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2화
신규 오디션 프로그램.
<음정 좀 대충 맞추지 마요 CV 매스!!>
한 참가자가 심사위원들의 뭇매를 맞고 있다.
무대에 나와서 부른 노래가 못마땅했던 것이다.
<맞추고 불러요 맞추고! 솔직히 유리하다고 생각하죠?>
<네 헤헤.>
<그냥 아 유리하다고 대충 그렇게 부르면 못 이깁니다 이거 배틀!!!>
관중들은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인다.
방금 들은 노래.
누가 들어도 잘 불렀다고 할 수준이었다.
응당 그래야 한다.
CBS의 서바이벌형 오디션 프로그램 '자강두천'의 참가자는 모두 전·현직 가수들이다.
<그래도 잘 부르긴 잘 불렀어.>
<100%가 아닌 느낌?>
<너무 오랜만에 나와서 조절이 안 될 걸 수도 있고.>
프로그램의 닉값을 제대로 한다.
천재적인 가창력을 가진 가수들이 1 대 1 배틀을 펼치는 방식의 진행이다.
방금 전 나왔던 CV 매스.
한때 힙합계를 주름잡은 전설이다.
시간이 흘렀어도 클라스는 여전하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난 아직 너를 사랑해. 널 많이 사랑해. 나는 여기 그대로 서있는데…….>
하지만 과거의 명성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 프로그램에서 승부를 가를 수 있는 요인은 오직 실력뿐이다.
남자 심사위원이 고개를 쭉 내밀고 놀란 표정을 짓는다.
여자 심사위원은 음정에 맞춰 고개를 까딱댄다.
관중들도 입을 쩍 벌린 채 감탄하고 있다.
그녀의 노래가 듣는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방증이다.
<노래 정말 좋았어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결점이 있어요. 본인은 알고 계시나요?>
심사가 진행된다.
여느 서바이벌 프로그램들에서도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이다.
긴장감을 만드는 편집.
일부러 뜸을 들인 다음에 별 시답잖은 이야기를 꺼낸다.
<경력이 하나도 없어요.>
<어? 없나요?>
<인디 가수로 활동 중이시죠? 방송 나오는 건 처음이고.>
<네, 맞습니다.>
<이 위대한 천재를 처음 알아보는 영광을 제가 가져갈 것 같네요.>
관중석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온다.
클리셰격이지만 그렇기에 더 가슴을 조리게 만든다.
「그녀의 목에 걸리는 합격 목걸이!」
익숙한 자막과 함께 승자조로 향한다.
패배한 CV 매스는 패자 부활전이 기다리는 패자조로 간다.
<바이브가 예술이야.>
<몸에 무슨 진동 내는 기관이라도 있나?>
<저런 건 그냥 재능이에요. 나도 전성기 때나 저런 거 했어.>
참가자들이 떠난 직후.
심사위원들이 솔직한 감상을 토로한다.
지금까지 나온 가수 중 가장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확실히 날카롭네.'
가요계의 레전드들일 만도 하다.
평소였으면 저런 것도 짜고 치는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오늘만큼은 인정한다.
딩동♪
손님이 올 시간이다.
준비도 다 해놓은 만큼 천천히 나가서 맞이하면 된다.
"왔어?"
"……."
"맛있는 거 해놨거든. 배고프지?"
촬영을 끝낸 가을이 찾아온다.
방금 전 봤던 건 지난주에 촬영되었던 것이다.
이번 주 건 오늘 밤에 송출된다.
오늘 찍은 건 다음 주 촬영 분량이라고 한다.
'힘들겠지.'
노래라는 것이 당연히 쉽지가 않다.
일반인도 노래방 때리고 오면 기진맥진해진다.
가수들은 더할 수밖에 없다,
창법도 신경 쓰고, 노래 난이도도 훨씬 높고, 무엇보다 공연이다.
"한국인은 밥심이잖아. 여러 가지 고민해봤는데 정도가 최고더라."
"……."
"된장찌개랑 잡곡밥. 부드러운 갈비랑 쌈 채소도 준비했다. 아, 간은 일부러 심심하게 했다?"
심적으로 더 부담이 된다.
기력 소모가 장난 아니라는 것 정도는 당연히 알고 있다.
'굉장히 어려운 직업이지.'
다른 여자들에게 익히 들은 바가 있다.
특히 여가수는 몸매 관리 때문에 밥도 제대로 못 먹는다.
단순히 양뿐만 아니라 식단.
혹시 모를 붓기를 생각해 촬영 전에는 입에 대지도 않는다.
악으로 깡으로 불러야 한다.
그나마 위안이 있다면 이렇게 방송 후에 포식하는 것이다.
"많이 먹어."
"……."
"나는 자기가 먹는 모습만 봐도 행복해. 오늘 촬영도 좋았다며? 아~ 대표님한테 들은 거야."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내가 확실하게 책임져줄 수 있다.
포만감도 높고 칼로리도 낮은 맞춤형 식단.
'우리 봄이한테도 맨날 해주는 건데.'
솔직히 쉽지는 않다.
