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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J로 산다는 것-829화 (829/846)

829화

K 바.

"맥캘란을 1950년대, 60년대, 80년대 빈티지로 한 잔씩 주실 수 있을까요?"

"80프루프부터 말이죠?"

"네."

일단은 마셔봐야 한다.

셰리 캐스크는 가장 많은 변화가 있었던 오크통이다.

꼴꼴꼴

3잔의 위스키.

요즘 위스키에서는 볼 수 없는 간장 같은 색깔이 눈을 사로잡는다.

진간장은 아니어도 튀김용 간장 정도는 된다.

"어째서 맥캘란을?"

"드셔 보시면 알 겁니다. 정확한 비교를 위해 두 분 모두 눈을 가리시고."

"그러죠."

"블라인드 테이스팅이지? 좀 오랜만인데."

약간의 색 차이는 있지만 조명이 어둡고 은은하다.

무슨 자존심 싸움 하려고 온 것도 아니니 부정의 우려는 없다.

꿀꺽!

하나씩 마셔본다.

어느 것이 오래된 위스키인지.

이민형 씨가 알겠다는 듯 입을 연다.

"이게 가장 맛이 진하네요. 묵직하고."

"그게 가장 오래됐다는 거야?"

"어……, 아닌가요?"

"크흐흐."

그가 선택한 잔.

얼핏 보기에도 진하다.

실제로 맛도 진득하고 꾸덕하다.

"그건 80년대의 맥캘란입니다."

"80년대? 가장 어리잖아요."

"네. 그게 셰리 위스키의 재밌는 부분이죠."

하지만 단조롭다.

밸런스가 무너져 있다는 느낌이다.

무슨 이유인지 다 안다는 듯 이석현 대표가 히죽거린다.

"나는 3, 2, 1 순서대로."

"아쉽게도 3번이랑 2번이 바뀌었습니다."

"아차~ 어렵네."

팍사레트.

셰리 와인을 5분의 1로 농축시킨 일종의 포도 시럽이다.

80년대에 증류된 셰리 위스키는 이것이 들어갔다.

'오크통으로 셰리 와인을 운반하는 게 금지되는 바람에.'

더해서 셰리 와인 자체의 판매량 저하.

집집마다 냉장고가 있는 시대에 굳이 셰리 와인을 마실 필요가 없다.

와인붐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도 딱 이 시기다.

그러한 시대적 상황이 팍사레트라는 편법을 만든 것이다.

"그래서……."

"네. 그리고 가장 오래된 건 2번입니다."

"이건 덜 꾸덕하던데……, 내 착각인가?"

"제대로 느끼셨어요."

그리고 소비자의 욕구.

진한 맛을 원한다.

마치 세리자와 선생님이 진한 맛 은어라멘을 팔아야 했듯이 말이다.

'이전부터 알고는 있었다는 거지.'

그래서 70년대가 다음으로 진하다.

50년대는 오히려 진함이 떨어지고, 대신 전체적인 풍미가 풍부하다.

"아~ 거기까지는 몰랐네."

"보잘것없는 잡지식입니다."

"가끔은 이런 올드 보틀도 마셔볼 만해. 물론 내 돈이 아니라면."

"……."

셰리 캐스크는 연도별로 특징이 뚜렷하다.

그걸 알기 위해 마시는 세 잔.

'비싼 거 마셔보고 싶기도 하고.'

이런 기회가 자주 오는 게 아니다.

이 세 잔의 가격만 200만 원이 훌쩍 넘어간다.

"다음은……."

"다음도 있어요?"

"이제 시작이지. 마셔볼 게 얼마나 많아. 여기는 또 술이 얼마나 많고."

"즐겁게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바 사장님만 신이 났다.

걱정하지 않아도 지금부터 마실 술은 레어한 것이 아니다.

'일단 시대상으로 한번 보여주고.'

그다음은 증류소 특색.

어차피 20세기의 위스키는 특징이 많지 않다.

위스키라는 술이 체계적으로 연구된 건 21세기부터다.

"다른 캐스크랑 달리 셰리는 역사가 좀 있어요. 그래서 예시를 보여드리고 싶었던 거고요."

"그렇군요."

"이제부터는 각 증류소의 위스키들을 한 번씩 마셔볼 건데 이건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에잉, 재미없게."

고급 양주의 대명사!

이름만 들어도 왠지 대단해 보이는 위스키지만, 실상은 역사가 지극히 짧은 스코틀랜드의 전통주다.

'만드는 방법도 간단했고.'

증류된 원액을 오크통에 넣는다.

그리고 기다린다.

끝.

위스키의 맛과 품질보다는 숙성 연수에 더 신경을 썼다.

"발렌타인 30년이 가장 비싼 위스키라고 생각되는 것처럼 말이죠?"

"네, 맞습니다."

"으휴~ 입 다물고 있었으면 여기 비싼 거 다 마실 수 있었는데."

