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J로 산다는 것-694화 (694/846)

694화

<뇌물의 정석>

CBS 본사.

1층 로비가 북적거린다.

오후 6시는 대다수 직원들이 퇴근하는 시간이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하지만 직장은 직장.

상사가 지나가면 자신도 모르게 허리가 구부러진다.

그 대상이 겁나게 높은 사람이라면 특히 더.

"전무님!"

"음."

"오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리고 생신도 미리 축하드립니다."

군데군데 흰 머리가 보이는 남성이다.

그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도 보통 사람들은 아니다.

일반 사원들은 못 본 듯이 눈을 돌리고 있다.

자신들은 눈도 못 마주치는 부장급의 상사다.

"다름이 아니라 저희 팀이 토요일에 미룰 수 없는 촬영이 있어서……."

"아쉽구만."

"정말 송구합니다! 존경하는 전무님의 생신 때 하필. 선물은 이 친구를 통해 전달 드리겠습니다."

"네, 네!"

그런 그들조차 쩔쩔매고 있는 사람.

찍히기라도 했다간 회사 생활이 아름다워지리란 건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저, 저는 갈 수 있습니다! 전무님, 생신 때 뵙겠습니다."

"그러지."

"네, 살펴 가십시오."

"살펴 가십시오!"

다행히 오래 이어지진 않았다.

짧은 대화였는지 금방 해산된다.

하지만 90도에 가깝게 구부러진 허리가 긴장감을 대변한다.

'윤청호 이 인간 생일 때마다 이게 뭔 고생인지.'

예능본부장 최동주는 CBS에 뼈를 묻은 지 20년이 되었다.

저 양반은 30년이 되어서 문제다.

전무 이사라는 갑 중의 갑.

자신도 어디 가서 눈치 볼 짬밥은 아니지만 윤청호 앞에서는 기가 죽는다.

"본부장님?"

"어?"

"저 가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전무님 생신에 진짜 가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도 생일을 빠져나갈 짬밥은 되었다.

자신 대신 생고생을 할 부하 직원에게 애도를 표한다.

'그냥 하루 죽었다 생각해야지.'

최소 부장급의 고위 임직원들이 참석한다.

그 안에서 눈칫밥 먹는 것부터가 보통 일이 아니다.

자신도 버텼던 과정.

거기까지는 그러려니 할 수 있다.

회사 생활이라는 게 원래 눈칫밥의 연속이다.

"오죽하면 내가 스케줄 틀어서까지 안 가겠냐."

"본부장님도요?"

"조금은 나아지지. 근데 그만큼 이거."

"돈?"

"그래."

그렇다고 짬 먹으면 나아지냐?

그렇지도 않아서 문제다.

'직급에 어울리는 선물을 안 주면 눈치를 겁나 줘서.'

비싼 선물을 받으려 한다.

가장 좋아하는 건 고급 주류.

재작년은 발렌타인 30년.

진급을 한 작년에는 로얄 샬루트 32년.

50만 원 이상의 고액이 매년 나간다.

심지어 보람도 없다는 게 문제다.

"32년이요?!"

"나도 처음 봤어."

"그런 걸로도 만족을 못 하면 대체 어떤 걸 드려야 만족하실까요?"

"글쎄, 그 인간이 만족하는 꼴을 봤어야 알지."

안 주면 지랄똥을 싼다.

줘도 돌아오는 콩고물이 없다.

'뭐, 거기까지는 그렇다 치는데.'

방송 업계.

워낙 목돈이 오간다.

쩐을 밝히는 사람들이 많다.

뇌물 수준을 요구하는 관계자들까지 있을 정도다.

그에 반하면 양반이라고도 볼 수 있다.

'아쉬운 건 그거지.'

그래도 받았으면 밀어주고 당겨주는 문화가 있다.

윤청호 전무는 입을 싹 닫는다.

그가 마음먹고 밀어준다면 차세대 스타도 꿈이 아닐 텐데 말이다.

아쉬울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매년 선물을 진상하는 것.

혹시나 하는 기대가 없다고는 말하지 못할 것이다.

* * *

연예계.

나도 나름대로 섞여들었다고 할 수 있다.

"이거 진짜 죽음이다."

"괜찮죠?"

"괜찮은 정도가 아닌데? 무엇보다 가격이."

그 훈장이다.

성식영 씨와 개인적인 만남을 가지고 있다.

'글자 그대로.'

술 친구.

지인과 술을 마시듯이 자연스럽게 한잔하는 것이다.

"사장님 이게 얼마라구요?"

"한 샷에 2만 원으로 서비스하고 있습니다."

"전에 마신 5만 원짜리보다 훨씬 맛있다!"

연예계도 결국 사람 사는 곳이다.

