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5.11
던전은 그리 깊지 않았다. 몇 번 쉬어야 했고 위기도 만났지만, 세아는 큰 무리 없이 최종 보스 앞에 도달했다. 이준도 목숨이 달려서인지 금세 전투에 적응했다. 공격형 스킬은 몇 개 없었지만, 위기의 순간 자기 목숨 챙길 정도는 되었다.
보스 룸 문으로 다가가니 다른 던전과 다를 게 없었다. 문 크기가 크긴 했지만 이 정도 크기는 흔하다. 불구덩이라도 기다리지 않을까 했던 세아는 좀 김이 샜다.
그래도 특별한 점이 하나 있었는데, 손바닥을 대는 홈 두 개가 있다는 것이었다. 손의 크기가 다른 걸 보니 두 사람이 각각 손을 대야 하는 모양이었다. 세아는 좀 더 작은 쪽에 자기 손을 맞춰 보았다. 오차 없이 쑥 들어갔다.
“내가 보스의 시선을 끌 때, 정화 스킬을 사용하면 돼요. 보스가 정화되면 이 던전도 정화되고…… 시스템은 사라질 거예요.”
“그럼 각성자도 모두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갈까요?”
“그렇겠죠. 모든 시스템이 다 사라지는 거니까. 준비는 됐나요?”
이준은 잠시 대답을 미루고 세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생사의 고비도 넘었고 오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세아는 이준이 힘든 삶을 살아왔다는 걸, 그럼에도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고 성실하게 애써 왔다는 걸 알았다.
“세상이 원래대로 돌아가도 잘 부탁해요.”
이준은 세아와 함께 문에 손바닥을 꾹 눌렀다.
우르르……. 둔중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보스 몬스터는 숨어 있지 않았다. 머리가 열세 개나 달린 거대한 용이었다. 온몸이 어둠 그 자체로 시커멨고, 벌린 아가리에서는 침이 뚝뚝 떨어졌다.
생각지도 못한 형태의 몬스터가 나올 줄 알았는데, 머리 여러 개 달린 용 형태의 보스 몬스터는 흔했다. 세아의 가슴으로 희미한 의아함이 스몄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몬스터가 달려들기 전에 세아가 발을 뗐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이준이 먼저 외쳤다.
“이세아, 속박!”
챙! 사슬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갑자기 발이 땅에 붙어 버렸다. 발은 물론이고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고개를 뒤로 돌릴 수조차 없었다. 거대한 용이 시뻘건 입속을 드러낸 채 세아의 머리 위를 덮쳤다.
세아는 스크롤이 찢어지는 소리, 그리고 이준의 목소리를 들었다.
“정말 죄송해요, 세아 씨.”
으드득, 몬스터의 이빨에 머리뼈가 으깨지는 소리.
고통을 느끼기도 전에 세아는 번쩍 눈을 떴다. 퍽, 플래시가 또 터졌다. 그게 마치 죽음을 알리는 소리 같았다. 물론 그녀의 망상이었지만.
“재앙이 벌어진 지 5년이 지났습니다! S급 헌터로서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 거라고 보십니까?”
세아는 멍청하게 입을 헤 벌리고 정면만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그녀는 ‘지겨워요’보다 더 최악의 대답을 하고 말았다.
“이 씹새끼가?”
2장. S급도 어려운 게 있다
6.1
세아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대로 사람들을 가르고 정신 나간 사람처럼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화장실로 내려가면서 한 가지 생각밖에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정이준의 얼굴을 보자마자 바로 그 생각을 뱉었다.
“대체 왜 그랬어?”
“예? 저요?”
정이준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세아를 바라보았다. 똑같은 얼굴, 똑같은 목소리.
“왜 그러십니까? 도와드릴까요?”
오만가지 말이 머릿속을 찔렀다. 방금은 나를 두고 가 버렸으면서. 내가 최종 보스에게 두개골부터 으깨져 죽도록 속박하고 달아났으면서. 그래 놓고 뭐, 미안하다고? 도대체 왜 그랬어?
