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급의 히든 퀘스트-4화 (4/112)

4화.

5.4

세아는 맨몸으로 날아갈 수도 있을 듯했다.

드디어 찾았다. 드디어. 세상에, 이렇게 가까이 있었다니. 그동안 딱 한 번만이라도 인터뷰장 밖으로 나와 화장실에 갔다면 정이준과 만날 수 있었을 텐데!

“센터장님, 네, 안녕하세요. 제가 지금 사람 하나 보냈거든요. 이름이 정이준이라고, 네, 등급은 B인데 제 파트너 비슷한 사람이에요. 오늘 각성해서 서툴 테니까 잘 안내해 주셨으면 해서요.”

센터에 연락한 후에는 길드에 전화를 걸었다. 세아는 어떤 길드에도 소속되지 않은 자유 헌터지만, S급인 만큼 모든 길드와 협력할 수 있었다. 주소록 가장 위에 있는 길드로 전화를 걸며 그녀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몇 번이나 본 풍경이다. 그러나 오늘은 좀 특별하다. 앞으로 모든 게 달라질 것이다.

“네, 이세아입니다. 던전 정보가 필요해서요. 아뇨, 아직 공략 전인 던전일 텐데, 제 퀘스트 창에 나타났거든요. ‘시스템 보스 던전’이라는데……. 네, 위치는 안 뜨고요. 고맙습니다.”

‘시스템 보스 던전’이라는 의미심장한 명칭에도 응대하는 사람은 태연했다. 무슨 보스 던전, 이런 건 이미 세상에 너무 많으니 특별한 의문을 품지도 않는 것이다.

이제 느긋하게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시스템 보스 던전을 찾아내고, 이준과 함께 던전을 공략하고, 이 지긋지긋한 굴레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하……. 너무 좋다.”

침대로 풀썩 쓰러지며 세아가 중얼거렸다. 누가 뭐라 하든 오늘은 최고의 날이었다.

5.5

이준은 모든 게 낯설기만 했다. 자동문을 통과하기 전에 그는 한참 센터 앞에 서서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외부 게시판에는 ‘초심자를 위한 던전 완전 공략법!’, ‘튜토리얼 클리어 지원의 모든 것’ 등 헌터만을 위한 정보가 게시되어 있었다.

각성자 센터는 헌터의 잡다한 신변 처리를 담당하는 곳으로, 신분증 발급이나 튜토리얼 클리어 지원 등의 업무를 담당했다. 거의 초보자를 위한 공간이었다.

그때, 자동문이 다시 열리고 양복을 입은 여자가 센터에서 나와 이준의 곁을 스쳐갔다. 워낙 큰 보폭으로 자신 있게 걸은지라 그녀가 지나갈 때 짧은 바람이 일었다. 이준의 시선이 여자의 목에 걸린 한국 헌터 협회 사원증에 머물렀다.

어쩌면 자신도 조만간 헌터 협회에 가게 될지도 모른다.

헌터를 배출한 모든 나라에 하나씩 설립된 헌터 협회는 초반엔 각성자 센터와 역할 분배를 두고 날을 세우며 다투었다.

시간이 지나 헌터 협회는 단순한 행정 업무를 버리고 이익 집단으로 변모했다. 헌터의 권익을 두고 협회는 정부와 싸우고, 도움이 필요한 하급 헌터들과 협력하는 동시에 그들을 통제하기도 했다.

S급이나 A급은 협회의 통제로부터 자유로웠지만 자신은 B급 각성자다. 협회와 만날 일이 잦을지도 모른다.

“이세아 헌터에게서 연락받았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빠른 등록 도와드리겠습니다.”

각성자 센터에서 이준은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기계는 이미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었고 측정도 끝났다. 사진 한 장을 찍고, 개방된 스킬 두 가지를 알려 주고 나니 마법처럼 각성자 신분증이 나왔다.

“다 됐습니다.”