보리 품종, 피트 비율, 증류 회수, 온도 조절 등을 신경 쓰기 시작한 건 지극히 최근의 일이다.

이전까지는 주먹구구식으로 만들었다.

따라서 너무 많은 걸 마셔볼 필요는 없다.

각 증류소마다 1~2가지만 마셔봐도 대략적인 특징은 알 수 있다.

'독립병입자까지 따지면 끝도 없겠지만.'

시작 단계부터 괜히 불안하게 만들 필요는 없을 것이다.

꽁술의 기회를 놓친 이석현 대표만 혀를 찬다.

"시작은 당연히."

"그래."

"더 글렌리벳 18년의 올드 보틀로 부탁드리겠습니다."

"글렌리벳이요?"

더 글렌리벳(The Glenlivet).

최초의 합법 위스키 증류소다.

가장 인지도가 있는 것부터 시켜본다.

'아무래도 당시 한국이.'

위스키를 구하는 것이 힘들었다.

유명한 증류소 중에 있을 거라는 것이 내가 내린 합리적 추론이다.

"다음은 글렌피딕 18년 퓨어몰트 있으면 부탁드릴게요."

"아마 있을 겁니다."

"퓨어몰트?"

"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싱글몰트의 옛날식 표기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음~"

그리고 글렌피딕(Glenfiddich).

최초의 싱글몰트 위스키 증류소다.

탁!

초록색의 도자기병.

1980년대에 나온 가장 오래된 글렌피딕 18년을 내려놓는다.

"도자기병 위스키라니 재밌네."

"실제로는 세라믹 소재지만요."

"그래?"

"그래도 도수가 43%라서 마실 만합니다."

현행 보틀과 드라마틱한 차이는 없다.

두 증류소 모두 워낙 유명하고, 거대하다 보니 퀄리티가 일정한 편이다.

'셰리 느낌이 조금 더 강하지.'

가격도 앞서 맥캘란에 비하면 합리적이다.

이민형 씨도 가벼워진 마음으로 즐기고 있다.

"둘 다 과일 느낌, 포도 느낌……. 비슷하게만 느껴지네요. 술이 약해서 한 입씩만 마시다 보니 잘 못 느끼는 것도 있지만."

"제대로 느끼셨습니다. 사실 둘은 그렇게 큰 차이가 나지 않아요."

"난 나는데?"

성격 나쁜 이석현 씨도 말이다.

지인을 도와주려고 온 건지, 술을 마시러 온 건지 모르겠다.

타악!

다음은 라가불린.

소위 '검정병'이라 불리는 초기의 Distillers Edition과 가장 보편적으로 마시는 16년이다.

"이건 아닌 것 같네요."

"음?"

"아무리 고등학생 때 마셨다고 해도 이런 특징적인 향을 기억하지 못하셨을 것 같지는 않아요."

"알겠습니다. 피트가 섞인 아일라 위스키는 앞으로 배제하죠."

아일라 지역의 위스키는 피트 처리를 하기로 악명이 높다.

스모키와 요오드향 때문에 알아보기가 쉽다.

사실 이건 내가 마시고 싶었다.

'가끔은 MSG도 먹어줘야지.'

피트는 위스키계의 MSG.

플루럴하고 시트러스한 섬세한 맛만 마시다가 자극을 탁 입에 넣으면 혓바닥이 발딱 선다.

같은 추측으로 캠벨타운 지역도 아닐 것이다.

특유의 황맛은 처음 마시는 사람에게 거부감을 일으킨다.

"취하는구만."

"생각보다 맛있다 보니 저도 과음을 했네요."

"오늘은 그럼 이만 쉴까요?"

"아니지, 아니지! 이런 기회를……, 아니 아버님의 위스키를 찾아드릴 기회를 놓칠 수 있나!"

"……."

어느새 목적을 망각하고 음주를 즐기고 있다.

그런 두 아재와 조금 더 어울려줘야 할 듯하다.

감자탕을 먹고 나온다.

위스키도 좋지만, 역시 한국 사람은 맵고 칼칼한 것을 먹어줘야 한다.

그리고 3차.

마띠아바자르로 발걸음을 향한다.

같은 마포구에 있다 보니 가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여기 분위기 좋구만."

"술이 슬슬 깨는데?"

"하하……."

더 어둡고 올드한 분위기가 들떴던 마음을 잡아준다.

저녁을 먹으며 이민형 대표와의 거리도 더 가까워졌다.

'애초에 이걸 해주는 목적이.'

인맥 쌓기에 있으니 말이다.

얼마나 더 마셔야 할진 모르겠지만, 후보군은 거의 좁혀지고 있다.

탁!

달모어와 발베니.

혹시 모르니 에드라두어와 아벨라워, 글렌파클라스 증류소도 머릿속에 킵해둔다.

