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5.2
정이준의 삶은 기구했다.
재앙을 겪으며 파산한 집도 많지만 그의 가족은 그 전부터 파산 상태였다. 그리고 재앙 발발 후에는 더 심한 파산 상태로 굴러떨어졌다.
생계를 책임지던 부모님은 모두 돌아가셨고, 이준은 생계 최전선으로 떠밀렸다. 각성자가 나타나며 빈부의 격차는 더 극심해졌고, 대우 좋은 일자리는 각성자에게 주어졌다. 이준은 일반인과 다를 바 없는 F급으로라도 각성하길 바랐지만 꿈은 꿈에 그쳤다.
닥치는 대로 일했다. 몸을 많이 썼고 시간은 더 많이 썼다. 책임질 형제가 없다는 건 다행인 동시에 불행이었다. 의지할 사람이라도 있었다면 견디기가 쉬웠을 것이다.
각성도 못 했고, 궁핍하고, 뒤를 봐줄 각성자도 없다. 정이준의 삶은 고생과 모욕의 연속이었다. 재앙 발발 후 5년 동안 그는 온갖 불평등과 치욕에 시달려야 했다.
그런 그의 앞에 나타난 S급 헌터.
“나랑 같이 좀 가요. 꼭 할 말이 있어요.”
처음에는 미친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녀의 왼쪽 가슴에 꽂힌 검은 배지. 알파벳 S를 용이 날아오르는 모양으로 형상화한 배지가 그녀의 등급을 증명했다.
“무슨 할 말이요?”
이준은 대걸레 자루를 꽉 움켜쥐며 방어적으로 되물었다. 세계에 열두 명뿐인 S급을 만난 건 처음이다. 하지만 이제껏 만난 각성자와 크게 다를 것 같진 않았다. 그들은 미각성자에 가난하기까지 한 이준을 벌레처럼 짓밟고 모욕하기 일쑤였다.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더니 안심시키려는 듯 싱긋 웃었다. 물론 이준은 별로 안심하지 못했다.
“남자 화장실에서 할 얘기는 아닌 것 같은데요. 나쁜 짓 하지 않을 테니 따라와 줄래요?”
“저 지금 근무 시간이라서요.”
“아, 그렇구나. 잠깐만요.”
세아는 핸드폰을 들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비서나 그 비슷한 사람과 통화하는 듯했다. 그러면서도 이준에 대해 지시하는 세아의 표정은 시종일관 여유롭고 느긋했다. 통화 중에도 흘끗 이준을 곁눈질하며 안심하라는 손짓을 하기도 했다.
“자, 이제 됐어요. 근무는 걱정하지 말아요. 방금 정이준 씨 근로 계약서가 저한테로 옮겨 왔거든요.”
“네?”
너무 황당해서 화도 나지 않았다. 이 호텔은 국내 최고의 시설로, 월급도 그만큼 많았다. 청소부 하나 뽑을 때도 조건이 까다로워서 이준은 태어나 처음으로 공식적인 ‘외모 평가’까지 받고 이 자리를 얻었다.
그런데 방금 이 일자리를 잃었다니? S급의 위세가 대단한 건 알았지만, 이렇게 제멋대로…….
“월급은 이 정도로 다시 조정해 줄게요.”
그렇게 말하며 세아는 네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그녀가 제시한 액수에 이준의 얼굴이 멍해졌다. 손가락 네 개의 의미가 무엇일까, 4백? 아니면 4천? 어느 쪽이든 태어나 한 번도 저만한 돈을 한 번에 받아 본 적이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을 시키려고?
“아, 너무 부족한가? 그럼 이만큼.”
이준의 표정을 오해한 세아가 접었던 엄지까지 모두 펼쳤다. 이준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생체 실험은 아니죠?”
“하하, 당연히 아니죠. 그럼 어서 가요.”
그날, 정이준은 청소부에서 S급 헌터의 피고용인이 되었다.
5.3
세아가 머무는 호텔은 그야말로 호화찬란했다. 까마득히 높은 천장과 진귀한 던전 아이템, 홀을 은은하게 울리는 음악까지. 세아는 모든 게 처음이라 주눅이 든 이준을 자연스럽게 이끌었다.