이게 전부야? 이준은 얼떨떨한 심정으로 측정실 밖으로 나갔다. 그때, 대기실의 번호판이 보였다.

[민원 대기 인원 27명. 예상 대기시간 2시간 13분.]

결국 이준은 세아의 전화 한 통으로 2시간 13분을 절약한 셈이다. 이준은 괜히 주위의 눈치를 살피며 각성자 신분증을 만지작거렸다. 왼쪽에 박힌 사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너무 위축된 표정이었다.

그때, 남자 직원이 상냥한 미소를 띤 채 다가왔다. 두 손을 공손히 모은 채 그가 물었다.

“정이준 씨 맞으시죠? 도와드릴 게 있을까요? 계속 여기 서 계시기에.”

“아, 아뇨. 그냥 사진 좀 보고 있었어요.”

“사진 다시 찍고 싶으세요?”

이준은 놀라서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친절하게 웃으며 사무적인 투로 안내했다.

“사진 마음에 안 든다고 하는 분들도 많으시거든요. 원래 사진 바꾸려면 다시 대기하셔야 하는데, 정이준 씨는 그냥 찍으셔도 됩니다. 다시 찍으시겠어요?”

“네……. 그래도 된다면…….”

그래서 이준은 사진을 다시 찍었다. 두 번째로 찍은 사진은 첫 번째 것보다 더 마음에 들지 않아 주저하니, 사진사는 몇 번이고 다시 찍어 주겠다고 했다. 철컥, 철컥, 위협적인 플래시 소리를 몇 번씩 들은 후에야 마음에 드는 사진이 나왔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민폐인가 싶어 마음이 불편해졌지만, 사진사도 직원도 따뜻하게 웃을 뿐이었다. 직원은 이준을 사진 촬영실 밖으로 안내하며 정중하게 물었다.

“혹시 길드 소개를 원하시면 지금 바로 절차 밟아 드리겠습니다.”

길드. 이준은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처음에 길드는 마음 맞는 헌터들끼리 서로 협력하자며 꾸린 집단에 불과했다. 마술 좋아하는 헌터 모임, 이런 식으로 취미 동호회의 색깔을 띠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던 중 몇몇 길드가 상급 던전을 연달아 공략하며 힘을 키웠고, 던전에서 획득한 막대한 자본과 기술을 이용해 헌터 사회에 독자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한국 3대 길드는 협회와 밥그릇 싸움을 하기로도 유명했다.

이준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길드는 아직 생각이 없어서요.”

세아를 돕기로 했으니 길드에 들어가는 건 시기상조였다. 어떤 길드에도 소속되지 않은 세아는 아마 이준의 길드 가입을 원치 않을 것이다.

직원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허리를 꺾었다.

“불편한 점 없으셨길 바랍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감사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고 달아나듯 센터를 빠져나왔다. 처음 들어갈 때보다는 마음이 편했고, 어쩐지 더 당당해지는 느낌이었다. 이준은 고개를 똑바로 들고 세아의 차에 올랐다.

“어디로 모실까요?”

기사는 지나칠 정도로 친절했다. 성인이 되어 일을 시작한 뒤, 누구에게도 이런 대접을 받아 본 일 없는 이준은 황송해하며 쩔쩔매지 않기 위해 애써야 했다.

“쇼핑몰로 갈게요.”

5.6

옷도 사고 방어구도 잔뜩 샀다. 회복 포션도, 버프 포션도 양껏 구매했다. 처음에는 남의 돈을 쓴다는 생각에 주저했으나 시간이 갈수록 모든 게 쉬워졌다.

“이것도 정말 잘 어울리십니다.”

“던전에 처음 가시면 이것도 필요하실 거예요.”

“맞춤으로 주문하실 수 있습니다. 직접 배송도 해 드리고요.”

계속 돈을 쓰며 핸드폰을 확인했다. 세아와 번호를 교환했으니, 그녀가 카드 사용 내역을 보고 놀라서 전화를 걸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러나 핸드폰은 조용했다.