가끔씩 술 한 잔이 땡길 때가 있다.

'군대에서 담배로 친해지듯이.'

술도 인간 관계에 다리를 놓아준다.

성식영은 연예계에서 유명한 애주가.

비정상인회담에서도 대뜸 술 이야기를 꺼내왔다.

한두 잔 하다 보니 친해졌고, 이렇게 사석에서 만나는 사이가 되었다.

"나는 위스키는 돈 쓴 만큼 맛있다는 것만 알고 있었거든."

"확실히 비싼 것 중에 맛있는 게 많죠."

"근데 너랑 마시다 보니까 생각이 바뀐다."

서로가 같은 세계관을 공유한다는 친숙함.

사생활 문제를 일으키면 안 되는 연예인은 중요하다.

BJ세계에도 있는 분위기이기에 적응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아, 물론 좀 더 깊은 곳에 파고들면.'

다른 재밌는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

아직은 생초짜.

조급해하지 않고 천천히 알아가고 있는 중이다.

"사실 나는 위스키 별로 안 좋아했거든."

"마시기는 하는데?"

"반주로 걸치면 썩 좋은 느낌이 아니더라고. 마리아주라고 그러나?"

"그런 감이 있죠."

술이라는 것도 알면 알수록 복잡하다.

주위에 잘 아는 사람이 한 명쯤 있으면 좋다.

'맛집 잘 아는 사람처럼.'

우리나라에서 술은 취하기 위한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으로 치부된다.

하지만 세세하게 따지면 재밌는 요소가 많다.

술의 종류는 물론이고, 마시는 법도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술을 음식이랑 먹잖아요?"

"뭐, 그렇지?"

"세계적으로는 식후주로 많이 마시거든요. 식사 중에 음주를 하는 나라가 의외로 드물어요."

"오……."

위스키와 브랜디 등.

뭉뚱그려서 양주는 향을 즐기는 경우가 많아서 음식과는 대체로 어울리지 않는다.

'물론 굴과 피트, 버번과 소고기 같은 조합도 있기는 한데.'

진정한 의미에서 마리아주라고 부르기는 애매하다.

그래서 비싼 양주를 땄는데 실망하는 경우가 있다.

꿀꺽!

하지만 식사 후의 술.

한국의 2차 개념으로 즐기면 흥을 돋워준다.

음식물이 차 있는 위장에 부담 없이 들어간다.

"맛있네. 이게 몇 년짜리야?"

"7년 정도 됐을 겁니다."

"7년밖에 안 됐어?"

"이 블랑톤이라는 위스키는 조금 특별한 버번이라서요."

독주를 즐기기 가장 좋을 때다.

이런 식으로 연예계 인맥을 확장해 나가고 있다.

꼴꼴꼴

다음 위스키.

킬커란 12년이다.

스모키한 피트향과 꿀과 소금 같은 단짠이 매력적인 술이다.

"이건 아예 처음 보는 술인데?"

"약간 마이너한 쪽이죠. 형도 이 정도 드실 때가 된 것 같아서."

"좀 컸어? OK 마셔준다."

피트는 위스키계의 홍어.

처음 마시는 사람에게 권할 것은 아니지만, 웬만큼 마신 사람들은 재미 삼아라도 마신다.

분위기가 달아오른다.

이처럼 비싼 바는 사교장의 역할도 한다.

다른 장소에 비해 비밀 유지가 된다는 점도 크다.

"그러면 이걸 드리면 어때?"

"나쁘진 않죠."

"나쁘진 않은 정도야?"

"네."

한 잔 땡기고 있는 이유.

취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곧 있을 중요한 모임을 토의하기 위함이다.

'높으신 분의 생일 파티라.'

BJ업계에서는 끽해봐야 대기업BJ다.

하지만 연예계.

연예인 말고도 방송 관계자들이 많다.

"제가 지금까지 말한 거 있잖아요."

"어."

"그분도 알고 계시다고 보는 게 맞겠죠."

"그게 그렇게 되나?"

주류 애호가라고 한다.

어디 이사님쯤 되는 분들 중에는 상당히 높은 빈도로 있다.

'차라리 술을 모르는 사람이면.'

그냥 연수 높은 거.

발렌타인, 로얄샬루트나 조금 오바하면 맥캘란이 선물용 위스키로 적합하다.

하지만 잘 아는 사람들에겐 감흥이 없다.

돈은 돈대로 쓰고 아무런 기억도 남기지 못한다.

"특별한 서프라이즈가 되기 힘들다는 거죠."

"어렵네."

"네."

"게다가 술을 잘 아는 사람일수록 성격이 배배 꼬인 경우가 많아요. 저도 개인적으로 애주가한테 술 선물하는 건 싫어합니다."

