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J로 산다는 것-695화 (695/846)

695화

KLC 호텔 4층.

"윤 전무님 생신연이 이곳 맞습니까?"

"네, 초대장 보여주시고 들어오시면 됩니다."

연회장 한 층이 통째로 사용된다.

돌잔치와 환갑은 물론, 높으신 분들의 피로연에도 종종 쓰인다.

"봤어? 봤어?"

"봤지."

"진짜 사인 받고 싶다."

"일만 아니었으면 사인빠따였지!"

접수를 받고 있는 직원들.

이러한 광경을 한두 번 본 게 아니지만 오늘은 특별하다.

"안녕하세요."

"네! 초대장 받았습니다. 혹시……, 배우 장훈 님?"

"맞습니다. 문제 있나요?"

"아뇨, 문제 있는 건 아니고 그냥 제가 팬이라서."

"아~ 감사합니다."

초대받은 사람들 중 유명 인사가 많다.

TV에서나 봤던 사람들이 현실에서 나돌아다닌다.

'와, 매너 좋은 것 봐.'

'진짜 개멋있다……. 일 끝나면 친구한테 자랑해야지.'

일을 하면서 즐겁기는 처음이다.

KCL 호텔의 직원들은 눈요기를 하며 흥분에 차있지만.

'아오, X발.'

'집에 가서 국밥 먹으면 속도 든든하지, 마음도 든든하지, 지갑까지 든든할 텐데.'

초대받은 당사자들의 입장은 다르다.

이러한 피로연.

이따금 초대를 받을 때마다 마음이 한편이 무겁다.

높으신 분들이 많다.

방송 출연하는 것도 아닌데 메이크업을 신경 써서 와야 한다.

"장훈! 자네도 왔나?"

"예, 감독님."

"안 그래도 한 번 보려고 했는데 잘됐구만."

인맥 교류의 장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시간을 허투루 소비하는 것만은 아니다.

연예계 활동은 인맥이 기본.

대형 작품의 캐스팅은 관계자들과 친분이 있어야 편하다.

"그래서 출연 생각해봤어?"

"아, 네."

"이번 작품이 새로운 시도가 될 수도 있겠지만, 장훈 너도 언제까지 느와르물만 할 수는 없으니까."

서로 편하다.

대형 배우가 어려운 건 마찬가지.

갑자기 다른 곳과 계약을 하거나, 사고를 터트릴 상이면 곤란하다.

사람이라는 건 겪어봐야 아는 법이다.

촬영 현장은 길면 몇 년씩도 하는 만큼 인간상을 알아야 안심하고 캐스팅 결단을 내릴 수 있다.

이러한 피로연 자리.

피로하긴 하지만 갈 만한 가치가 있다.

그럼에도 오늘은 관계자들의 표정이 썩 밝지 않다.

"윤 전무님 생신 축하드립니다!"

"그래."

"별건 아니고 홍삼캔디 풀세트입니다."

연회를 연 주인공.

굉장히 까다로운 탓이다.

장훈이 자신이 준비해온 선물을 건넨다.

"자네 살았구만."

"네?"

"설마 윤 전무님 취향 깐깐한 거 모르고 드렸나?"

"예……, 연세 생각해서 고르긴 했습니다."

요즘 세상이다.

옛날처럼 허례허식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나이 든 세대에는 그런 문화가 남아있다.

줄이 길다.

각계 각층을 대표하는 수많은 인사들이 연회의 주인공에게 선물을 진상할 타이밍을 엿보고 있다.

"전무님에 대한 저의 작은 성의입니다."

"술인가?"

"네! 윤청호 전무님이 좋아하실 만한 것을 심사숙고해서 골랐습니다."

잘 보이기 위함이다.

자신뿐만 아니라 소속사에 소속된 연예인들.

푸쉬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한 번쯤 고려를 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끼와 재능이 있다고 주목받는 세상이 아니다.

주목을 받고 나서 끼와 재능이 평가되는 것이다.

아시아의 중심으로 발돋움한 한국 연예계는 경쟁이 치열하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발버둥을 쳐야 한다.

'로얄샬루트 38년산이라고~'

MJ 스튜디오의 대표 김종인.

윤청호 전무가 술을 좋아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때문에 비싼 가격을 주고 사왔다.

면세점에도 가끔이나 들어오는 로얄샬루트 38년이다.

쯧!

그렇게 귀한 술을 받은 반응.

연회장 내 모든 사람들이 보았다.

윤청호의 찌푸려진 표정을 말이다.

'…….'

코앞에 있던 김종인은 혀를 차는 소리까지 들었다.

고가의 양주를 선물하고도 이런 반응을 듣기는 처음이다.

"봤지?"

