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J로 산다는 것-831화 (831/846)

831화

1960년대.

한국의 술이 가장 맛이 없던 시기다.

<정부는 쌀 생산량의 안정을 위해 양곡관리법을 검토하기로…….>

양곡관리법이 시행되었기 때문이다.

국내 식량 사정을 이유로 쌀로 술 빚는 것을 금지했다.

타악!

이때부터였다.

소주와 막걸리에 쌀이 아닌 온갖 잡다한 게 들어가기 시작한 건 말이다.

고구마, 카사바, 당밀 등이 술의 원료가 되었다.

이는 현대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야, 야! 첫 잔 버려."

"알고 있어. 그러니까 흔드는 거잖아."

고등학교 3학년.

이신형은 친구들과 술자리를 가지고 있다.

들고 있는 소주병의 뒷부분을 팔꿈치로 세게 때린다.

그리고 흔들어서 회오리를 일으킨다.

가장 윗부분에 코르크 가루를 포함한 이물질들이 한데 모인다.

꼴꼴꼴~

그것을 땅에 버린다.

소주 첫 잔을 버리는 문화가 만들어진 이유이기도 하다.

"아 존나 맛없다."

"진짜 이 ㅈ같은 세상 잊으려고 먹는 거지."

"그거 알아?"

"엉?"

"몇 년 전까지는 소주가 존나 맛있었대."

"쌀로 만들어서?"

"어, 어!"

이신형과 친구들은 쌀로 만든 소주를 마셔본 적이 없다.

맛없어진 소주를 종이컵에 돌려 마시며 잡담을 깐다.

"옛날 소주 한번 마셔보고 싶네……."

"그냥 소주도 구하기 힘든데 그걸 어떻게 구하냐?"

"우리 아직 미성년자야 미친놈들아."

고구마와 당밀로 만들어진 소주는 맛이 크게 떨어졌다.

차후에는 남미의 고구마 '카사바'를 쓰고, MSG도 팍팍 무쳐서 먹을 만하게 만들지만 60년대에는 기술이 발달하지 못했다.

공업용 에탄올에 사카린을 섞은 맛.

도수도 30도에 육박하여 엄청나게 독하다.

정말 취하려고 억지로 먹는 수준이었다.

'나도 맛있는 것 좀 마셔보고 싶은데.'

친구들과 술을 마시던 신형은 욕심이 나게 된다.

자신들도 어른들처럼 좀 더 맛있는 것을 마셔보고 싶다.

"이번 수학여행 때 있잖아."

"소주 가져가게?"

"아니, 양주 한 병 쌔벼 오자."

"미친놈 크킄!"

마침 수학여행도 가깝다.

계획을 잘 세우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술장.

전시돼있는 위스키는 한 번쯤 마셔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이 시기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술맛을 깨달은 이신형과 친구들은 더욱 그랬다.

"누가?"

"이런 건 말한 사람이 해야지~"

"그럼 나 혼자 먹어도 되냐?"

"그건 에바참치고."

"아~ 진짜 먹고 싶은데 양주."

하지만 섣불리 시도할 수는 없다.

당시 사회는 훨씬 더 가부장적이었다.

가정에서 아버지의 존재는 절대적.

그야말로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다.

""가위, 바위, 보!!""

복불복으로 정하기로 했다.

가위바위보를 해서 지는 사람이 훔쳐온다.

"아……."

"아싸!"

"무르기 없기다 진짜?"

"할 수 없지."

자신이 되고 말았다.

친구들과 달리 집안이 유복하지 못하다.

그래도 양주 한 병쯤은.

'어차피 안 드시잖아?'

인형처럼 끌어안고 계신다.

마실 것도 아니면서 애지중지 쓰다듬는다.

어머니도 꼴사나워 하신다.

집에만 돌아오면 허구헌 날 술을 퍼마시냐고.

"야, 성공했냐?"

"가지고 왔지?"

"내가 누구?"

""이신형! 이신형! 이신형! 이신형! 이신형!""

그렇게 합리화를 하며 가지고 왔다.

수학여행 마지막 날 밤에 마실 계획을 세운다.

조교들에게 들키면 도로아미타불이다.

그때까지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

'내가 누구? 양주 오너!'

스스로 품위 유지에 노력을 하게 된다.

모범적으로 수학여행을 마치고 마지막 날 밤.

"캬~ 이거 쥑이네!"

"너무 독한데?"

"물 좀 타자 물 좀."

"가오가 있지 쌩으로 마셔. 그냥 이렇게 꿀떡꿀떡 넘기면 되지."