"너처럼?"

"……."

그렇다.

CBS의 전무 이사.

실제 방송에도 큰 영향력을 미친다고 한다.

연예계만큼 고인물인 업계가 없다.

잘 보여야만 오래오래 살아남을 수 있다.

'우리 봄이가 출연 예정인 방송국이기도 해서.'

나로서도 점수를 따두고 싶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될지 모른다.

"그럼 술 말고 다른 걸 드려야 되나?"

"아뇨."

"응?"

"저는 술을 잘 안다는 방송 컨셉이 있잖아요? 기대를 저버리는 꼴이 될 수 있어서."

그 과정이 결코 쉽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상대가 나를 초대했다는 것.

무언가 기대가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러니까 술이 만병의 근원이지.'

기대를 만족시키면 바로 친해질 수 있다.

그러지 못하면 술알못 취급을 하며 싫어하는 경우도 흔하다.

애주가라는 인종.

얼마나 까다로운지 잘 알고 있다.

물론 해결책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나도 일단은 술 쪽이잖아?"

"형은 본업이 가수인데."

"그래도 부담이 간단 말이지. 뭐 좋은 거 없나?"

"정석적인 것은 생빈이죠."

"생빈?"

스토리가 있는 술을 선물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으로 생년 빈티지가 있다.

선물 받은 사람이 태어난 년도에 나온 술.

애주가라면 반드시라고 해도 될 정도로 좋아한다.

'지출이 만만치는 않지만.'

나이가 지긋하시다.

1962년.

위스키로 따지면 없다고 보는 게 맞고, 와인으로 따져도 최소 수백만은 할 것이다.

"내가 돈이 있어도 그건 아니야."

"방법이 있죠."

"어떤?"

"해외에서 직구한다 치면 이 정도."

"30만 원?"

싸게 때우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포트 와인 등의 주정강화 와인.

숙성 연수가 높은 것도 터무니없이 비싸진 않다.

'인상은 확실하게 남길 수 있고.'

식영 형한테는 충분할 것이다.

같은 애주가로서의 교감을 가질 수 있다고 확신한다.

"생각보다 싸네? 50년짜리가 이 정도면 나도 한 번 사 마시고 싶다."

"하하."

"너는? 너도 이걸로 할 거야?"

"글쎄요."

문제는 나.

똑같은 것을 가져가면 효과가 당연히 반감된다.

무엇보다 있을 수 있는 레퍼토리다.

'기대치라는 게 있잖아.'

이러한 편법을 모를 리 없다.

애쓴다 정도의 느낌이지, 깜짝 놀라지는 않을 것이다.

애주가에게 술 선물을 하기 싫은 이유.

스토리텔링 짜는 게 웬만큼 어려운 게 아니다.

"혹시 그분이 어떤 분인지 아세요?"

"뭐, 대강은?"

친한 사이라면 추억이 깃든 술을 주면 된다.

그 술의 상위 라인업이라면 차고 넘친다.

'현장 출신의 실세 중의 실세라.'

하지만 인연이 없다.

어설프게 과거의 추억을 건드리는 건 도화선에 불을 지피는 행위가 될 수도 있다.

"그분이 발굴하고 띄운 사람이 한둘이 아니지. 업계에서는 거의 전설적이야."

"대단하신 분이네요."

"그러니까 나도 신경을 쓰는 거지. 부모님 생신 선물보다 더 고민된다니까?"

업계에서 영향력이 대단하다.

방송가는 인맥 관리가 상식 중의 상식이라고 한다.

'누구 꽂아주고, 누구 밀어주는 게.'

프로듀서의 입맛대로다.

혹은 그 윗사람 입맛.

명확하고 합리적인 기준을 따르는 게 아니다.

소위 말하는 느낌적인 느낌이다.

수십 년 경력인 내가 봤을 때 얘는 뜰 것 같더라?

"너는 특히 잘 보여야지."

"아, 네."

"신인은 웬만하면 잘 안 부르는데, 불렀다는 건 무언가 이유가 있다는 거거든."

"……."

그 느낌이라는 게 결국 기분의 연장선이다.

높으신 분들과 척 져서 좋을 것이 없다는 게 식영 형의 조언이었다.

나로서도 생각을 하고 있던 부분이다.

조금 떴다고는 해도 초짜인 나를 괜히 초대하진 않았을 것이다.

'썩어 빠지기로 정계, 재계 다음이라는 곳이 연예계라고 하니까.'

심한 경우에는 대놓고 뇌물을 요구한다.

최근에는 사라졌지만, 그래도 암암리에 오가는 것이 현실.

겨우 술 한 병으로 환심을 살 수 있다면 오히려 천운이라고 볼 수 있다.

기회와 위기는 종이 한 장 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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