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준비된 귀빈실로 들어가니 이준은 더욱 당황했다. 세아는 그를 잠시 관찰한 후, 그가 직원들 때문에 더 긴장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이준은 심지어 자존심 상하는 걸 무릅쓰고 세아에게 이렇게 속삭이기까지 했다.
“절 촌뜨기처럼 보지 않을까요?”
촌뜨기라니, 오랜만에 듣는 단어다. 의의로 순박한 면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세아는 안심하라는 듯 그를 다독거리며 작게 일러주었다.
“그냥 편안하게 하면 돼요. 금방 익숙해질 거예요.”
궁핍할 때, 사람은 자기에게 권력과 돈이 생겨도 변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똑같은 생활을 유지하며 좀 더 여유롭게 사는 정도일 거라고 믿는다. 그러나 세아는 헌터 세계에 있으면서 그 믿음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두 눈으로 목격했다.
정이준은 늦어도 일주일 안에 호화로운 생활과 깍듯한 대우에, 특별한 삶에 익숙해질 것이다. S급 후원자를 둔 각성자의 삶이 선사하는 모든 선물을 느긋하게 즐기게 될 것이다.
“그럼…… 저 셔츠 한번 봐도 될까요?”
이준이 소심하게 중얼거린 순간, 남자 직원이 얼른 달려와 셔츠를 보여 주었다. 세아는 하품을 참으며 소파에 편안하게 몸을 기댔다. 이준의 허영심이 채워질 때까지 그를 데리고 인형 놀이나 할 생각을 하니 이미 지루했다.
6.4
짐도 자기 손으로 들 이유가 없다. 매장 직원이 짐을 들고 어딜 가든 졸졸 따라다닌다. 하다못해 밥을 먹을 때도 밖에 서 있다.
이준이 불편한 얼굴로 유리 벽 건너편을 흘끗 쳐다보았다. 세아는 그의 시선이 어디로 향하는지 확인한 후, 방금 나온 접시로 눈을 돌리며 물었다.
“신경 쓰여요?”
“점심시간인데 저분은 식사 안 하시나요?”
“교대할 직원이 올 거예요. 다 그렇게 하니까.”
그 말을 듣고도 이준은 쉽게 밖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보다 못한 세아가 음식으로 그의 주의를 돌렸다.
“그러지 말고 나온 거 먹어 봐요.”
코스 요리였다. 방금 나온 건 가지 튀김인데, 한 입 베어 먹는 순간 이준은 깜짝 놀랐다. 가지라니 그리 좋아하는 음식은 아닌데, 하며 씹었는데 입안에서 뜨끈한 즙이 팍 터지며 향기까지 전해졌다.
튀김옷도 그냥 튀김옷이 아니었다. 윗니와 아랫니 사이에서 바삭하게 부스러지지만 조금도 느끼하지 않다. 입가에 기름도 묻지 않는다. 소리와 식감이 동시에 이준을 자극했다.
“맛있네요. 그냥 튀김인데…….”
직원은 음식을 가져다줄 때마다 공손한 미소를 띤 채 허리를 굽혔다. 음식에 대한 설명도 조곤조곤 이어졌고, 이준은 친절한 서비스에 용기를 얻은 듯 이것저것 묻기도 했다. 직원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전문가인지, 요리에 관해 물어도 대답이 척척 나왔다.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음악과 교양 있고 조용한 분위기. 흠집 하나 없는 고급 은제 식기.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우아하게 요리를 써는 파트너.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줄 와인 한 잔. 밖에서 짐을 대신 들고 기다리는 직원.
“먹고 조금 쉬었다가 차도 사러 가죠.”
세아는 나가서 산책이나 하자는 투로 말했다. 이준은 아까처럼 남의 카드 운운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껏 즐겨요, 이준 씨. 그래야 날 배신하지 않을 테니까.’
6.5
세아는 급해지는 마음을 달래며 느긋하게 이준을 기다리려 했다. 며칠이 지나는 동안, 그녀는 자기의 목적을 말하지 않고 이준을 풀어 두었다.