친구들과 마신 양주의 기억은 지금도 또렷하다.

귀한 것이라는 생각에 각 잡고 음미했다.

건포도와 초콜릿의 맛이었다.

'너무 어리고, 너무 어리석었지.'

잊고 지내던 과거.

위스키가 입에 들어가자 어두운 영화관의 스크린처럼 머릿속에 비춰진다.

당시 자신이 어떤 생각이었는지.

그리고 어떤 짓을 저질러버린 건지.

73살의 노쇠한 이신형은 떠올리게 되었다.

맛있는 술을 마시고 싶었던 건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에게 이 술은 굴비였어."

"네?"

"옛날 이야기 있지 않은가? 굴비를 천장에 매달아 놓고 밥 한 술에 굴비 한 번 쳐다보는 자린고비."

하지만 자식을 부양해야 했다.

당시 한국은 정말 아무것도 없는 나라였다.

6.25가 끝난 지 이제 겨우 10년이 흘렀다.

자신을 위한 사치는 용납되지 않았다.

"언젠가 숨통이 트였을 때, 양주 한잔할 날을 고대하며 하루하루를 버티셨던 거지."

"그렇군요."

"아버님 심정이 백분 이해가 갑니다."

"그 하나뿐인 희망을 내가 마셔버린 거야."

""…….""

그러던 나날.

귀한 양주를 선물받았다.

소주까지 맛없어진 시대에 그것이 얼마나 달아 보였을지.

'그래서 그 보리차를 마신 것이었어.'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애타는 속을 달랠 수 없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보리차지만, 아버지에게는 세상 그 무엇보다 특별한 양주였다.

자신이 그날의 기억을 잊어버렸듯, 아버지는 양주를 마신 걸로 치자고 생각하기로 했다.

풋고추의 매운맛으로 기억을 속였다.

꿀꺽!

처음으로 마셨던 양주.

50년을 격하여 다시 마시고 있다.

신형의 눈가는 이미 눈물을 논할 수준이 아니다.

흐느끼며 떨고 있다.

지금의 자신에게 있어서는 정말 줘도 안 마실 싸구려 위스키에 불과하니까.

"이따위 걸 그렇게 마시고 싶어하셨던 건가."

"아버지……."

"선생님……."

"나는 임종 마지막까지 이따위 것도 못 해드린 건가?"

""…….""

조니워커 레드라벨을 그토록 마시고 싶어하셨다.

하루에 한 번은 반드시 인형처럼 끌어안고 쓰다듬으셨다.

기억이라는 건, 추억이라는 건 결코 긍정적인 것만이 아니다.

때로는 잊는 것이 더 약일 때도 있는데.

"선생님."

"정환아, 정환아!"

"지금은 아니야, 지금은……!"

"말씀 중에 실례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 술을 준 당사자.

오정환이 덤덤하게 술병을 빼앗아 든다.

* * *

조니워커 레드라벨.

스카치 위스키계의 베스트셀러,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위스키다.

'흔하다는 뜻이기도 하지.'

그러다 보니 무시 받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현재의 기준이다.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다.

"당시에는 고급 스카치 위스키에 속했습니다."

"……."

"아무리 그래도 그건;;"

"정말입니다. 영국의 수상 윈스턴 처칠이 가장 좋아했던 위스키가 바로 이 조니워커 레드라벨이었으니까요."

조니워커하면 떠오르는 블루라벨.

출시된 지 고작 20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 이전까지는 종류가 그리 다양하지 못했다.

'레드, 블랙, 그리고 스윙. 딱 세 종류였어.'

당시 유행하던 뱃놀이에 적합한 보틀 디자인을 가진 스윙이 가장 고급 라인업이었다.

그 밑의 블랙과 레드도 결코 보급형 위스키는 아니었다.

"가장 밑이라고는 해도 서민이 마실 만큼 값싼 술은 아니었습니다."

"그, 그렇겠지! 2차 세계 대전의 영웅 처칠경이 좋아하셨다니."

"정환이 말이 맞네!"

확률이 33%라고 한 건 그래서다.

이 세 개 중 하나는 무조건 해당될 거라고 확신했다.

그렇게 된 상황.

하지만 분위기가 우중충하다.

두 대표가 열심히 장단을 맞춰주고 있다.

'그래도 이걸로는 부족하겠지.'

현시점에서는 싸구려라고 생각될 수밖에 없다.

조니워커 레드라벨이 고급술이었다고 하면 나 같아도 안 믿을 것이다.