그러나 당혹 어린 이준의 얼굴을 보니 모든 말이 허무하게 녹아 버렸다.
이 사람은 지금 아무것도 모른다. 세아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기가 어떻게 세아를 배신했는지, 전혀 모른다.
갑자기 앞날이 아득히 멀게 느껴졌다. 다시 소개하고, 목적을 설명하고, 계약하고, 그를 각성시키고, 비행기를 타고 샌프란시스코로 날아가고, 던전에 대해 이야기하고, 보스 룸 앞까지 함께 가고…….
“머리가 아프세요?”
걱정스럽게 물어오는 이준을 보며 세아는 한숨을 참았다.
할 일은 두 가지, 명확하다.
첫째, 정이준이 왜 자신을 배신했는지 알아 낼 것.
둘째, 정이준을 제대로 협력시켜 히든 퀘스트를 클리어할 것.
“아니요. 당신을 만나러 왔어요, 정이준 씨.”
세아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마치 처음 만난 것처럼. 실제로도 둘은 처음 만난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준에 대해 필요한 만큼 안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도 모르고 있었으니까.
“아, 저를 왜……. 지금 근무 중이라서요.”
“그건 걱정하지 말아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다, 이세아. 세아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침착하게 자신을 달랬다. 그냥 순서대로 차분하게 하면 된다.
머리가 복잡했다. 대걸레를 들고 어리둥절하게 이쪽의 보는 정이준의 얼굴을 갈겨 주고 싶은 마음은 덤이었다.
6.2
전처럼 이준을 고용한 후, 세아는 그에 대해 차분하게 알아 가기 시작했다.
부모님은 재앙 발발과 함께 돌아가셨다. 형제는 원래 없었다. 열아홉 살 때부터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면서 여러 가지 일을 겪었다. 이게 지난 생에서 세아가 알아낸 전부였다.
좀 더 깊이 있게 이준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그의 배신을 방지하고 순조롭게 히든 퀘스트를 클리어할 수 있다.
세아는 탄산수에 딸기청을 듬뿍 타 이준 앞으로 내밀었다. 호텔 객실 한가운데 앉아 사방을 둘러보던 이준이 눈을 들어 세아를 보았다. 그녀는 부러 다정한 투로 말했다.
“쭉 마셔요. 시원할 테니까.”
“감사합니다.”
이준은 어정쩡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음료를 마셨다. 여기까지 차를 타고 오는 동안 일부러 물 한 모금 권하지 않았다. 이준은 목이 바짝 탔는지 꿀꺽꿀꺽 음료를 들이켰다.
세아는 가라앉은 눈으로 그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S급과 A급 각성자만이 만들 수 있는 자백제는 당연히 불법이다. 세상이 미쳐 버리고, 각성자를 중심으로 견고한 계급 체계가 만들어졌으며 안전을 위해 개인의 자유를 통제하는 일이 자연스러워졌어도, 여전히 자백제는 불법이다.
그러나 이세아는 세계에 열두 명밖에 없는 S급 헌터였다. 자백제 정도는 손쉽게 구할 수 있고 문제가 생긴다 해도 아무도 그녀에게 책임을 묻지 못한다.
“전에 나랑 만난 적 있나요? 아니면 나에 대한 기억은?”
“네? 아니요. 전혀 모르겠는데요.”
기억은 자기만의 것인 듯했다. 세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이준을 응시했다. 그가 과거를 기억한다면 지금 물어볼 텐데. 최후의 순간 대체 왜 배반을 선택했는지, ‘속박’ 스킬은 언제 획득한 것이며 왜 그걸 숨겼는지.
“각성하고 싶어요?”
혹시 억지로 각성시켜서 화가 났나? 물어보고 각성시켰어야 했나? 혹시 몰라 물었으나 이준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각성하고 싶습니다.”