"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

"여간 깐깐한 게 아니야. 그런 면에서 봤을 때 자네는 다행이지. 술을 피해서 드렸으니까."

애주가.

나이 드신 분들 중에는 많다.

수십 년 묵은 양주를 주면 대개 좋아하기 마련이다.

그런 안이한 생각으로 선물했다가 쓴맛을 본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돈은 돈대로 쓰고, 눈치까지 보이는 이중고를 겪는다.

'38년이라고 38년! 어디 가서 확 50년짜리라도 쌔려 와야 돼?'

'진짜 일부러 저러는 거야 일부러. 돈으로 주라고.'

"586 아니랄까 봐 존나게 밝혀요.'

그런 깐깐한 사람.

업계가 업계인 만큼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어지간한 진상은 이골이 난 기획사 대표들까지 고개를 젓는다.

또각! 또각!

그럼에도 신경을 기울일 수밖에 없다.

CBS의 캐스팅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퇴직 후 대형 기획사의 대표로 간다는 소문도 있어서 오래오래 볼 얼굴이다.

"전무님 안녕하셨습니까?"

"오랜만이네 식영 씨."

연예계의 소문난 애주가.

예능MC 석식영이 선물을 준비해왔다.

연회장 내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된다.

'성식영? 가요계의 안정환?'

'인스타에도 술 사진 많이 올리던데.'

'같은 애주가끼리는 뭐 통하는 게 있으려나.'

한때는 발라드 가수였다.

노래를 버리고 술과 담배를 택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는 그다.

그런 만큼 기대가 된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술을 가지고 왔을까?

"이건……, 와인인가?"

"네, 디저트 와인입니다. 편하게 드셔 주십시오."

그리고 윤청호 전무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까처럼 표정이 찌푸려진다면 연회장 분위기가 가관이 될 것이다.

다행히 좋았다.

나무 케이스 안에 든 술병을 꺼내 유심히 살펴보더니 흡족한 얼굴로 받아든다.

""휴우…….""

여기저기서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온다.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축하를 하라는 건 고문이나 다름없다.

'그렇게 썩 좋아하는 것도 아니네?'

'애초에 성식영 급이면…….'

'그냥 늙은이가 꽁술 마려웠구만.'

하지만 반응.

기대했던 수준이 아니다.

막 환대를 하면서 친분이라도 생길 줄 알았다.

겨우 기뻐하는 수준이라면 죽을 똥 살 똥 고생할 이유가 없다.

괜히 긁어 부스럼으로 찍힐 위험만 있는데.

또각! 또각!

구두소리.

다음 희생양이다.

한 남자가 술 선물을 들고 간다.

앞서 좋은 쪽과 나쁜 쪽의 예를 봤던 만큼 감흥은 없다.

뭐가 됐든 둘 중 하나로 결론이 나지 않을지.

"자네는……."

"오정환이라고 합니다. 초대해주셔서 영광입니다."

"그랬었지."

다른 사람이라면 그랬을지 모른다.

하지만 오정환.

그 세 글자는 방송 관계자들의 머릿속에 남아있다.

'저 친구 안됐구만.'

'보는 눈이 한둘이 아닌데.'

'어중간한 걸 꺼냈다간 방송 컨셉만 박살 나겠지.'

천종원의 로컬푸드를 필두로 여러 방송에서 나오고 있다.

술 관련 이야기가 나올 때 섭외 1순위.

그런 그가 사석에서 망신을 당한다?

시청자들은 모를지언정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소문이 퍼질 것이다.

"블랑톤인가?"

"그렇습니다."

"버팔로 트레이스보다 맛있는 녀석이지. 잘 마시겠네."

자신들의 눈으로 똑똑히 봤으니 말이다.

우려하던 상황이 결국 터지고 만 것이다.

"저기."

"응?"

"혹시 감독님은 아십니까? 저 술?"

"뭐야, 대배우 장훈이 그것도 몰라?"

"대배우라뇨. 애초에 제가 술에 관심이 없어서."

둘마트에서도 4만 원대에 구할 수 있는 위스키.

싼 가격은 아니지만, 비싸다고도 보기 힘들다.

그것의 상위 라인업이면 2배 정도 할 것이다.

자신도 그 정도의 술이라면 얼마든지 마련할 수 있다.

'안 된다니까.'

윤청호 전무에게 잘 보여야 한다.

그 일념으로 애지중지하는 컬렉션까지 갖다 받친 사람이 적지 않다.

술을 아는 사람들도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저 까다로운 양반은 그냥 비싼 조공을 받고 싶을 뿐이다.

'나 때문인가?'

성식영도 회장의 분위기를 인식하고 있다.

오정환의 블랑톤을 가지고 온 이유도 말이다.

자신이 포트 와인을 택했다.