“오늘은 친구들 만나러 간댔죠?”
“네.”
“여기 카드…….”
“아, 아뇨, 제 카드 만들어서요.”
이준은 재빨리 고개를 젓더니 자기가 만든 카드를 보여 주었다. B 등급 각성자가 발급받을 수 있는 최고의 카드였다. 그래도 자기 카드가 더 낫지 않나 생각했던 세아는 곧 마음을 바꾸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럼. 잘 다녀와요.”
“오랜만에 만나는 거라 좀 긴장되네요.”
이준이 드물게 사적인 말을 꺼내 왔다. 세아는 빳빳하게 잘 다려진 그의 하늘색 셔츠를 보다가, 가까이 다가가 옷깃을 매만져 주었다. 이준이 긴장하여 숨을 멈추는 게 느껴졌다. 이럴 때 보면 영락없는 어린애다. 세아는 조금 웃었다.
“저.”
머리 위에서 이준이 나직하게 불렀다. 세아는 그대로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잘생겼다기보다는 무척 앳되고 아름다운 얼굴이다. 고생한 것치고는 피부도 뽀얗고 입술도 도톰하니 앙증맞게 붉다. 따로 손질하지 않아도 가지런한 눈썹 역시 보기 좋다. 일하느라 바쁘지만 않았다면 여자 여럿 울렸을 얼굴.
붉은 입술을 움직여 이준이 물었다.
“왜 절 도와주셨나요?”
눈이 마주친다. 이어지는 침묵이 어색했는지, 이준이 살짝 고개를 틀며 중얼거렸다.
“고민 많이 했습니다. 저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분인데, 왜 절 각성시켜 주시고 돈도……. 그러고 나서 달리 요구하는 것도 없으시고.”
“요구하는 거 없지 않아요.”
“스폰서 같은 건가요?”
“뭐요?”
세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딱 벌렸다. 너무 기가 막혀서 말이 나오질 않았다. ‘스폰서’라면, 자기가 생각하는 그 ‘스폰서’겠지? 바보처럼 입을 벌린 채 굳어 있으니 이준이 더듬더듬 변명했다.
“아니, 죄송합니다. 이상한 의미가 아니라, 가끔 그런 제안을 하는 사람도 있었거든요. 그래서 혹시나 하고…….”
화대를 줄 테니 몸을 팔라는 사람도 있었던 모양이다. 세아는 돈을 주고 사람의 밤을 사는 행위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다른 각성자들은 그렇지만도 않았다. 정부에게 거액의 돈을 준 다음 자기 집에 머물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개도 아니고 왜 저래. 그런 이들을 보면서 세아는 그렇게 생각하곤 했다.
“물론 그런 건 아니에요. 늦지 않으려면 지금 나가야 할 테니, 돌아오면 이야기해 줄게요.”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세아는 한 발짝 물러나며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걱정하지 말고 친구들이랑 즐기다가 와요.”
“죄송합니다. 스폰서 같은, 그런 이야기 해서…….”
소심하긴. 세아는 쩔쩔매며 사과하는 이준을 웃는 얼굴로 보내 주었다.
6.6
짠, 술잔을 들어 부딪쳤다. 어둑한 조명, 시끄러운 음악, 테이블에 가지런히 세팅된 안주. 오랜만에 모인 친구들이라 처음에는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으나 술이 금세 마음을 풀어 주었다.
“새끼, 존나 계 탔네.”
이준의 친구 형주가 소주를 자기 잔에 부으며 중얼거렸다. 시선이 몰리자,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내뱉었다.
“야, 솔직히 운빨 존나 터진 거잖아. 세계에 열두 명밖에 없는 S급 헌터 만나, 어쩌다 보니 각성도 해, B급이면 그래도 평균 이상인데 이제 인생 폈지. 시발, 난 왜 화장실에서 그런 사람 못 만나냐.”
“그래, 그래. 부럽다, 정이준.”
