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그래요? 뭐 하나 새로 개방됐나 보다. 뭔데요?”
이준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 다음 미심쩍은 어조로 대답했다.
“정화. 스킬 등급은 S. 스킬 설명은…… 시스템 보스 던전을 정화한다? 이게 언제 생겼지?”
“시스템 보스 던전 정화!”
세아는 기쁨에 찬 어조로 외쳤다.
그래, 솔직히 이준을 의심했다. 시스템 살해라는 막중한 임무를 띤 사람인데 각성 등급은 B. 성격도 그리 대범하진 않아 보이고, 혹시 동명이인은 아닐까? 그런 의심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 모든 게 확실해졌다.
자신의 파트너, 함께 시스템을 살해할 ‘지정자’는 바로 정이준, 이 사람이 맞다!
“정이준 씨, 우린 운명이에요.”
이준은 세아의 뜬금없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이해하든 말든 상관없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그때, 마침 핸드폰이 진동했다. 세아는 재빨리 전화를 받았다. 느낌이 좋다. 일이 술술 풀리고 있다. 잘못될 건 아무것도 없다!
“말씀하셨던 ‘시스템 보스 던전’이 어딘지 대강 알아냈습니다. 위치는 샌프란시스코 근처의 섬인데요…….”
위치를 제대로 받아 적은 후 세아가 환한 얼굴로 이준을 돌아보았다.
“목적지가 정해졌어요. 우리 비행기 타러 갑시다!”
5.8
매듭을 푼 기분이다.
인생을 살다 보면 가끔 엉킨 끈을 풀 일이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목덜미가 아프도록 고개를 숙이고 집중해서 풀어야 하는 끈. 풀기 어려웠다가 쉬웠다가를 반복하는 끈. 그리고 첫 매듭만 풀면 뒤는 술술 풀리는 끈.
‘정이준’이라는 첫 매듭을 풀자마자 복잡하게 엉킨 히든 퀘스트가 줄줄 다 풀리고 있다.
“너무 좋죠? 시스템 보스 던전이 어딘지 알아내려면 꽤 오래 기다려야 할 줄 알았거든요. 이렇게 바로 알게 될 줄이야. 꼭 내가 알아보길 기다렸던 것처럼 말이에요.”
“아, 네…….”
세아는 전용기 옆 좌석에 앉은 이준을 슬쩍 바라보았다. 자리도 널찍하고 많은데 굳이 나란히 앉은 이유는 샌프란시스코까지 가는 동안 그와 조금 가까워지고 싶어서였다.
인간적인 호감이라기보다는 안전장치에 가깝다. 좋든 싫든 던전에서 파트너 역할을 할 텐데, 어색한 기류라도 몰아내야 하지 않겠는가.
“예상대로 두 명만 들어갈 수 있는 던전이래요.”
“그렇군요.”
“던전이 완전히 처음일 텐데 긴장되진 않아요?”
“네, 괜찮습니다.”
대답은 꼬박꼬박 성실하게 하지만 먼저 묻거나 관심을 표하지는 않는다. 대화를 이어 가기가 어려워 세아는 잠깐 침묵했다. 차라리 좀 더 개인적인 걸 물어볼까?
“스물네 살이라고 했죠? 나보다 동생이네. 다른 가족은 있어요?”
“아니요, 없습니다. 재앙 발발 때 부모님이 돌아가셔서요. 형제는 원래 없었고요.”
“…….”
나 방금 지뢰 밟은 거 맞지? 세아는 난처하게 눈을 굴렸다. 그녀의 부모님은 멀쩡히 살아 계시고, S급 헌터인 딸 덕분에 호화로운 중년기를 보내는 중이었다. 그런 얘기를 해서 좋을 게 없을 걸 알아 세아가 말을 돌렸다.
“아, 그래요……. 그럼 지금까지 계속 혼자 살았겠네요. 힘들었겠어요.”
“괜찮습니다.”
무슨 말을 해도 분위기가 풀리질 않는다. 이준은 세아를 극도로 불편해하고 있었다. 뭐, 고용주인 데다 눈짓 한 번으로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S급 헌터니 부담스러운 것도 이해가 간다. 세아는 차라리 좀 더 실용적인 얘기를 하기로 했다.
