뿌듯한 순간이어야 한다.
"그런데 태풍 때문에?"
"태풍까지는 저희도 매년 겪는 일이니까 어떻게든 대응하는데."
"와아 매년……."
"올해는 정말 역대급이었어유~!"
하지만 수확이 안 좋으면?
기상 여건에 따라서 쪽박을 찰 수도 있는 일이다.
「냉해」
농작물의 성장 기간 중 저온이 오래 지속되어 표면에 얼룩이 생김「탄저병」
표면에 갈색 점이 생기는 병으로 장마로 인해 썩는 현상 「낙과」
태풍 혹은 병충해 등의 이유로 바닥에 떨어져 버린 과일
봄에는 냉해, 여름에는 장마, 가을에는 태풍까지.
하늘이 사과 농사 짓지 말라고 저주를 퍼부은 한 해였다.
"이 시기가 되면 군인들 점심 후식으로 사과 하나씩 주거든요."
"그거 인정! 나도 훈련소 때 먹었어."
"농민들 도와주는 거라고 생각해!"
그렇게 하자가 생긴 사과.
정부에서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도와주지만 올해는 특히 심했다.
"진짜 삼중고죠. 삼중고! 올해는 봄부터 말썽이여 가지고."
"아, 이 점 같은 게 냉해 때문이구나."
"사과를 보면 1년의 날씨를 다 알 수 있네요."
하나만 터져도 농민들은 억장이 무너진다.
올해는 세 가지가 동시에 터졌으니 대부분의 사과가 상품성이 없다.
상태가 안 좋은 사과를 바라보는 천종원이 먹먹해할 만도 하다.
다름 아닌 자신의 고향에서 일어난 일이니 말이다.
'휴…….'
그 덕에 카메라의 포커스가 대부분 집중되고 있다.
민솔은 사각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이 사과 봐. 엄청 커."
"네에……."
"민솔이 얼굴만 하지 않나? 어디."
컨디션이 영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기척도 없이 접근한 오정환에 손길에 자신도 모르게 오싹한다.
'오빠 때문이잖아!'
이틀 전 밤.
식사 자리를 가졌다.
분위기가 무르익다 보니 얼떨결에 그의 집에 가게 되었다.
딱히 그런 걸 생각했던 게 아니다.
봄이의 실물을 보고 싶기도 했고, 그냥 궁금한 측면도 있었다.
아삭!
선을 넘고 말았다.
오정환이 들고 있는 저 사과처럼.
"맛있네요."
"그렇죠?"
"표면에 기스가 많아서 시청자분들 보기 좀 그럴 수 있는데 과육은 식감도 맛도 훌륭하네요."
농락당하고 만 것이다.
저 소름 돋는 손길이 자신의 온몸 구석구석을 쓰다듬었다.
'으윽.'
특히 아랫배는 아직도 욱신욱신하다.
술에 취해있었지만 그것만큼은 확실하게 기억한다.
첫 경험.
그 순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신의 소중한 걸 가져간 남자를 의식하는 것은 당연하다.
"올 한 해가 워낙 다사다난했다 보니 상품성 있는 사과가 그나마 이 정도입니다."
"그 힘든 나날을 겪으면서 살아남은 거잖아요?"
"그렇게 봐주시면 감사하죠!"
"과일도 어렵게 열매를 맺은 것이 더 맛있게 느껴지는 것 같네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생글생글 웃으며 방송을 진행하고 있으니 복장이 터질 노릇이다.
어디다 털어놓지도 못한다.
'얼마나 어렵게 된 배우인데…….'
뻥긋 말이라도 잘못하면 이 중요한 시기에 스캔들이 날지 모른다.
10년 이상 어렵게 쌓은 커리어에 흠집이 생길 수 있다.
물론 믿는다.
술김이라고 해도 몸을 허락한 건 아무런 생각도 없이 저지른 우가 아니다.
"과일 사먹으면서 비싸다고 투정 많이 했는데 앞으로 그러면 안 되겠다."
"그나마 파는 건 시청자분들이 이해를 해주시면 다행인데……."
"문제는 나머지죠?"
"그렇지! 귤처럼 파치들은 팔 수가 없거든."
그런데 그날 이후로 연락도 뜸하고 관심도 덜해졌다.
한국 드라마에 꼭 한 명씩 있는 나쁜 타입의 남자.