"건포도와 초콜릿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 것 같네."

"그렇죠?"

"아버님이 고등학생 때부터 미각이 아주 타고나셨어~"

혀가 꼬부라진 이석현 씨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내 나름대로 각 증류소의 특징을 토대로 찾아본다.

'지금까지 마셔본 것도 있고.'

아무리 오늘내일, 혹은 일주일 내내 마신다고 해도 그 많은 위스키를 전부 마셔볼 수는 없다.

때문에 찾는 것은 머릿속.

일련의 과정은 내 머릿속에서 잠자고 있는 심층의식을 깨우기 위함이다.

마셔본 적이 있는 비슷한 위스키들이 떠오른다.

그 모든 정보들을 종합하여 찾는다.

사실 감자탕을 먹으러 가기 전부터 짐작 가는 바는 있었다.

꿀꺽!

이런 꿀 같은 기회.

이용하고 싶은 건 나도 마찬가지다.

어차피 오늘 하루를 투자한 참이고 말이다.

"마실 만큼 마신 거 아닌가요?"

"아니지~ 이건 그냥 시작이지. 그치, 정환아?"

"하하……."

"사실 맥캘란만 해도 1946처럼 특이한 보틀도 있거든~"

이석현 씨도 신바람이 나셨다.

위스키 매니아답게 희귀한 위스키도 꿰뚫고 있다.

'워낙 유명한 위스키이기도 하고.'

만화 '바텐더'에 나왔다.

무려 52년이나 숙성되어 하이엔드급 위스키 중에서도 격을 달리하는 녀석이다.

"마셔보셨어요?"

"당연히 안 마셔봤지. 지금이 기회야……!"

이석현 씨가 필사적으로 귓속말을 속삭일 만도 하다.

조금 비싼 위스키가 아니다.

'스토리텔링도 워낙 출중해서.'

제2차 세계 대전 때 증류가 되었다.

전쟁 중이다 보니 석탄 등의 연료가 부족했다.

그래서 피트.

석탄을 대체하기 위해 연탄의 연료인 그것을 사용했다.

맥캘란에서는 이례적인 처사다.

"근데 앞서 말했다시피 아일라 위스키처럼 피트 계열은 아닐 거고, 출시 년도도 비교적 최근이라……."

"쉿!"

"뭐, 또 마실 게 있어?"

그러한 위스키가 한둘이 아니다.

위스키 증류소는 많고, 지난 100년만 해도 정말 많은 역사가 있었다.

'그거 다 마시려면 이재용 해야지.'

돈도 시간도 너무 많이 든다.

설사 마신다고 해도 특정 위스키를 딱 잘라 고를 수 있을지.

"그렇게까지 안 해도 괜찮습니다."

"야!"

"이미 지금까지의 테이스팅으로 눈치챈 게 있거든요."

"있어?!"

돈도 문제다.

너무 많이 쓰게 하면 은혜를 입히고도 찜찜해진다.

지금은 맛이 가있는 이석현 씨도 같은 생각일 것이다.

이 정도 마셨으면 되었다.

"오늘 마신 술들의 공통점을 하나 찾았는데."

"공통점?"

"뭐지? 그런 게 있었나?"

"너무 비쌉니다."

"……."

평생을 고생만 하다 돌아가셨다.

그런 아버지의 지인이 맥캘란 1946을 선물해주셨을까?

'애초에 그게 말이 안 되는 거지.'

옛날에는 가격이 합리적이었다고 해도, 그 가격부터가 애초에 상류층을 위한 것이다.

1960년대 한국은 겁나 못 살았다.

고품질의 위스키는 절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 정도의 전제라면 경우의 수는 이미 좁혀져 있다.

* * *

MJ 스튜디오.

'…….'

김종인은 언짢은 기분을 하루종일 억누르고 있다.

엊그제 당했던 일.

꽈앙!

홀로 있는 사무실의 책상을 내려친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분이 안 풀린다.

'무려 천만 원이라고!'

술 한 병값.

누군가 듣는다면 미쳤다고 할 가격이다.

면세점에서 로얄샬루트 38년을 20병 사고도 남는다.

그것을 마시지도 않았다.

혹시 맛이 상했나, 변질됐나 싶었지만 직접 마셔보니 그것도 아니다.

그러고 문전박대를 당했다.

정말 어이가 없게도 고가의 선물을 가지고 가서 욕만 먹고 돌아온 것이다.

'그래, 내가 이기나 니가 이기나 해보자.'

그 윤청호 전무조차 이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도 돌이켜 보면 확실히 이유가 있었다.

치매가 걸린 게 아닌 이상 분명히 원하는 바가 있다.

누가 먼저 그 위스키를 찾아주냐의 싸움이다.

타닥, 탁!

원하는 대로 다 구해준다.

통장을 털어서 다 사버린다.

김종인의 눈동자가 이글이글 불타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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