함께 앉은 친구들이 형주의 어깨를 두드리며 대충 말을 끊어 버렸다. 이준은 어쩐지 형주의 말이 불쾌했지만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아 술잔만 비웠다.
분위기가 달아오르고, 그저 그렇게 사는 친구들은 한 명씩 솔직해지기 시작했다.
“아, 솔직히 로또 된 거 아니야? 나도 각성하고 싶다.”
“각성한다고 다가 아니야. 나 봐, F로 각성하고 되는 일이 없다.”
“그래도 넌 채집 용역이라도 뛰잖아. 인생 진짜.”
이준은 이 자리가 서서히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무언가 꺼림칙한 느낌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그냥 세아와 함께 시시한 이야기라도 나누는 편이 더 즐거울 뻔했다.
곧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나자, 그렇게 생각한 순간.
“근데.”
형주가 눈을 돌려 이준을 바라보며 말을 걸었다. 많이 취했는지 눈이 벌겠다.
“이세아 엄청 유명하잖아. 걔가 왜 널 데려간 건데?”
“그야 모르지. 오늘 듣기로 했어.”
“뭐, 스폰 아니야?”
그러면서 형주가 낄낄 웃었다. 뭐가 웃긴 건지, 둘러앉은 친구들도 함께 히죽 입꼬리를 말았다. 전에는 이런 사람들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이준은 치미는 불쾌감에 얼굴을 굳혔다.
“그런 분 아니야.”
“야, 있는 놈들 속 다 똑같아. 술, 약, 섹스. 혹시 이상 성애 아니야? 막 존나 채찍…….”
“형주야, 닥쳐.”
이준이 나긋하게 말했다. 형주는 난데없는 욕에 멍하게 눈을 껌뻑거리다가 킬킬 웃었다. 그러더니 자기 잔을 이준 잔에 부딪치며 말했다.
“지 스폰이라고 또 존나 챙기네. 나중에 걔가 너 먹고 버렸다고 울지나 마라. 하긴, 돈 잘 챙겨 주겠지.”
형주는 잔을 입술 가까이 가져갔다. 그러나 바로 일어선 이준은 그대로 형주의 잔을 빼앗아 테이블에 팽개쳤다.
“야, 너 미쳤어?”
이준은 두 번 말하는 성질이 아니었으므로 다시 닥치라고 하지 않았다. 대신 퍽, 주먹을 형주의 얼굴 중앙에 내리꽂았다.
6.7
오늘은 이야기를 해 줘야겠다. 세아는 마음을 편히 먹으려 애쓰며 계획을 세웠다. 어떻게 설명하는 게 가장 좋을지, 이준의 배반을 방지하려면 어떤 말을 덧붙여야 할지…….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화면을 확인하니 이준을 태워서 간 기사였다.
“시비가 좀 붙었습니다. 경찰이 왔는데, 전화 한 통이면 해결될 것 같아서 연락드립니다.”
“시비요? 경찰은 왜요, 설마 정이준 씨가 누구랑 싸웠어요?”
“네, 친구랑 좀 다툰 모양입니다.”
좀 다퉜는데 경찰이 왔어?
세아가 희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얌전하고 어여쁜 얼굴로 술자리에서 싸움박질이나 하고 다닌 건가.
어쨌든 세아는 정말 전화 한 통으로 상황을 정리해 주었다. 그런 다음 조용히 앉아 이준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객실 문이 열리고 이준이 들어왔다. 그는 혼날 준비를 하는 학생처럼 세아의 눈치를 살폈다.
“왔어요? 여기 앉아요.”
“네. 저, 아까는…….”
“됐어요, 살다 보면 싸울 일도 있지. 헌터로 지내면 싸울 일 더 많을 거예요.”
세아는 그를 책망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각성 직후에는 세아도 이리저리 싸울 일이 많았고, 또 이준이 어떻게 지내든 퀘스트 클리어에만 협조하면 알 바 아니기도 했다.
“설명은 됐으니까 일단 앉아요.”
이준은 바로 앉는 대신, 선 채로 세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불쑥 물었다.
“절 믿어서 아무것도 묻지 않으시는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