자백제는 특별하다. 몇 없는 S급, A급 각성자만이 만들 수 있으니 무척 귀한 데다 효능도 특별하다. 이준은 앞으로 10분 동안 묻는 말에 솔직하게 답할 것이며 그런 자신에게 이상함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물론 정신이 들면 어떨지 모르지. 세아는 다른 질문을 했다.
“각성해서 뭘 하고 싶은데요?”
“쇼핑도 마음껏 하고요.”
세아는 더 말해 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백제를 먹었다고 해도, 인간이 로봇이 되는 건 아니다. 말하기를 독려해 줄 필요가 있다. 이준은 눈치를 살피더니 곧 술술 대답했다.
“좋은 집도 사고, 존경도 받고, 아니, 존경까진 아니어도 그냥 존중만 받으면 됩니다. 잃어버린 친구들도 다시 만나고, 부모님 유골도 좀 더 좋은 데 모시고요…….”
다 세아가 손쉽게 해 줄 수 있는 것들이었다. 이준도 전처럼 B 등급으로 각성하면 저 정도는 할 수 있다.
“아!”
세아가 탄성을 질렀다. 폭포수 아래서 쏟아지는 물줄기를 맞고 있어도 알아내지 못할 듯하던 이준의 속내가 환히 들여다보였다.
마침내 깨달음이 찾아온 것이다. 지난 번 생에서 자신이 어떤 실수를 했는지.
꿈에도 그리던 각성을 했는데, 이준은 누릴 것도 다 누리지 못하고 바로 던전으로 끌려갔다. 그러니 시스템이 사라지는 게 싫을 수밖에! 미련이 남아 세아를 배신한 것이다.
“좋아요. 그럼 내 손 잡아요.”
세아는 지난 번 생에서처럼 두 손을 테이블 위로 내밀었다.
“내가 모든 걸 다 이루게 해 줄게요.”
아쉬움이 남지 않을 정도로 모든 걸 다 누리고 던전에 가게 해 주면 된다. 세아의 입가로 회심의 미소가 번졌다. 이준은 얼떨떨한 표정으로도 손을 내주었고, 세아는 다시 그를 각성시켰다.
“무슨 등급이죠?”
“B라고 하는데요……. 저 각성한 건가요?”
“네. 축하해요.”
세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내려다보며 씩 웃었다.
“그럼 각성자 등록하고, 쇼핑부터 하러 갈까요?”
6.3
‘이전 생에서도 이랬을까?’
세아는 입을 반쯤 벌리고 백화점을 둘러보는 이준을 보며 의문을 품었다.
이준은 특이했다. 평생 이런 곳에 한 번도 와 본 적 없는 사람처럼 주춤거리고, 그러면서도 조심스럽게 사방을 쏘다니며 주위를 탐색했다. 직원과 눈이라도 마주치면 자라처럼 목을 움츠리는 게 보기 싫긴 했지만, 서투니 그렇겠거니 이해했다.
“뭐가 제일 사고 싶었어요?”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작정하고 다정한 S급 후원자 노릇을 할 작정이었다. 세아는 따뜻한 어조로 물으며 이준의 어깨에 잠깐 손을 얹었다. 이준은 눈을 굴리더니 속삭이듯 대답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어차피 이건, 제 돈도 아니고…….”
“일단은 내가 이준 씨한테 주는 거예요. 처음 각성한 사람한테는 후원자가 필요할 때도 있거든요. 이준 씨 카드라고 생각하고 편하게 긁어요. 빚으로 달아 두지 않을 테니까.”
“그래도 잘 모르겠는데요.”
흠. 세아는 이준을 한번 훑어보았다. 시선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쓸고 지나가자 이준이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세아는 환하게 웃었다.
“키도 크고 얼굴도 멋지네요. 스타일을 좀 바꾸면 좋을 것 같은데. 옷부터 살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