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7화
<질긴 인연>
정황.
"물."
"뭐라고?"
"Water……."
"아 OK, OK. 침대에서 쉬고 있어."
서은은 들은 바가 있다.
그 내용은 지나칠 정도로 스케일이 커 들으면서도 몇 번이나 다시 물어봐야 했다.
'목 졸라줘서 기분 좋았는데.'
정환 오빠의 말이 아니었다면 의심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솔직하게 설마 그런 일이 있나 싶다.
그런 자신의 생각은 중요하지 않다.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정환 오빠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는 게 중요하다.
시킨다면 강남 한복판에서 발가벗고 춤을 추라고 해도 춘다.
서은의 충성심은 웬만한 개 이상이다.
타악!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졌다.
남훈의 초대를 받아 참석한 자리.
남훈과 위너, 그리고 모르는 외국인들이 동석했다.
《그들이 주는 술을 받아 마시는 척해라.》
마시지 않는 것도 아니고 마시는 척을 하라니?
상황 하나하나가 단편적으로 보면 이해가 안 된다.
그다음 일을 듣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동석한 여자들이 하나둘 풀썩! 취한 것처럼 쓰러질 것이다.
《같이 쓰러진 척하고 있으면 방으로 데려갈 것이다.》
그리고 현재 정체 모를 외국인과 한 방에 갇혔다.
남자가 자신이 한 말을 들었는지 물을 떠왔다.
꿀꺽! 꿀꺽!
여기에까지 뭔 짓을 하진 않았겠지.
서은은 물을 마시며 곁눈질로 남자를 살펴본다.
노트북을 두들기고 있다.
무엇을 하는지는 몰라도 비밀 임무를 실행할 기회다.
또르르
작은 유리병.
무색무취의 액체가 담겨있다.
그것을 몰래 물잔에 따라 넣는다.
"술이 좀 깼나?"
"아으앙……."
"아직도 취해서 정신이 나가 있나 보네. 얼굴도 반반한 년이 크크."
그 작업이 끝나기도 무섭게 말을 걸어온다.
영어로 뭐라고 말을 거는 걸 취한 척 연기를 해서 흘려 넘긴다.
'휴우…….'
가슴이 콩닥콩닥 댄다.
이런 상황이 될 거란 걸 다 알고 왔음에도 당황스러운 것투성이다.
정환 오빠가 어째서 그렇게 심각하게 말했는지.
그 큰 뜻을 1/10이라도 이해했음에 황송하다.
사락
자신의 옷을 벗기고 있다.
역겹고 불쾌하지만 참아야 한다.
오빠의 계획을 자신의 실수로 망칠 수는 없다.
영어로 중얼거리며 얼굴을 가까이 댄다.
이상한 냄새가 코를 쿡쿡 찌르자 표정 관리가 더 힘들다.
꿀꺽! 꿀꺽!
인고의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물잔.
목이 탄지 입가로 줄줄 흘리며 허겁지겁 들이킨다.
그리고 소매로 쓱 닦는다.
흥분한 짐승을 보는 것 같아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려던 그 순간.
털썩!
갑자기 픽 하고 쓰러진다.
같이 테이블에 앉았었던 여자들처럼 말이다.
서은은 그제야 침을 꿀꺽 삼킨다.
'이게…….'
소문은 당연히 들어봤다.
클럽에 가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르는 것이 더 이상하다.
하지만 직접 보는 것은 별개.
어디까지나 조심을 하라는 차원에서 퍼지는 이야기다.
모르는 사람이 주는 것을 덜컥 받아 마시지 말라는 교훈이 담겨있다.
그것이 눈앞에 있다.
'이런 걸 대체 어디서 구하신 거지.'
의문스러운 것투성이다.
그런 고민을 할 시간이 없다.
서은은 서둘러 남자의 노트북을 살핀다.
찰칵!
해킹툴이 깔려 있는 USB.
노트북에 연결하고 빠르게 살핀다.
그 결과물은 놀라운 것이었다.
취한 상태에서 찍힌 여자들의 사진이 한두 폴더가 아니다.
위너와의 거래 내역도 상세하게 정리돼있다.
'거의 협박 자료 수준인데……?'
누군가 고발을 한다면 빼도 박도 못할 수준으로 말이다.
어째서 이런 자료를 준비해둔 건지.
떠오르는 것은 몇 가지 있다.
굉장히 위험한,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스토리가 머릿속에 스친다.
타닥, 탁!
그런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
서은은 노트북에 작업을 마치고 틈을 봐서 빠져 나간다.
<♪♬♪∼♪∼♬♪♬∼♬♪∼♩♪∼♩♬♪∼>
같은 시각.