“아, 그 엘리베이터 아니에요.”
세아가 일반 엘리베이터 앞에서 멈칫한 이준을 향해 그렇게 말했다. 이준은 잰걸음으로 세아에게 다가오는 남자를 보았다. 말끔하게 차려 입은 남자가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바로 올라가십니까? 필요한 게 있으신가요?”
“아뇨, 이 사람이랑 같이 올라갈 거예요. 내 동행인이니까 앞으로 얼굴 기억해 둬요.”
“물론입니다. 두 분 모시겠습니다.”
S급은 전용 엘리베이터도 따로 있는 모양이었다. 세계에 열두 명밖에 없는데 엘리베이터를 따로 만드는 짓을 할 필요가 있나. 이준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엘리베이터로 들어서니 세아가 손가락을 센서에 가져다 댔다. 층을 누르지도 않았는데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세아는 한 층을 통째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녀가 객실 문을 여는 걸 보며 이준은 쭈뼛쭈뼛 망설였다.
이런 곳이 있는 줄도 모르고 살다가 갑자기 주인처럼 들어오니, 식은땀이 나고 괜히 초조했다. 거대한 호텔, 높은 천장, 깨끗한 벽이 동시에 자기를 짓누르는 듯 마음이 위축되었다.
“왜 그래요? 들어와요.”
“아……. 네.”
세아는 가방을 침대에 던지고 외투를 벗어 의자에 걸어 놓았다. 그런 다음 이준을 거실 가운데 테이블로 안내했다. 주방으로 걸어가며 그녀가 물었다.
“물이 좋아요? 아니면 술?”
“네? 전 괜찮습니다.”
“그래요, 그럼 물 마셔요.”
A급만 되어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사람을 부리던데……. 의외로 소탈한 성격인지도 모르겠다. 이준은 긴장을 떨치려 이런저런 생각을 주워섬겼다.
곧 세아가 컵을 들고 돌아왔다. 하나는 이준 앞에, 하나는 자기 앞에 놓고 그녀가 맞은편에 앉았다. 이준은 공연히 긴장하여 허리를 곧추세웠다.
“자, 그럼 정이준 씨. 소개가 늦었네요. 제 이름은 이세아, 나이는 서른…… 아니, 스물아홉, S급 헌터입니다. 갑자기 이렇게 데려와서 놀라지는 않았나 모르겠네요.”
“네…….”
“제가 정이준 씨를 고용한 건…….”
이준은 마른침을 삼키며 그녀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S급 헌터가 뭐가 아쉬워 청소부를 고용한단 말인가. 객실 청소는 호텔에서 다 할 텐데. 아니면 던전에서 인간 방패로 삼으려고? 아니, S급 헌터는 인간 방패 따위 필요 없을 것이다.
“내 히든 퀘스트 클리어에 정이준 씨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소리에 이준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세아는 조금 웃었다. 앳되고 뽀얀 얼굴을 하고 아이처럼 입을 벌리니 이준의 미모가 한층 돋보였다. 이 까다로운 호텔에서 왜 그를 청소부로 뽑았는지 짐작이 갔다.
“내 히든 퀘스트를 클리어하기 위해서는 정이준 씨와 협력하여 시스템 보스 던전을 완전히 공략해야 해요. 어떤 방식으로 협력할지는 시스템이 정해 주지 않았습니다.”
“시스템 보스 던전이요?”
“아, 그게 어딘지는 아직 몰라요. 아직 발견되지 않은 던전일 텐데, 차차 알아보면 되니까 정이준 씨가 걱정할 문제는 아닙니다.”
“그럼 전 뭘 해야 하는 건가요?”
세아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녀는 이준 쪽으로 두 손을 내밀었다. 하얗고 고운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이준은 혼란에 잠겼다. 어깨를 경직시키고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를 보며 세아가 물었다.
“미각성자죠?”
“네…….”
“날 도와주려면 일단 각성부터 해야죠. 내 손 잡아요.”
“네?”
바보처럼 보일 걸 알고도 똑같은 말로 되묻고 말았다. 각성이라니, 어떻게? 지금 여기서?