“던전에 대해서는 좀 알아요? 보통 지하로 내려가거나 지상으로 올라가는데, 구조가 미로처럼 복잡하고 일정하지도 않아요. 중간에 휴식하는 층이 있어서 바깥 세계로 이동할 수 있는 마력 장치도 있는데……. 이번에 가는 던전은 어떨지 모르겠네요. 상급 던전이라면 없을 수도 있고.”
“그렇군요. 그럼 음식은 어떻게 해결하죠?”
다행히 이 이야기에는 관심을 보인다. 세아는 반가운 마음에 얼른 대답했다.
“던전 안에도 나름의 생태계가 있어요. 그리고 한 층을 완전히 정리하면 당분간은 안전하니 잠시 던전 밖으로 나와서 휴식해도 괜찮고요. 물론 일정 시간이 지나면 몬스터가 다시 생기지만, 층 보스 몬스터는 그러지 않으니까 안심이고요.”
“던전 경험이 많으시죠?”
드디어 대화 같은 대화가 이어진다. 샌프란시스코까지 가는 동안 던전 이야기나 계속하면 될 듯했다.
“많죠. 제가 처음 던전에 갔을 땐 힘도 기술도 있는데 거의 패닉이었어요. S급이라고 사람들이 다 기대했는데, 운이 좋아서 간신히 살았죠. 엄청나게 큰 몬스터가 갑자기 달려오니까 놀라서…….”
이준은 눈을 내리깔고 잠잠히 세아의 말을 경청했다. 가끔 고개를 끄덕이거나 작게 탄성을 내지르기도 했다. 이야기하다가 지치면 조금 떨어진 자리로 옮겨 앉아 잠을 청하기도 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하늘을 가로질러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5.9
던전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첫째, 전투 인력. 어떤 속성의 몬스터가 언제 어디서 얼마나 튀어나올지 모르기 때문에 전투 인원이 빠질 수 없다.
둘째, 채집 및 생산 인력. 포션을 넉넉히 가지고 들어간다고 해도 어떤 비상사태가 벌어질지 모른다. 채집과 생산에 능한 이들과 함께 가야 목숨을 건질 가능성이 커진다.
셋째, 탐색 및 기록 인력. 던전의 길은 복잡하고, 던전 종류에 따라 길이 바뀌기도 한다. 던전 탐색과 기록에 특화된 사람이 있어야 미아 처지에 놓이지 않는다.
세아는 던전 앞에 도착한 후에도 설명을 이어 갔다.
“하지만 이 던전은 둘이서만 들어갈 수 있고, 나와 이준 씨가 함께 들어가야 하니 다른 사람을 구할 수가 없어요. 이건 특수한 경우죠. 난 던전에 익숙하니, 이준 씨는 내 뒤를 잘 따라오고 목숨 챙기는 데만 신경 써요.”
“네.”
설명을 마친 세아는 허리에 손을 짚고 서서 던전 입구를 바라보았다.
시스템 보스 던전이라 위용이 남다르긴 했다. 보통 던전 입구는 짐승이 아가리를 벌린 것처럼 생겼거나 평범한 문이 덩그러니 놓인 정도인데, 이번엔 달랐다. 맨홀 뚜껑처럼 생긴 문을 열고 그 안으로 펄쩍 뛰어내려야 했다.
“장난 아니네.”
세아는 혼잣말을 하며 이준을 슬쩍 돌아보았다. 얼굴이 창백한 걸 보니, 얼마나 깊은지도 모르는 구멍으로 뛰어내려야 한다는 생각에 벌써 속이 울렁거리는 모양이었다.
“걱정하지 마요. 나한테 중력 상쇄 스킬이 있으니까 우리 둘 다 무사할 거예요.”
“네.”
대답은 참 잘 하는 사람이다. 그래도 소중한 퀘스트 클리어 파트너다. 세아가 맑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자, 내 손 잡고.”