똑같은 선물은 효과가 반감되니 다른 것을 골라야 했을 것이다.

결국 찾아내지 못한 것이다.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 스스로 말했던 블랑톤을 가져오게 되었다.

'나랑 별다를 것도 없는 새끼가 유난은.'

앞서 로얄샬루트를 선물했던 김종인.

연예계의 인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망신을 당한 걸 마음에 담아두고 있다.

그렇다고 윤청호 이사에게 풀어낼 수는 없다.

자신의 스튜디오 소속 연예인들은 CBS에서 활동을 해야 한다.

"저 블랑톤이라는 건 얼마나 하는 거지?"

"처음 들어보네."

"그건 제가 압니다! 아마 10만 원이 안 될 겁니다."

"뭐? 10만 원?"

그 두 마리의 토끼를 한 번에 잡을 방법.

자신이 오정환 이상으로 대단한 위스키를 선물했다는 사실을 인지시키는 것이다.

최근 급속도로 이름을 알리고 있다.

술 관련 전문가로 TV에 나온다.

그런 오정환이 무슨 술을 가지고 온 거지?

"10만 원이래."

"10만 원?"

"겨우……, 아니 뭐 10만 원이 싸다는 건 아니지만."

"확실히 이런 자리에 가지고 올 수준은 아니긴 하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슬며시 흘린 정보가 연회장 내에 바이러스처럼 퍼진다.

"제가 가지고 온 건 면세점에서 사도 70만 원을 호가하는 건데, 그런 훌륭한 술도 입에 안 맞으시는 윤 전무님의 눈에 차지 않을 만도 하지요."

"하, 70만 원씩이나요?"

"말이 70만 원이지 백화점에서 샀으면 200만 원 가까이 했겠습니다?"

"허허, 조금 무리를 하긴 했습니다."

반대급부로 자신에 대한 평가 또한.

윤청호 전무가 지나치게 깐깐하다는 건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다.

차고 넘치는 선물을 했다.

그럼에도 만족을 안 한 것이다.

그리고 오정환은 그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데 대체 왜.'

자신에게는 혀를 차고, 오정환에게는 인사치레라고는 하지만 잘 마시겠다는 말을 했다.

분통이 터진다.

"젊은 친구라 그런지 씀씀이가 작네."

"윤 전무님이 젊은 사람들한테는 마음이 약하셔."

"우리 같은 노인네들도 이해해주면 좋을 텐데 말이야."

""하하하!""

사치스러운 피로연이다.

스파클링이 아닌 샴페인이 나오며, 뷔페식의 음식도 좋은 재료를 사용했다.

위스키와 브랜디도 마음대로 따라 마실 수 있다.

물마저 에비앙과 페리에가 기본으로 나온다.

'BJ나 하던 자식이 올 곳이 아니라고.'

오정환과 특히 봄이.

자신의 기획사에 넣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제안 메일을 여러 번 보냈다.

깡그리 무시당했다.

연예계 생각이 없는 줄 알았다.

그런데 어느새 데뷔하여 스타 반열에 올랐다.

봄이라는 아이도 이전보다 더 잘 나가고, 최근에는 예능에도 섭외되었다고 한다.

솔직하게 배가 아프다.

원한까지는 아니지만, 발을 걸어 넘어뜨리고 싶은 심보는 든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이라면 필요 없다.

뽀옹!

그런 자신의 심정.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 윤청호 전무가 위스키를 딴다.

자신이 선물했던 로얄샬루트 38년이다.

"식사는 입맛에들 맞으셨습니까?"

"예!"

"잘 먹었습니다 전무님!"

""하하하!""

"그럼 오늘 제가 선물 받은 가장 훌륭한 술 두 병을 식후주로 함께 즐겨주셨으면 합니다."

700ml 분량.

샷으로 따르면 23잔 정도가 나온다.

비음주자를 제외하면 생신연에 참석한 모두가 즐길 수 있다.

"이런 귀한 술을."

"21년은 마셔봤는데……."

"윤 전무님 덕분에, 그리고 선물하신 김 대표님 덕분에 좋은 거 마시네요?"

"허허, 뭐 대수겠습니까."

그만큼 자신의 존재감도 확실히 전해진다.

자신이 이끄는 MJ 스튜디오도 한 번씩 상기해줄 것이다.

'이것보다 좋은 술은 없었지.'

물론 로얄샬루트 38년 이상의 술도 세상에는 존재한다.

적어도 오늘 이 자리에는 아무도 들고 오지 않았다.

가장 주목받는 것은 자신.

비싼 값을 주고 산 술이 자신의 이름값을 드높여준다고 생각하니 돈이 아깝지 않다.

그런 시끌벅적한 분위기이기에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윤청호 전무가 오정환이 선물한 술을 애틋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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