당하는 역할의 연기를 해본 적이 있다.
감정이입했을 때의 그 기분은 현실에서 느껴보고 싶지 않은 부류다.
* * *
여자.
홈런을 치는 것보다 어려운 건 사후의 뒤처리다.
달칵!
식사 시간이다.
보온 도시락의 뚜껑을 돌려서 열자 김이 모락모락 난다.
"맛있겠지?"
"……."
"밀패유나뵈인데, 걱정 안 해도 고기는 안 들어갔어. 대신 건두부를 넣어봤는데 어때?"
내가 생각해도 맛있게 만들었다.
별 지랄을 다 하고 있다.
'그냥 안 처먹으면 다이어트인데.'
다이어트한다고 야단법석 떠는 인간들이 꼭 삼시세끼 다 챙겨 먹으려고 한다.
몸이 상한다면서 말이다.
인간의 몸은 그 정도로 나약하지 않다.
하루에 한 끼만 먹어도 영양제만 챙겨 먹으면 별 탈 없이 굴러간다.
"어떠냐고 확 마!"
"화냈어……."
"뭐, 어쩌라고요 대체."
"그냥 저는 별로 원하는 것도 없고 평범하게 해줬으면 했을 뿐인데."
그러지 못하는 의지 박약.
빠져들었을 때부터 눈치는 챘지만 생각 이상으로 귀찮다.
'한국 드라마가 시청자만 망친 게 아니라 배우도 꿈나라에서 살게 만드는구나.'
여배우 관록이 있는 주제에 알맹이는 애새끼나 다름없다.
스포츠 한 판에 의미 부여를 하고 있다.
"제가 출연했던 부탁해요 며느리에서 하명훈 선배님이 연기한 진성역이 지금 정환 오빠의 모습과 똑같은 것 같아요."
"안 봐서 모르겠지만 개새끼 같네."
"맞아요."
드라마는 드라마.
24시간 서로를 의식하고 있을 수만은 없는 것이다.
생업이 있기도 하거니와.
'이미 했잖아.'
극상의 몸이었다.
오직 아름다움만을 위해 연마된 몸은 겉 이상으로 속이 알차게 들어찼다.
조금 격하게 연주해도 충격이 근육을 타고 퍼져 분산된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맛이 찰지다.
"그래서 내가 뭘 잘못했는데?"
"카톡이요."
"응?"
"전에는 정성껏 다 대답해줬는데 그날 이후로는 ㅇ 하나로 끝내고……."
지식욕도 채울 수 있어서 좋았다.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 가져보는 의문일 것이다.
여배우는 어떤 남자가 안을까?
사실 사생활이 썩을 대로 썩은 문란녀인데 카메라 앞에서만 청순한 척하는 게 아닐까?
의문을 속 시원히 해결했다.
앞으로는 여배우들에게 선입견을 가지지 않고 작품을 관람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게 다 깊은 뜻이 있어서 그런 건데."
"뜻? 뜻은 무슨 뜻요?"
"봐봐. 고개만 오른쪽으로 살짝."
"오른쪽?"
"의식하지 말고."
그 대가가 생각 이상으로 짜증이 난다.
이제 막 활동한 연예계에서 안 좋은 소문을 만들어서 좋을 건 없다.
'여자들 사이에서 퍼지는 소문이 제일 귀찮지.'
점심 시간이다.
식당에 가서 사먹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촬영장에서 배달 온 도시락을 먹는다.
싸 온 도시락이라는 점만 다를 뿐 우리도 그중 하나.
엄폐물이 있기는 해도 지나치는 스태프들이 있다.
"촬영 중에도 그래. 자꾸 나한테 사랑의 눈길을 보내고."
"그런 거 보낸 적 없어요!"
"감정 컨트롤이 너무 안 되잖아. 스캔들이라도 하나 일으키게?"
"……."
연예계 찌라시.
아마 그렇게 생기는 것일 테다.
아직 일으킨 적이 없다 보니 짐작이지만 말이다.
'동네방네가 아니라 전국팔도에 홍보하는 꼴이지.'
재미있는 사건이 될 수도 있다.
무엇이든 경험이라고 하나쯤 일으켜도 꽤 흥미진진할지도 모른다.
"설마 그래서."
"그래."