닿는 손이 따뜻했다. 세아는 망설임도 두려움도 없이 어둠 속으로 몸을 날렸다. 히든 퀘스트 클리어가 코앞이다. 가벼운 긴장과 흥분이 전류처럼 짜릿하게 몸을 지졌다.
5.10
몸은 깃털처럼 가볍게 공중을 부양했다. 전속력으로 낙하하는 게 아니라 종이 한 장이 팔랑팔랑 떨어지듯 서서히 아래로 추락한다. 마치 나는 듯한 느낌이었다.
사방이 캄캄해, 세아는 이준의 손을 세게 붙들어야 했다. 며칠 전에 겨우 각성한 던전 초보자가 겁을 먹고 발버둥 치지 않도록. 하지만 어둠 너머에서 이준은 지나칠 정도로 잠잠했다.
톡, 마침내 발끝이 바닥에 닿았다.
“아, 다 왔다. 좀 어둡네요.”
세아는 주위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목소리가 웅웅 울려 거슬렸다. 캄캄한 곳은 위험하다. 세아는 잠시 숨을 죽인 채 주위의 기척을 가늠하다가 허공에 대고 손가락을 튕겼다. 딱 소리와 함께 사방에 빛 덩어리가 생겨났다.
마치 벽에 걸린 횃불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서는 빛을 보며 이준이 멍하게 입을 벌렸다.
“당분간 튀어나오진 않을 것 같네요. 그럼…… 갈까요?”
세아가 그렇게 말했으나 이준은 움직이지 못했다. 세아는 몇 걸음 앞서가다가, 그가 제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하는 걸 발견했다.
흔한 현상이다. 던전에 처음 들어오면 모든 게 낯설다. 냄새, 소리, 심지어 공기마저도.
던전마다 다르지만 여기서는 축축한 이끼 냄새가 났다. 썩어가는 늪 냄새도. 바닥은 아직 단단하지만 어디에 늪이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소리. 소름 끼치게 조용한 순간. 어머니의 배 속에 있었을 때도 이 정도로 고요하지는 않았으리라. 게다가 피부에 끈적끈적하게 달라붙는 습기까지. 땀이 축축하게 흐르고 열이 나는 옷을 입은 것처럼 덥기까지 하다.
세아는 이준에게로 다가가 그의 팔을 잡았다.
“이준 씨.”
그녀에게도 이런 시기가 있었다. 남들은 노력 없이 S급으로 각성해 젊은 시절부터 부와 명예를 누린다며 그녀를 부러워했지만, 그녀에게도 나름대로 적응기가 필요했다. 힘이 강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그러니 이준의 마음을 이해한다. 두렵고 낯설고, 괴물의 컴컴한 목구멍으로 굴러떨어진 느낌일 것이다.
“걱정하지 말고 날 따라오세요.”
부드럽고 다감하고 따뜻한 목소리.
“더 힘든 날도 견뎌 왔을 테니, 이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옆에 내가 있잖아요? S급 헌터 이세아가.”
농담조로 웃으며 말하자 이준의 눈동자에 빛이 돌아왔다. 세아는 그의 팔을 가만히 다독이며 검은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그의 마음에 새기듯, 한 자 한 자 힘을 주어 말했다.
“첫발만 떼면 쉬워요. 던전은 초심자를 편애하거든요. 도전은 언제나 ‘초심자의 행운’으로 시작된다고 하잖아요?”
“반드시 ‘가혹한 시련’으로 끝난다는 말은 왜 안 하세요?” (*파울로 코엘료, <연금술사>)
이준이 창백하게 질린 낯에 겨우 미소를 띠며 그렇게 물었다. 그의 긴장이 조금 풀린 듯해 세아는 품에서 스크롤을 하나 꺼내 주었다.
“이건 비상 탈출 스크롤이에요. 위급할 때 찢고 달아나세요. 던전 앞에서 기다리면 내가 다시 데리러 갈 테니까.”
“고맙습니다.”
“정말 위급할 땐, 나보다 그 스크롤이 더 믿을 만할 거예요.”
그렇게 S급 헌터와 던전 초심자의 공략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