"한번 천천히 맛을 봐주십시오."

"보고 있네."

"맥캘란처럼 꾸덕한 셰리의 맛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매, 맥캘란?!"

두 병을 가지고 온 당사자.

MJ 스튜디오의 김종인 씨가 깜짝 놀란다.

자신은 한 병에 천만 원을 주고 샀다.

그런데 겨우 레드라벨 따위가.

'구형 보틀이 그래서 재밌는 거지.'

물론 순수 셰리 위스키에 비할 바는 아니다.

블렌디드 위스키가 가진 한계가 있다.

하지만 명확하게 느껴진다.

셰리 특유의 건포도와 초콜릿맛이 혀끝을 감미롭게 감싼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간단하게 말씀드리자면 옛날에는 셰리 캐스크가 흔했을 뿐입니다."

"아!"

감정에 북받쳐 느낄 새가 없었다.

이신형 선생님이 뒤늦게 조니워커 레드라벨을 음미한다.

'흔하니까 블렌디드 위스키에도 쓴 거지.'

80년대 후반까지는 원액에 셰리 비중이 높았다.

90년대부터 점점 피티함을 강조하더니 흔히 알려진 조니워커로 변모했다.

조니워커는 시대별로 모을 때 가장 재미있는 위스키 브랜드 중 하나다.

그 시대상을 깨달은 이석현 씨가 손바닥을 타악 친다.

"그래서 그런 말을 했군."

"그런 말이라뇨?"

"너무 비싸다고 했잖아? 조니워커라면 당시 한국에서도 무리를 하면 구할 수 있는 가격이었겠지."

술집에서 그런 말을 했던 기억이 있다.

바에서 파는 위스키들은 비싸도 너무 비싸다.

아이러니하게도 가격이 힌트가 되었다.

사실 눈치는 꽤 이르게 채긴 했지만.

'본인이 만족하면 되겠지.'

아버지가 말없이 술잔을 기울이는 모습.

이민형 씨에게는 어떻게 비춰질지 모르겠다.

"더 마셔도 되는 거야?"

"당연히 안 되겠지만……."

"어떡하지? 마음에 드신 것 같은데."

"하루 정도는 숨을 돌리셔도 되겠죠. 담당의한테는 제가 말씀드려 놓겠습니다."

환자인 아버지의 몸이 걱정된다.

하지만 그와 동등하게, 어쩌면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게 마음이다.

'뭐, 우리가 알 필요는 없지.'

어떤 마음으로 저 위스키를 찾으셨는지.

이제 와서 마신다고 해결되는 것은 없을 것이다.

기분 탓일까.

표정이 온화하게 풀어졌다.

조니워커 레드라벨을 애틋하게 바라보고 계신다.

"나가죠."

"네."

"음."

"거기 당신도. 가지고 온 위스키는 급한 게 아니라면 MJ 스튜디오로 보내드리겠습니다."

"……."

혼자만의 시간을 방해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추억은 오직 그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기억이다.

문을 닫고 나간다.

비싼 위스키를 산더미처럼 사온 김종인 씨도 함께 말이다.

문지방을 넘으려던 찰나.

"정환이라고 했나?"

"네, 그렇습니다."

"쓸데없는 짓을 해줬어."

"……."

말을 걸어온다.

누구도 한 마디 말을 떼기 힘든 엄숙한 분위기.

"후후, 후후후……."

이신형 선생님만이 웃고 계시다.

접근하기 힘들었던 인상이 눈 녹듯이 사라져 있다.

동네에 한 명쯤 있을 법한 할아버지가 되셨다.

평범한 한 병의 술과 함께 말이다.

"조니워커 레드라벨을 내 인생 최고의 술로 만들어버리다니."

"인생 술이 꼭 비싸고 귀할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맞아, 맞는 말이야."

그제야 분위기가 풀린다.

두 대표도 안도의 한숨을 깊게 내뱉는다.

"아버지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

"선생님, 가보겠습니다."

"가, 가보겠습니다;;

발걸음을 가볍게 돌릴 수 있다.

노인을 홀로 두고 가는 것은 마음이 편찮지만, 대형 병원의 요양실인 만큼 별일은 없을 것이다.

나도 발걸음을 돌린다.

해야 할 일을 무사히 마쳤다.

그래도 만에 하나의 과음이 걱정되지 않을 수 없다.

"느긋하게 즐기시길 바랍니다. 조니워커 레드라벨의 1960년대 릴리즈는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술이니까요."

기우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