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2.2
세아는 객실로 돌아와 한숨을 내쉬었다. 한마디라도 더 해 달라, 여길 보고 웃어 달라, 인류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 달라……. 쏟아지는 요구를 뒤로하고 허둥지둥 돌아온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상황 정리가 절실했다.
아까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히든 퀘스트 상세 창을 다시 열었다. 내용은 변함없었다.
[히든 퀘스트 : 시스템 살해
히든 퀘스트 획득 조건 : 죽음
클리어 조건 : ???
클리어 실패 페널티: 회귀]
상황은 간단했다. 세아는 각성 직후부터 히든 퀘스트를 하나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히든 퀘스트의 상세 내용을 획득하는 방법을 몰랐다. 모를 수밖에 없었다, 획득 조건이 ‘죽음’이니까! 뭐, 여기까진 다 좋다.
세아는 윤이 나는 테이블에 앉아 명상에 잠기듯 생각을 이어 갔다.
자신의 히든 퀘스트는 ‘시스템 살해.’ 이해하고 싶지 않았으나 바로 이해가 갔다. 갑자기 나타난 던전, 몬스터, 시스템 창, 스킬과 등급……. 이 모든 것은 불가사의한 시스템 때문에 생겨났다. 세아의 히든 퀘스트는 ‘이 시스템 자체를 살해하는 것’이다.
즉, 세계의 회복. 세상을 이전의 모습으로 돌려놓는 것.
“퀘스트 클리어 조건도 제대로 표시 안 되어 있네. 이건 또 어떻게 알아내야 해?”
세아는 혼자 막막하게 중얼거렸다.
한 번 죽어서 히든 퀘스트의 상세 내용을 얻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클리어 실패 시 자신은 계속해서 회귀하게 된다. 시스템이 비상식적인 건 알았지만 이건 너무 심하지 않은가. 자신에겐 안식할 자유도 없단 말인가.
‘안 죽은 데다 젊어지기까지 해서 손해 본 건 아니지만.’
세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일어나 거울 앞에 섰다.
스물네 살에 각성하여 15년을 지내고 죽었다. 10년 전으로 돌아왔으니 자신은 현재 스물아홉 살. 죽음을 앞둔 시점 거울을 봤을 때와는 얼굴이 무척 달랐다. 어디가 다른지 짚어 낼 순 없지만 훨씬 덜 지친, 명랑하고 맑은 인상이었다.
‘내 얼굴이 이랬나.’
멍하게 생각하다가 퍼뜩 정신이 들었다. 일단 돌아왔으니, 히든 퀘스트를 완수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 돌아온 직후에는 똥 밟은 것 같았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쁜 일만도 아니었다.
시스템을 죽이면 던전도, 몬스터도 사라진다. 사람들도 더는 몬스터에게 죽지 않을 것이다. 몬스터는 사람을 찢고 녹이고 돌로 만들고 터뜨리고 자르고 합성하고…….
아니, 이런 생각은 그만하자. 세아는 한숨을 내쉬고 혼잣말을 했다.
“그래, 역시 서른아홉 살에 죽는 건 너무 아쉬웠어.”
누릴 건 다 누렸지만.
세아는 새삼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금은 객실에 머물고 있지만 집이 없는 건 아니다. 최고의 집이 있고, 세계 곳곳에 별장도 있다. 자기 소유의 전용기도, 요트도, 파티장도 있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건 전부 가졌다.
어딜 가든 사람들이 얼굴을 알아보고 허리를 숙이고, 눈치를 살피며 비위를 맞춰 준다. 사랑도 퍼부어 준다. 시스템이 사라지면 이 모든 것도 잃게 될까. 아마 그럴 가능성이 크리라.
세아가 쌓은 막대한 부와 명예는 모두 S급 헌터의 능력 덕이었다. 몬스터를 분쇄하고 던전을 손쉽게 공략하는 능력은 물론 위대하지만 이것도 순전히 우연과 운으로 얻은 것이다.
시스템이 사라지면 S급 헌터 이세아는 평범한 일반인 이세아로 돌아간다.
“그래도 서른아홉에 죽지는 않겠지.”
세아는 일단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더 고민해도 답이 안 나올 문제였다. 어쩌겠는가, 운명이 이러한 것을.
‘돈이 부족하면 그냥 가진 재산 팔아서 아껴 가며 살아야겠다. 별장만 몇 개 팔아도 평생 먹고 살겠지.’
첫 번째 목표가 정해졌다. 히든 퀘스트 클리어 조건을 알아내야 한다.
2.3
“씨발, 못 알아냈어.”
마흔 살, 세아는 또 침대에 누워서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미래는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호텔 창문 밖에 기자와 팬이 야경의 일부가 되어 서 있다. 10년 동안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클리어 조건을 알아내지 못했다. 친분 있는 S급 헌터 몇과 영향력 있는 길드, 협회에도 도움을 요청했지만 소득이 없었다.
정보를 모조리 공개할 수 없는 상황도 세아의 발목을 잡았다. 히든 퀘스트의 페널티, ‘회귀’를 공개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미래의 일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사람들이 어떻게 변할지 예측할 수가 없었다.
결국 아무 성과 없이 이번 생도 끝나 간다.
“이러면 또 돌아가나?”
혼잣말을 한 순간, 세아의 생명이 끝을 알렸고 또 시작을 알렸다. 이번에도 폭력적인 플래시가 터지는, 재앙 발발 5주년 인터뷰장 한가운데였다.
3.1
다시 10년 후.