요리 실력과는 별개로 조리법이 까다롭기 때문이다.
어레인지.
맛없는 음식을 최대한 맛있게 먹기 위해서는 모든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
정말 사랑이 있기에 가능하다.
가을도 피곤한지 말은 안 해도 맛있게 먹고 있다.
"일부러 뼈는 빼놨어. 바르기 귀찮을 것 같아서."
"……."
"정답이지? 내가 한 세심해. 야채도 원기 회복에 도움되는 거니까 편식하지 말고 먹어."
배를 채우고 휴식을 취하면 될 것이다.
가을이 식사를 마치기 전에 자리에서 먼저 일어난다.
딸칵!
파티를 준비해 놓는다.
연인 간에 만났는데 정말 밥만 먹으면 서운할 노릇이다.
꼴꼴꼴~
브랜디를 따른다.
까뮤 트레디션.
잔에 담아서 브랜디 워머를 이용해 데운다.
과학실 램프 같은 것이다.
양초 딱 하나 분량으로 화력이 너무 약해 보일 수 있지만.
'딱 이 정도면 돼.'
브랜디는 따듯하게 온도를 올려서 마시는 술이다.
약한 화력으로도 충분하다.
브랜디가 증발하며 방향제 효과도 낸다.
고급 꼬냑이다 보니 향기가 끝내준다.
"다 먹었어?"
"……."
"별건 아니고 한잔하자고. 가볍게 브랜디로 시작하자."
연인한테 해주면 반드시 성공하는 이벤트.
한 잔의 브랜디가 몸을 데워준다.
뽀옹!
다음은 샴페인이다.
열량을 생각해 달콤하지 않은 브뤼로 선택했다.
"치즈랑 같이 먹으면 맛있어."
"……."
"샴페인의 미약한 단맛을 살려준다고 해야 하나? 가볍게 꽁떼부터 먹어봐."
부드럽고 고소한 우유맛이 난다.
딱딱한 외피가 별미로 입에서 씹을수록 깊은 맛이 우러난다.
꿀꺽!
샴페인과 마셔도 잘 어울린다.
기본적으로 호불호가 안 갈리고 누구나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치즈다.
'자극적인 걸 원하면 랑그르랑 샤우르스로.'
각각 짠맛과 신맛이 강하다.
둘 다 프랑스 북부 샹파뉴 지방의 치즈로, 같은 지역에 생산되는 샴페인과 마리아주를 이룬다.
"그, 그만."
"응?"
"음식은 됐으니까 이거나 빨리 어떻게 해……."
그녀를 위해 준비한 코스.
먹지는 않고 헛소리를 하며 다리를 꼼지락거리고 있다.
"안주로 그거 먹을래, 치즈 먹을래?"
"…이 X발 새끼."
"닥치고 먹어."
손으로 집어서 먹여준다.
입을 꾹 다물고 완강히 거부하면 어쩔 수 없다.
우물우물
직접 씹어서 넣어준다.
굳게 닫힌 입술을 혀를 비집어 넣어 열어버린다.
한 번 먹기 시작하자 잘 먹는다.
먹이다 보니 어느새 그냥 키스가 된다.
위이잉~
가을의 입술을 먹으며 꼭 안아준다.
오늘 하루 힘들었을 그녀를 위로한다.
많이 힘들었던 모양이다.
눈물을 찔끔 흘리며 몸을 부르르 떨어댄다.
버둥거리기까지 한다.
더욱 꽉 끌어안고 잦아질 때까지 키스를 나눈다.
"개새끼야……!!"
"뭐라고?"
"으익!"
"착하지. 오빠 말 잘 들어야지."
반항심이 조금 있다.
가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진정시킨다.
'성능 확실하구만.'
특별히 주문 제작한 장난감을 쓰고 있다.
기성품과는 비교도 안 되게 탁월하다.
위이잉~!
이걸 참고 있는 가을도 대단하다.
다른 애들이었으면 벌써 가서 기진맥진해 누워있을 것이다.
"너가 하란 대로 했다고."
"잘했어."
"이, 이제 됐잖아. 노래 부를 때도 얼마나 떨렸는데."
가을의 고고한 자존심.
슬슬 떨어지기 직전이다.
약해진 목소리로 속삭여온다.
약속을 했다.
이걸 가지고 갔다 와서도 애걸을 안 하면 더 이상 장난을 치지 않기로 말이다.
진즉에 실패했다.
하지만 자존심 때문에 올 때마다 먼저 말을 꺼내는 걸 주저하고 있다.
"빠, 빨리 해!"
"어허. 모든 일에는 순서라는 게 있는 법인데."
"이 새끼가 지 말 다 들어주니까 우쭐해 가지고."
"어라?"
올 때마다 애태우며 놀아주고 있다.
마음 깊은 곳에서 복종심이 생기게 만든다.
'여자가……, 말대꾸?'
만신 김성모 선생님이라면 절대 용납하지 않을 상황이다.
나도 같은 생각이다.
입가로 침을 질질 흘린다.
그녀답지 않은 칠칠치 못한 모습이 흥분을 더한다.
세상천지에 그녀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나뿐이다.