각성 주사가 있다는 걸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각성할 때까지 주기적으로 맞아야 하는 데다 무척 비싸고, 각성에 성공한다 해도 어떤 등급으로 각성할지는 알 수 없었다. 이준도 몇 번 기웃거리다가 비용과 가능성 문제로 포기했다. 주사를 놓으려는 건가.
이준은 머뭇거리며 세아의 손 위에 자기 손을 겹쳤다. 세아가 지그시 눈을 감더니 그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 순간, 갑자기 심장이 거세게 요동치더니 속이 울렁거렸다. 바닥이 핑핑 돌고 귀를 찢는 이명이 울리며 순간 머리가 균형을 잃고 홱 돌아갔다. 온몸의 피가 끓어오르는 듯 뜨거워졌다.
정이준의 눈앞에 마침내 시스템 창이 나타났다.
[정이준. 24세. 각성 등급 B.]
믿을 수가 없었다. 이준은 처음 보는 시스템 창에 넋을 빼앗긴 듯 글자를 읽고 또 읽기만 했다. 곧 글자가 사라지고 다른 문장이 나타났다.
[스킬을 개방합니다. 치유, 스킬 등급 C. 발동어 치유.]
[스킬을 개방합니다. 고속 이동, 스킬 등급 A. 발동어 없음.]
그때, 세아가 이준의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 손가락 끝으로 건드리는 느낌에 이준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세아는 기대감 어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곧 그녀가 비밀 이야기라도 하는 듯 속삭였다.
“다른 S급 헌터들도 모르는 스킬이에요. 강제 각성. 다른 사람한테는 비밀로 해야 해요. 알겠죠? 알려지면 이 사람 저 사람 달려들 텐데 횟수가 제한되어 있어서.”
“아, 네…….”
횟수 제한도 있는 귀한 스킬을 자신에게 사용했단 말인가. 왜, ‘시스템 살해’를 위해서? 하지만 세아야말로 그 시스템의 최대 수혜자가 아닌가. 이준은 의문을 품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무슨 등급이에요?”
“B 등급이라고 나왔습니다.”
“아, 괜찮네요.”
“던전에 들어가기엔 너무 낮지 않을까요?”
게다가 처음 개방된 스킬이 치유와 고속 이동이다. 전투에 도움이 될 것 같진 않았다. 그의 물음에 세아가 픽 웃었다.
“내가 S급이니까 괜찮아요. 정이준 씨는 따라오기만 하면 되니까.”
내뱉는 말에 자신감이 스며 있었다.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말하는 그녀를, 이준은 망연히 바라보았다. 세아가 뿜는 기세는 그가 늘 동경해 온 것이었다. S급이 되면 모두 저렇게 되는 것일까, 태어나 한 번도 남에게 고개 숙여본 일 없는 듯한 저 태도.
“그럼 오늘은 센터로 가서 각성자 등록을 하고 와요. 신분증도 새로 받아야 하고 지급하는 아이템도 있으니까. 난 시스템 보스 던전이 뭔지부터 알아볼게요.”
“네, 알겠습니다.”
명령도 지시도 너무나 자연스럽다. 이준은 바로 몸을 일으켰다. 상황이 너무 급변하여 얼떨떨하지만 변하지 않는 사실은 이 사람이 자기 고용주라는 점.
“아, 잠시만요. 이거 가져가요.”
세아가 지갑에서 카드를 한 장 꺼냈다. 흠집 하나 없이 매끈한 검정 카드였다. 이준은 두 손으로 카드를 받아 들었다. 세아는 무척 기분이 좋은 듯 너그럽게 덧붙였다.
“센터 가서 등록하고, 돌아오는 길에 쇼핑도 좀 하고 필요한 아이템 보이면 그것도 사요. 아래 내 차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어디든 원하는 곳으로 데려다줄 거예요.”
곧 그녀가 일어나서 불쑥 손을 내밀었다. 당황하여 악수에 응하는 이준을 보며 그녀가 한껏 미소 지었다.
“나타나 줘서 고마워요, 정이준 씨. 내가 당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를 겁니다.”
무슨 소린지 알아듣지 못했지만 이준은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객실 밖으로 나오는데, 손에 든 카드가 유난히 묵직하게 느껴졌다. 그는 대기하고 있던 차에 올랐고, 곧 낯선 풍경이 차창 밖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