광란의 파티가 펼쳐지고 있다.
일을 마친 남훈은 정말 홀가분한 마음이다.
'효과 확실하더라고.'
처음에는 간이 떨어질 만큼 놀랐지만, 몇 번 써보다 보니 익숙해졌다.
마시면 누구라도 기절한다.
그날 밤의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클럽에서 취해 원나잇을 하게 됐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야 이거 마셔."
"이 술 비싼 거죠?"
"비싼 거니까 빨리 마시기나 해."
"네~!"
그런 쪽팔린 일을 굳이 떠벌리고 다니는 여자는 없다.
어지간히 골 빈 년이어도 말이다.
'BJ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면 특히.'
여캠들은 사소한 스캔들로도 방송이 휘청거린다.
토이치TV는 조금 다를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의 커리어에 흠집이 난다는 면에서는 같다.
"아……, 나 왜 이러지."
"취했냐?"
"벌써 취했나 봐."
"쟤 술 존나 약해 꺄르르!"
그것을 알게 되니 더 신나게 놀 수 있다.
신인 여캠들을 데리고 와 술판을 벌렸다.
'이렇게 살짝인 상태가 데리고 놀기 좋더라고.'
양을 조절하는 법을 배웠다.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여자의 어깨에 손을 두른다.
"뭐야, 재미 보고 있었어?"
"위너 형!"
"와!"
"오빠 저 팬이에요!"
그것을 제공하는 위험한 형.
스페셜 게스트들을 접대하고 온 위너가 자리에 착석한다.
"사장님이 니 칭찬 많이 하더라."
"정말요? 다행이다……."
"뭐야, 뭐야 사업 얘기야?"
"남훈 오빠도 위너 오빠 도와주고 있었구나."
위너의 얘기를 들은 남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자신이 소개한 여자.
확신하고 있었기는 해도, 혹시 모르는 게 사람 취향이다.
'팁을 왕창 받을 수 있겠지?'
당장의 돈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여유가 된다면 더 사고 싶은 것도 많다.
"남훈이 요즘 너 좀 잘나가더라?"
"잘나가긴요, 저 따위가……."
"완전 명품 떡칠이야. 나도 그 정도는 안 해."
"혼자 후줄근하게 다니기 좀 그래서."
명품.
알면 알수록 신세계다.
자신이 아는 브랜드는 새 발의 피에 불과했다.
파가니라는 슈퍼카 중의 슈퍼카를 사자, 옷과 액세서리도 그 정도 급으로 맞추고 싶다.
한두 푼 드는 것이 아니다.
"오늘 고생했고, 앞으로도 이렇게만 해줘."
"네, 형!"
"우리 동생 잘 부탁한다 얘들아. 내가 제일 아끼는 동생이야."
"네!"
"저희 남훈 오빠랑 완전 친해요!"
돈을 벌어야 한다.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여캠들도 비즈니스를 마치고 온 형들에게 소개하기 위함이다.
'남훈이 이 자식 생각보다 단세포네.'
위너는 그런 남훈을 보며 가볍게 실소한다.
뒷세계에서는 흔한 케이스다.
갑자기 버는 돈에 빠져든다.
명품과 비싼 술, 그리고 외제차.
씀씀이가 헤퍼지며 스스로 몰락의 길에 접어드는 인간들 말이다.
"니들도 BJ야?"
"네, 오빠!"
"저도 방송해요."
"화면에 조그만 캠 키우고 애교 떠는 거 맞지?"
"여캠이라고 합니다."
"어, 그거. 오빠한테도 아양 좀 떨어볼래?"
""꺄아~!""
남훈도 그렇게 되어가고 있는 걸로 보인다.
처음부터 주제넘게 놀고 있던 녀석이기도 했다.
'뭐, 알 바냐.'
그렇기에 더 이용하기는 쉽다.
헤퍼진 씀씀이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것이다.
"오~ 애들 춤 잘 추는데?"
"그걸로 벌어먹는 게 여캠이니까요."
"거기도 좀 되고."
"오른쪽 있죠? 쟤는 찐이에요."
"그래?"
"얼굴은 손 좀 댄 걸로 알고 있는데 거기는 안 넣었습니다."
언젠가 완전히 몰락하기 전까지 잘 빨아 먹는다.
그쯤 되면 자신도 더러운 짓에서 슬슬 손을 뗄 계획이다.
'클럽 운영이라는 게 만만치가 않아.'
강남에서의 인맥.
관계자 접대 등의 이유로 사업을 하게 되었다.
클럽 문화를 잘 알고 있다는 자신감도 한몫했다.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던 것이다.