“진짜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
이번 생에서도 세아는 퀘스트 클리어 조건을 알아내지 못했다. 운명은 그녀를 또 같은 객실, 같은 침대로 인도했다. 이상하게 죽음은 항상 여기서 맞이하는 것 같아. 세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잠과도 같은 죽음이 찾아왔고 그녀는 또 지긋지긋한 인터뷰장에서 눈을 떴다.
4.1
10년 후.
“으아아! 제발 이러지 말라고!”
세아는 마흔이라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침대에서 마구 발버둥을 쳤다. 그리고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존재를 향해 푸념을 늘어놓았다.
“아, 솔직히 히든 퀘스트 보고 좀 아깝긴 했거든요? 시스템 죽이면 지금까지 누리는 거 다 포기해야 되잖아요. 이제 아까워하지 않을 테니까 제발 클리어 조건 좀 알려 달라고!”
죽음, 또 삶.
5.1
“재앙 이후 안정을 찾기 위해 활약하셨는데 이에 대해 소감 한 말씀 해 주시죠!”
“지겨워요.”
다시 돌아온 세아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툭 내뱉었다. 그녀의 한 마디에 인터뷰 회장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그러든 말든 이제 세아는 관심도 없었다.
너무 힘들어서 죽어 버릴 것 같았다. 분이 끓어오르고, 자기가 무슨 죄를 지어 이러고 있어야 하는지 몰라 억울해 미칠 지경이었다.
“세아야, 너 왜 그래?”
옆자리에 앉아 있던 S급 헌터, 김현호가 세아의 팔을 툭 치며 속삭였다. 그러나 세아는 벌떡 일어나 나가 버렸다. 부적절한 행동인 건 알고 내일 무슨 기사가 날지 상상이 가지만, 여기 더 앉아 있다간 비명을 지를 것 같았다.
과연 기자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어떤 점 때문인지 말씀해 주시죠!”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앞으로의 활동 계획은……!”
“저기요.”
세아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녀가 목소리를 낮추자 모두가 찬물을 맞은 듯 입을 다물었다.
“좀 지나갈게요.”
대단한 위협도 아니었는데 순간 사람들이 양편으로 쫙 갈라졌다. 그녀의 팬클럽은 눈물을 글썽거리며 고요 속에서 “언니, 힘내요! 우리가 응원해요!”라고 외쳤다. 세아는 예의상 그쪽으로 손만 흔들어 주었다.
인터뷰장을 이런 식으로 빠져나온 건 처음이다. 뒤에서 현호와 다른 헌터들이 이 상황을 수습하려고 애쓰는 소리가 들렸다. 너무 지쳐서 미안한 마음도 들지 않았다.
또각, 또각, 건물 로비로 내려오니 구두 소리가 선명했다. 행사가 진행 중이라 로비는 조용했다. 세아는 손이라도 찬물에 적시고 정신을 차릴 요량으로 화장실로 향했다.
통로로 들어가는데 툭, 누군가와 어깨가 부딪쳤다.
“죄송합니다.”
간단히 중얼거리고 여자 화장실로 방향을 트는 순간 일렁이는 글자가 눈앞으로 튀어나왔다. 세아는 세면대 앞에 서서 허리를 굽히며 대강 글자를 읽었다.
[히든 퀘스트 클리어 조건 획득! 지정인(정이준, 각성 등급: ?)과 접촉 후 협력하여 시스템 보스 던전 완전 공략.]
솨, 물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화장실에는 세아 뿐이었다. 세아는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글자를 멍하게 읽고 또 읽었다.
왜 갑자기 클리어 조건을 획득했을까. 지정인과 접촉 후 협력하여 시스템 보스 던전 완전 공략…….
세아는 홱 몸을 돌려 화장실 밖으로 뛰어나갔다. 아까 부딪친 남자는 분명 남자 화장실로 들어갔다. 이 지긋지긋한 회귀를 끝낼 수 있다는 생각에 세아는 앞뒤 가리지 않고 남자가 사라진 방향으로 돌진했다.
철벅, 철벅, 대걸레로 바닥을 닦는 키 큰 남자가 보였다. 대걸레 자루를 쥔 손은 단단했고, 긴 손가락은 마디가 도드라졌다. 세아는 숨까지 멈추고 남자를 바라보았다. 인기척을 느낀 남자가 고개를 들 때까지.
눈이 마주쳤다. 세아는 한 손으로 절벽에 매달린 심정으로 물었다.
“정이준?”
갑작스러운 질문에 남자가 한참을 침묵했다. 세아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그의 입술만 계속 바라보았다. 남자가 낮고 작은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
“여기 남자 화장실인데요.”
무시무시한 침묵이 흘렀고, 둘 사이로 물소리가 끼어들었다. 남자는 세아의 어깨 너머를 바라보더니 또 덧붙였다.
“혹시 세면대 물 안 끄셨어요?”
세아는 대답 대신 남자의 목에 걸린 사원증을 확인했다. 경직된 표정으로 찍은 증명사진과 그 아래 선명히 박힌 이름 세 글자, 정이준.
“하하. 하하하! 으하하하하!”
세아는 참지 못하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여기 있었다니, 이거였다니, 이걸 몰라서 몇 번이나 다시 살아야 했다니! 달려들어 정이준을 얼싸안고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정이준은 미친 사람을 보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을 뿐이었지만.
“반가워요. 진짜 정말 반가워요!”
S급 헌터 이세아와 청소부 정이준의 첫 만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