"무심하게 대한 게 그런 연유였던 거예요?"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꼭 말로 전해야만 진심인 게 아니지. 연기를 하는 사람이 그걸 몰라?"
하지만 그녀에게 있어서는 인생이 달린 일이다.
소속사가 키운 거라면 상당히 큰 손해 배상의 책임으로 연결될 가능성도 있다.
'파프리카TV처럼 마음대로 할 수가 없지.'
적당히 요령껏 마음대로 해야 한다.
방송 업계라는 것은 확실히 만만한 곳이 아니다.
토독, 톡!
민솔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인간 관계는 어리숙해도 방송짬은 나보다 배의 배는 더 먹었으니까.
〔민솔이〕
「그럼 이걸로는 말해도 돼요?」
―ㅇ
―표정 관리
「제가 누군지 몰라요?」
「여배우 박민솔이라고요」
연예인들이 어째서 스캔들이 나는지.
그것도 알고 보면 몇 년씩 사귀고 있었는지.
―오
―그냥 평범하게 핸드폰 가지고 노는 것 같네
「ㅎㅎ」
「그런데 만에 하나 걸리면 입 맞춰주실 거죠?」
―괜찮아 안 걸려
―걸려본 적 없어
「?」
알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확실히 스케일이 커지면 스릴도 더 커진다.
'그만큼 후폭풍도 커지긴 할 텐데.'
걸리지 않으면 일어나지도 않는다.
즉, 사고 자체가 아닌 것이다.
"그럼 이게 다 못 쓰는 파치인 거네요?"
"그렇지."
"근데……, 파치가 뭐에요?"
"너 몰라? 제주도 갔을 때 있잖아."
"흐흐, 그땐 민솔이가 없었지."
"그랬나?"
촬영 중에 서로 모르는 체하는 재미도 있다.
연예인들의 세계가 무엇인지 감이 잡힌다.
'눈치 빠른 애랑 하니까 더 재밌어.'
시청자들의 궁금증을 긁어주는 것.
요리를 잘 모르는 노력형 캐릭터로 자리매김했다.
사실 여자 비주얼 담당이니 평타만 쳐도 충분하다.
나는 나의 방송적 역할을 소화한다.
"제주도처럼 여기도 사과로 술 만들면 되지 않아요?"
"흐흐."
"?"
"여기는 이미 하고 있죠?"
"예산 사과 와인 유명하거든~"
술 쪽 역할.
로컬푸드는 지역 특산물 활성화에 의의가 있는 프로그램이다.
'술이 가장 고부가가치 산업이라서.'
많이 알려지진 않았지만 각 지방자치단체에서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이곳 예산도 그중 하나였다.
끼익―!
안내를 받아 들어간다.
대규모 사과 농장 한가운데 널찍하게 세워진 창고 옆에는 언뜻 별장 같이도 보이는 큰 2층 건물이 세워져 있다.
"여기는 진짜 크네!"
"본격적이네요."
"저희는 2010년부터 한국에도 유럽식 와이너리를 만들고자……."
와이너리.
와인을 사 마시면 생산자가 어떻고, 생산지가 어떻고를 따지게 된다.
한국에도 예산 와인이 생긴 것이다.
'천종원 선생님의 고향이시니.'
큰 애착을 가지고 계신다.
이곳에서의 방송이 잘 된다면 점수를 크게 따놓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과로도 와인을 만들 수 있구나."
"정확히는 사이다라고 하는데."
"사이다? 콜라 말고 사이다?
지금 이상으로 유명해지신다.
대한민국 요식업계에서 압도적인 영향력.
숟가락을 얹기에 이보다 더 적절한 대상은 별로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사이다가 투명한 탄산 음료로 통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사과 와인으로 표현을 대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잘 아시고 계시네요."
"네?"
사실 탄산음료 사이다는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만 사이다라고 부른다.
일제시대의 잔재 같은 느낌이다.
시청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며 띄워준다.
예산 와이너리는 국내 업체 치고 퀄리티가 있는 편이니 거짓말은 아니다.
"저희가 사이다도 만들고 있지만 브랜디도 숙성하고 있는데……."
"아, 아직 출고는 안 했어요?"
"했죠. 안 팔려서 문제지."
그리고 가장 큰 것.
대부분의 전통주 업체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다.
'살짝 인맥의 힘을 동원한다면야.'
재고의 처리도 도와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