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4화
곤란하기 짝이 없는 나날이었다.
'별의별 거 다 하긴 했지.'
타인에게 처음으로 관심이라는 걸 쏟게 되었다.
물론 이전부터 해온 행위다.
일단 알아야 한다.
모르고서 떠드는 것만큼 추잡한 게 없다.
여자들의 행동 원리.
화성에서 온 여자, 금성에서 온 남자가 괜히 베스트셀러가 된 게 아니듯 차이가 크다.
그것을 전제로 생각한다.
생물학, 심리학 기타 등등의 학문까지 더한다.
수박 겉핥기이긴 해도 확실히 도움이 된다.
'그냥 끝났지.'
단순하다.
복잡한 것처럼 보이는 건 어디까지나 모르기 때문이다.
알고 있으면 남자랑 별 차이가 없다.
같은 인간인데 따지고 보면 당연하다.
도저히 같은 인간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친절한봄이씨님, 별풍선 10개 감사합니다!
왜 도망감? 왜 도망감? 왜 도망감? 왜 도망감? 왜 도망감? 왜 도망감?
"……."
―방송 하다 튀는 BJ가 있다? 삐슝빠슝!
―진짜 뭐 있는 줄
―어제 기다린 새끼 개추 ㅋㅋ
―뭐 이유라도 설명해줘야 하는 거 아님?
가을과의 만남은 충격 그 자체였다.
내가 알고 있던 상식이 모조리 뒤집히는 느낌을 받았다.
'여자는 알았지만, 사랑은 몰랐던 거지.'
조금 쑥스럽긴 하지만 비유를 하자면 그렇게 될 것이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봐도 말이다.
타인에 대한 관심이 처음 싹트게 되었다.
수박 겉핥기가 아닌 진정으로 알아가고자 했다.
메이크업을 배운 것도 그때였다.
그녀의 얼굴을 최고로 아름답게 만들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인생은펩시콜라님, 별풍선 10개 감사합니다!
아니 진짜 왜 도망 갔냐고
"집에 가스 안 잠그고 나왔어요."
―아 그러면 ㅇㅈ이지
―응 인덕션인 거 다 알아~
―그게 4시간 지나고 기억 났눜ㅋㅋㅋㅋㅋㅋㅋ
―가을만 보면 튀어라 정환런^^
이전까지는 관심도 없던 분야다.
전공이나 취업과도 1도 관계가 없다.
그것을 하고 싶고, 배우고 싶고, 알아가고 싶었다.
이유는 단 하나.
'나 스스로도 어이가 없어.'
그 정도로 행동력이 있는지 몰랐다.
전공책보다 메이크업 서적을 더 많이 펴본 것 같다.
당시에는 유튜브 같은 게 없었으니 말이다.
맨땅에 헤딩하는 것처럼 배워야만 했다.
그럼에도 즐거웠던 것이다.
조금씩 알아간다는 게, 그녀에게 도움이 된다는 게.
"식사도 했고, 노래도 다 불렀는데 집에 가면 안 되는 법이라도 있습니까?"
―있던데?
―헌법 무슨무슨조 무슨무슨항에 있음ㅋㅋㅋㅋㅋㅋㅋㅋ―종결을 내라고
―가을도 어이가 없어서 벙쪄 하더라
깨닫고 나니 웬만한 전문가만큼 잘 알게 되었다.
원펀맨처럼 극적인 변화는 아니었지만, 일취월장을 하게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런 식으로 익힌 것들이 꽤 되지.'
우연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내가 노력한 것은 차치하고, 연습할 수 있는 원판이 끝내줬다.
메이크업을 제외하고도 여러 가지.
돌이켜 보면 BJ를 하는 데 도움이 된 것들이 많다.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다.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희석되기는커녕 내 안에서 존재감을 부풀렸다.
―보라큰손님, 별풍선 30000개 감사합니다!
아니 그만 간질거리고 마무리 지으라고 ㅡㅡ
"이이잉~ 기모링~!"
―정신 놨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오물쥐 ㅋㅋㅋㅋㅋㅋㅋ
―큰손 오열
―흐에!
그런 가을과의 재회.
단순히 좋다, 싫다로 양분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오만가지 감정이 들끓었다.
'그것을 간신히 진정시키기는 했는데.'
마지막 노래를 듣고서 도저히 자리를 지킬 수 없었다.
나쁜 쪽이 아닌 좋은 쪽의 의미로 말이다.
다음 날 일어나서 세수를 하고, 물 한 잔 마시고, 봄이 한 입 하고 나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명백한 현실.
「Talk) 가을. 할 말이 있음」_ ?15, 512명 시청
어젯밤 일은 꿈이 아니었다.
고요하게, 하지만 끊이지 않고 피어오르는 고양감이 온몸을 지배했다.
흥분과는 결이 다르다.