뒷세계와 생각 이상으로 깊게 연루됐고, 언제 터질지 모를 폭탄이라는 것도 불안 요소다.
사업이 궤도에 오르고, 해외에도 자리를 잡으면 그만둘 생각이다.
남훈은 그때까지만 써먹을 수 있으면 됐다.
"얘들 다 괜찮긴 한데."
"그렇죠?"
"진짜는 없냐?"
"진짜 예쁜 애 말씀하시는 거죠?"
"그래."
"있기는 있는데요."
자신도 재미를 좀 보고 싶다.
토독, 톡!
그래서 혹시나 하고 부탁해봤다.
오늘도 힘을 많이 썼으니 크게 기대하진 않았는데.
"어? 어어?!"
"괜찮죠?"
"괜찮은 정도가 아니지. 아 뽀샵인가?"
"뽀샵은 아니에요. 제 폰으로 찍은 거라 보정 없습니다."
남훈의 스마트폰에 들어오는 여자.
상당히 꽤 많이 마음에 든다.
아니, 솔직하게 좋다.
'이런 수준까진 기대도 안 했는데.'
아무래도 얕잡아 본다.
남훈이 데리고 온 여캠들을 다수 보기는 했지만 비교 대상이 비교 대상이다.
연예계에 진짜 이쁜 애들이 어디 한둘일까?
아이돌과 사귀어본 적도 있는 위너는 눈이 높다.
"이만한 급은 더 없지?"
"굳이 따지면 얘 리아라든가."
"오~ 얘도 괜찮네."
"근데 얘네 둘은 제가 친하지가 않아서……, 장담은 할 수 없습니다."
위너의 눈을 충족시키고도 남는다.
정훈과 준형 등 다른 애들도 자극적인 경험이 한번 필요할 것이다.
"데리고만 와. 알겠지?"
'아, 네……."
"이후는 형들이 알아서 할 테니까."
사건을 크게 안 키울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뭣하면 돈으로 입막음을 하면 된다.
'가을이라.'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데 무게추가 기운다.
* * *
위스키.
터무니없이 가격만 비싼 이 술에도 한 가지 좋은 점이 있다.
꿀꺽!
입에 머금고, 목으로 삼키고, 참았던 숨을 내뱉는다.
위스키를 즐기는 일련의 과정.
평소와 한 가지가 다르다.
'오늘은 술이 받는 날이 아니네.'
몸 상태가 안 좋은 날이라고 알려주는 듯하다.
실제로 사람의 몸에는 그런 기능이 있다고 한다.
필요한 영양소는 맛있게 느껴진다.
반대로 필요하지 않은 건 본능적으로 위험하다는 촉이 온다.
'쓴맛'이라는 형태로 말이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즐기는 사람들도 많지만, 본래 쓴맛은 독성을 경고하기 위해 발달했다.
꿀꺽!
알코올도 독성 물질의 일종.
몸이 분해하지 못하는 이상은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만들 수도 있다.
소주는 원래 쓴 거라고 인식한다.
맥주는 알코올로 치기에는 도수가 너무 연하다.
오직 위스키만이 내 마음의 문을 두들긴다.
오늘만큼은 입성을 전력으로 거부해온다.
'이게 원래는 진짜 맛있는 위스키인데.'
글렌리벳 18년의 구형.
오렌지와 사과로 만든 잼이 혀를 부드럽게 감싸는 듯한 매력이 있는 술이다.
기분 좋게 취하기에 이보다 적절한 술은 많이 없을 것이다.
그것이 너무 쓰고 떫게만 느껴진다.
꿀꺽!
그럼에도 마시고 싶은 날이 있다.
몸이 받든 안 받든 오늘은 거나하게 취하고 싶다.
'나도 별의별 짓 많이 했지.'
당연히 알고 있다.
내가 하는 일 중 상당수가 길에서 벗어났다는 사실 말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다.
다시 인생을 산다고 하더라도 불가능한 일이다.
꿀꺽!
그것에 도달했다.
얻은 것도 많지만, 잃은 것도 많다.
무엇이 옳은 길인지 나로서는 도저히 판단하지 못한다.
'그냥 똑바로 걸었을 뿐이야.'
나의 원점이다.
BJ를 시작한 이유.
처음에는 그저 알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다 알고 나니 허무함만이 남는다.
내가 당시 이 사실을 알았다 해도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때문에 돌아오고 나서도 얼떨떨했다.
가능한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며 살아왔다.
무의식적으로 걷고 있었던 것이다.
똑바로.
목표했던 방향에서 한 걸음도 뒤틀리지 않았다.
'굉장히 먼 길을 걸어온 듯한 기분이네.'
몸은 무겁지만 마음은 한없이 홀가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