소유욕과 정복감, 모든 것이 채워지고 있다.
"잘 먹었습니다."
"개새끼야아앙……."
"아직도 반항하네? 진짜 길들이는 맛이 있다니까."
힘이 쭉 빠진 가을을 쓰다듬어준다.
그녀는 빼도 박도 못하게 내 것이 되어있다.
"하나만 가르쳐주면 안 돼?"
"뭐가?"
"왜 이렇게 집착하는 거야. 내가 너 사랑하는 거 알면서."
그 이유.
가을에게는 밝혀도 될 것만 같다.
* * *
누군가 듣는다면 미친놈 취급할 것이다.
하지만 그녀이기에 터놓고 말할 수가 있다.
"그걸 믿으라고?"
"믿어줘."
"믿을게.'
과거로 돌아온 것.
지금까지 있었던 이야기.
풀려면 하루 이틀로는 어림도 없다.
설사 듣는다고 해도 납득하는 것은 별개다.
취해서 헛소리를 한다고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다.
그녀는 이해해주고 있다.
귀찮아서 고개를 끄덕이는 게 아니라는 건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심각히 또라이가 되긴 했더라."
"그편이 효율적이었어."
"변명은 X발."
"……."
대신 입술을 맞춘다.
빨면 빨수록 서로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한다는 느낌이 든다.
'이렇게 사랑해도.'
10년이 넘는 기간 껴안고 있던 불안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건 아니다.
가을이 내 것이었으면 좋겠다.
"어떻게 해야 마음이 놓여? 이제 할 만큼 했잖아."
"일단 그거 없이 못 살게 만든 다음, 전신 개발하고, 목줄 매서 애완동물처럼 키울 거야. 타투는 반드시."
"안 뒤지고 뭐 해?"
스스로 생각해도 집착이 엄청나다.
이미 개발할 만큼 개발했음에도 말이다.
다음 날.
산책을 나온다.
이날을 위해 봉고차를 한 대 사뒀다.
'혹시 또 모르니까.'
차를 보고 알아볼 수도 있다.
안전한 일탈을 위해 여러 가지 준비를 했다.
드르륵~
가을이 문을 열고 나온다.
수건으로 몸을 가린 채 조심히 바닥을 밟는다.
"춥지?"
"……."
"네 발로 안 다녀도 되니까 오늘은 천천히 경험만 하자."
그래도 부츠는 신게 해줬다.
따듯한 재질이라 발은 보온이 될 것이다.
"몸 가리지 마."
"……."
"똑바로 걸어가. 이 주위 한 바퀴 돌 거니까."
목줄을 잡고 산책을 다닌다.
주위는 온통 나무와 떨어진 나뭇잎뿐이다.
첩첩산중이다.
길조차 나있지 않은 미개발된 자연을 걷고 있다.
'내 사유지라서.'
플레이를 할 때 필요할 거 같아서 계약했다.
근처에 도시나 관광지도 없다.
민가가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사람이 오지 않는다.
놀기에 최적화.
"이 개새끼."
"지금 개는 너 같은데?"
아직이다.
완전히 떨어진 건 아니다.
가을의 손을 당겨 일으켜 세워준다.
강한 척하고 있지만 덜덜 떨고 있다.
만지작거리며 왔던 길로 돌아가려던 찰나.
"자네들, 여기서 뭐 하나?"
""…….""
할아버지 한 분과 마주친다.
가을이 아무 말도 못 하고 꽁꽁 얼어붙는다.
"여자친구가 등산을 좋아하거든요."
"그 상태로?"
"이게 자연욕이라고. 피부로 산 기운을 받는 거예요."
등산복이 아니다.
평상복이고, 산길이 익숙한 걸로 미루어봐 근처 주민인 걸로 추정된다.
'나이도 있어 보이시고.'
백발이 성성하시다.
저렇게 가벼운 차림으로 첩첩산중에 등산 오시진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쯔쯧."
"예……."
"젊은 처자가 그러면 못 써. 수치심이라는 게 있어야지."
한마디 하시고 갈 길을 가신다.
할아버지가 멀어지는 모습을 본다.
"또라이 새끼야아……!!"
"괜찮아. 하지도 못할 나이신데."
반사적으로 얼굴을 가렸다.
나도 선글라스와 모자를 쓰고 있다.
'이 몸이라면 또 모르지만.'
남자의 로망이란 로망을 다 담은 X스머신이다.
말년에 좋은 구경 하셨다.
봉고차로 돌아가서 몸을 녹여준다.
뒤쪽을 침대처럼 개조해 놔서 누울 수 있다.
"사랑해."
"쓰레기."
"그래도 재밌었지?"
"몰라!"
가슴이 엄청 콩닥댄다.
싫으면 싫다고 확실하게 말하는 게 가을이다.
'시간은 좀 걸릴 거 같은데.'
워낙 드세다.
지금도 내 사정을 듣고 맞춰주고 있는 거지 마음이 굴복한 건 아니다.
하지만 첫 단추가 끼워졌다.
조금씩 잠식해 가면 된다.
시간은 얼마든지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