만족과 행복이 합쳐진 듯한 지금까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충신지빡이님, 별풍선 100개 감사합니다!
속보) 가을좌 영상 편지썰 풀고 있음 ㅋㅋ
"……."
―ㄹㅇ??
―이건 못 참지 ㅋ
―여기서 코물쥐 흉내나 내고 있으셈ㅋㅋㅋㅋㅋㅋ
―이이잉~ 기모링~!
충신지빡이님이 채팅금지 1회가 되었습니다!
꿈이 현실이 된다는 것.
방송을 켜기 전에 마인드 컨트롤은 충분히 해뒀다.
그렇게 받아들일 각오가 되었지만, 살아갈 각오는 다른 것이었다.
'영상 편집도 그랬었지.'
내 인생에서 가장 열심히 살았던 시기다.
조금 서투르고, 어색할지라도 그만큼 진심을 담았던 적이 없다.
<틀어도 되려나?>
―제발
―같이 좀 봐욬ㅋㅋㅋㅋㅋㅋㅋㅋ
―정환이도 그걸 원하고 있을 거임 ㅇㅇ;
―오정환이 8년 전에 만든 영상…… 이건 귀하군요
가을의 방송.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하고 있다.
뒤에 배경을 보니 얼마 전 갔었던 그녀의 집이다.
'집 앞에서 하염없이 대기 타고 있었지.'
그곳 말고는 달리 생각나는 장소가 없다.
애매한 추측만을 믿고 계속 기다렸다.
그녀가 나타나는 순간까지 말이다.
뒤늦게 방송을 켜고 따라가 합방을 진행했다.
―안녕하세요. BJ오정환입니다. 해당 영상물은 저작권이 적용되며 무분별한 배포 시 명예 훼손 및 저작권 위반 혐의로 법적 대응이 진행될 수 있습니다 ―오
―당사자 등장ㅋㅋㅋㅋㅋㅋㅋ
―법적 대응 ㅇㅈㄹㅋㅋㅋㅋㅋㅋㅋㅋ
―이 새끼 왤케 추함?
―가을님 빨리 켜요!
―구체적이라서 더 추해 ㅋㅋㅋㅋㅋㅋㅋ
―안 돼 안 틀 생각 없어 빨리 돌아가
집 앞에서 봤을 때는 그대로 사라질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기분 탓일까.
다시 본 그녀는 한층 밝고, 내가 알던 그 시절처럼 장난스럽다.
탁!
입술을 피식 움직인다.
그 사소한 변화는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망설임도 없이 클릭한다.
'아니, 자신은 있어.'
정말 진심을 담았다.
장난으로 만든 것이 아니다.
편집 기술은 다소 부족할지라도 감성과 방향성은 제대로 정했다.
<♪♬♪∼♪∼♬♪♬∼♬♪∼♩♪∼♩♬♪∼>
이승기가 부른 삭제.
설명이 필요 없는 명곡이다.
최고의 이별 노래 다섯 곡을 뽑는다면 반드시 들어간다.
'가사도 편집하기 좋더라고.'
영상이 틀어진다.
만들고 나서는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은근히 기대가 된다.
대략적인 내용은 기억하고 있는 대로다.
<한 장씩~ 너를 지울 때마다 가슴이 아려 와. 너의 사진이 점점 흐려져~>
가사에 맞춰 영상이 나온다.
사진 폴더.
가을이 찍혀있는 수많은 사진들을 한 장씩 삭제한다.
프리미어로 넣을 수 있는 영상 효과들도 전부 때려 박았다.
영상에 정성이 담긴 티가 난다.
사진 속 너를 불러도 보고, 만져도 본다.
배우의 애틋함이 영상 너머로도 느껴진다.
<크크크, 크크크킄…….>
―웃참 실퍀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뿔싸!
―웃음 참아주는 거 보면 사랑이다 ㅋㅋ
―이 정도 정성이면 사귈 만하네 ㅇㅈㅇㅈㅇㅈㅇㅈㅇㅈ
다시 말하지만 장난으로 만든 것이 아니다.
원래 일반인이 만든 영상이라는 게 오글거릴 수 있다.
<이젠 눈 감고~ 널 지워! 마지막 사진 한 장뿐~~!>
당시에는 정말 큰마음을 먹었다.
나의 생각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정이다.
―무관맥님, 별풍선 10개 감사합니다!
할 말이 있음?
"아니, 그때는 최신 트렌드가 UCC였어요."
―진짜 존나 옛날이네 ㅋㅋㅋㅋㅋ
―'틀'
―UCC가 뭐임?
―저거 진짜로 삭제하면서 찍었을 것 같으면 개추 ㅋㅋ충신지빡이님이 강제퇴장 되었습니다!
인터넷 동영상을 그렇게 불렀다.
지금처럼 유튜브나 개인 방송이 활성화된 시기가 아니다.