“각성한 지 얼마 안 되셨나요? 그럼 스킬도 몇 개 보고 가세요.”

쇼핑몰에서 스킬을 팔아? 이준은 놀라서 그쪽으로 몸을 돌렸다. 직원은 맑은 미소를 띤 채 이준을 안내했다.

“자유롭게 보시고 골라 보세요. 드물게 상성이 안 맞는 스킬도 있지만 그건 정말 드문 일이랍니다.”

스킬을 돈 주고 살 수 있다는 사실보다 더 놀라운 건 가격이었다. 0이 대체 몇 개야? 지금까지 산 물건과는 비교도 안 되는 가격이었다.

아무리 쓰라고 줬어도 남의 돈인데 이건 좀 아닌 것 같다. 게다가 지금까지도 많이 썼는데. 스킬이야 당장 필요한 것도 아니고…….

바로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이세아 헌터’라는 글자를 본 이준이 얼른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하는 순간 잠시 후회했다. 너무 막 써 버렸나?

“아, 여보세요? 지금 쇼핑몰에 있죠?”

“네, 네. 아, 제가 산 건, 몇 개는 환불하려고…….”

“환불이요? 아, 편할 대로 하시고, 혹시 스킬은 안 사요? 간 김에 스킬도 몇 개 사서 오세요. 던전에 들어가려면 기본적인 건 갖춰야 하니까. 아까 얘기해 준다는 걸 깜빡 잊었어요.”

“네? 근데 이거 가격이…….”

“알아요, 싸구려인 거.”

싸구려라니, 이게? 이준은 자기가 0의 개수를 잘못 헤아렸나 의심하며 가격표를 다시 확인했다.

“맞춤 스킬이 비싸고 좋긴 한데 그건 성공률도 낮고 시간이 좀 걸려요. 그러니까 일단은 적당히 거기서 스킬 사고, 나머지는 차차 합시다. 알겠죠?”

“네? 네…….”

수고해요, 인사 한마디와 함께 통화가 끝났다. 이준은 멍하게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는 사이 기다리던 직원이 부드럽게 물었다.

“구매 안내 도와 드릴까요?”

5.7

“와, 많이 사 왔네요?”

세아는 감탄하듯 말하며 이준을 맞이했다. 두 손 가득 종이봉투를 든 이준은 비꼬는 건가 싶어 그녀를 살폈지만, 세아는 다가와 거들어 줄 뿐이었다.

역시 세아의 최고 관심사는 스킬이었다. 그녀는 봉투를 뒤적여 스킬 캡슐을 전부 꺼냈다.

“하나씩 먹어 봐요. 이렇게 간단히 스킬을 얻을 수 있다니, 편하긴 한데 사실 난 거의 쓸 일이 없어서.”

세아는 기대 어린 눈으로 이준을 바라보았다. 이준은 주저하는 듯하더니 이내 물을 떠 와 캡슐을 하나씩 삼키기 시작했다. 그 옆에서 세아는 포장지에 적힌 스킬 이름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그에게 알아서 스킬을 골라 오라고 한 건 꼭 던전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준의 성향을 가장 간단하게 알아볼 방법이라서였다.

자동 회복. 응급 탈출. 응급 구조. 위험 감지……. 생각보다 방어적인 타입인 모양이었다. 세아는 그를 평가하는 중임을 들키지 않기 위해 자연스럽게 물었다.

“처음 개방된 스킬이 몇 개였어요?”

“두 개였습니다.”

“그럼 이거 다 먹었으니까 여섯 개네. 그 이후로 추가 개방된 건 없죠? 확인해 봐요.”

이준은 군말 없이 스킬 창을 확인하는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는 사이 세아는 이준의 몸을 살폈다. 자기 몸 잘 돌보는 사람이면 편하지. 그렇지만 전투 스킬이 너무 없으면 던전에서 걸림돌이 될지도 모르겠는데…….

“어?”

이준이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여섯 개가 아닌데요. 일곱 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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