'UCC 공모전도 있고 그랬어.'
그때 그 시절의 감성이다.
영상으로 마음을 전한다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보라큰손님, 별풍선 10002개 감사합니다!
재밌는 거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너무 웃지 마요. 정환이가 나 생각해서 만들어준 건데.>
―적당히 웃으란 말 ㅋㅋㅋㅋㅋㅋ
―웃지 마요(쪼개는 중)
―이걸 8년 전에 만들었다고?
―캬~ 대기업BJ는 떡잎부터 다르누
당시의 나는 자신감이 부족했다.
내가 그녀에게 어울리는 사람인지.
안 그래도 고민이 많았는데 시간까지 없다.
군대.
처음 캐릭터 만들 때 성별 선택 잘못하면 따라오는 디스어드밴티지를 수행해야만 했던 것이다.
'차라리 헤어지는 게 낫지.'
2년 동안 어떻게 마음을 조리면서 군생활을 할까?
내 쪽에서 선을 긋는 것이 당시로서는 최선이었다.
<얘가 전날에 영화를 심취해서 봤구나, 아니면 군대 가려는구나 했는데 그대로 정말 삭제될 줄은 몰랐지.>
"……."
―오정환 삭제됨ㅋㅋㅋㅋㅋㅋㅋ
―지금 쥐구멍 들어간 듯?
―평소에 어땠길래 저걸 무덤덤하게 봤을까
―그때도 개 또라이였나 보네 ㅋㅋ
그리고 언젠가 성공해서 돌아오고 싶었다.
그것이 꼬이고 꼬이긴 했지만 그 마음만큼은 변한 적이 없다.
―서문봄펀치님, 별풍선 500개 감사합니다!
이거 유튜브에 꼭 올려주세요!
"닥치세요. 절대 그럴 일 없으니까."
―어차피 님 아니어도 올라감 ㅋㅋ
―흑역사 박제잼~
―조회수 500만 예약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살자 마렵누
결과적으로, 정말 결과적으로 그녀와 다시 마주 보게 되었다.
그렇기에 더 두려울 수밖에 없다.
'너무 순탄하잖아.'
너무 좋은 쪽으로 풀리고 있다.
나의 희망과 일치하는 방향이다.
그래서 더 불안하고 두렵게 느껴진다.
"빨리 영상 꺼."
<싫은데? 또 틀 건데?>
"아니, 진짜 하지 말라고.
<흐즈 믈르그~>
전화 너머 가을의 목소리는 장난스럽기만 하다.
나의 마음을 백분지 1이라도 알고서 하는 말인지.
<얘 웃긴 게 술 마시고 연락한 적은 겁나 많으면서 저러고 있다?>
"……."
―아
―질척거렸누 ㅋㅋㅋㅋㅋㅋ
―인간이 보일 수 있는 모든 추함을 다 보여 주는구나 오정환!
―전 여친한테 하면 안 되는 행위 1위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의심을 해볼 것도 없었다.
가을과 알고 지낸 기간, 그 이상으로 우리는 서로를 잘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더 망설여지는 것이다.
가능성을 확신으로 바꾸는 건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너 어제 너에게 쓰는 편지 잘 부르더라?>
"뭐, 못 부르진 않지."
<여기에도 너에게 쓴 편지 많이 있는데. 아, 나에게 쓴 편지인가?>
"……."
과거에도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했다.
영상 편지 외에도 손편지 같은 클래식한 것도 말이다.
그것을 마치 부채처럼 펴들고 있다.
그 하나하나에 담긴 내용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친다.
―비타500개님, 별풍선 500개 감사합니다!
오정환 여기까지 내다봤눜ㅋㅋㅋㅋㅋㅋㅋ
<방송에는 콘텐츠가 필요하다던데 난 이것만 낭독해도 되겠네.>
―평생 콘텐츠각 ㅋㅋㅋㅋㅋㅋㅋ
―역시 오정환식 보라 ㅋㅋ
―그거 혹시 파나요?
―이 정도는 해야 미인 사귀는구나 ㅇㅈㅇㅈ
과거의 소중한 추억이다.
실물을 보자 어떤 감정으로, 어떤 이유로 편지를 쓰게 됐는지 머릿속에 떠오른다.
'쓰고 나서는 기억에서 지워버렸는데.'
가을은 받고서 피식 웃을 뿐이었다.
편지를 읽었는지 어땠는지까지는 확인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쪽팔리다.
일일이 반응을 하면 오히려 더 못 쓴다.
하지만 반응이 아예 없으면 그건 그거대로 섭하다.
아직도 가지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가슴 한 구석이 왠지 모르게 울컥거린다.
<니가 쓴 편지 전부 읽어버리기 전에 나와.>
"어디로."
<어디든.>
과거는 아무리 아름다워도 과거.
미래의 추억을 만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