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급의 히든 퀘스트-8화 (8/112)

8화.

“…….”

“아니면 제가 뭘 하고 다니든 상관없어서?”

세아는 드물게 당혹하여 이준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당연히 후자지. 우리가 안 지 얼마나 됐다고 믿음 운운해? 게다가 이전 생에서 넌 날 배신했다고!’

그래도 세아는 이준의 마음을 얻고 싶었다. 아니, 반드시 그의 마음을 얻어야 했다. 특별한 사랑이나 우정이 아니어도 좋다. 적어도 인간적인 호감은 쌓아 둬야 이롭다.

“만난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이준 씨가 이유 없이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은 아닌 걸 아니까요.”

“…….”

“그리고 우린 파트너가 될 거예요. 그러니 내가 이준 씨를 안 믿으면 어쩌겠어요?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준 씨 편이에요.”

이준의 눈빛이 흔들렸다. 세아는 그가 어떤 혼란을,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그래서 빙긋 웃으며 테이블 맞은편 자리를 가리켰다.

“이제 내가 왜 이준 씨를 데려왔는지 설명할게요.”

6.8

시스템 보스 던전은 여전히 캘리포니아에 있었다.

‘이번엔 무조건 성공이야.’

세아는 이준의 옆얼굴을 곁눈질하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이전 생에서 자신이 너무 성급했음을 인정했다.

이준과의 관계는 저번보다 훨씬 부드러워졌다. 이준은 던전 안에서 더 적극적으로 세아를 도왔다. 겁이 날 텐데도 앞장서서 길을 밝히기도 했다. 기사 노릇을 하는 소년처럼 보여 세아는 조금 웃었다.

보스 룸 앞에 서서 세아가 물었다.

“정화 스킬은 있죠?”

“네.”

“좋아요, 그럼…….”

“물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물어봐요.”

이준과 눈을 맞추었다. 순진하고 착한 눈빛이다. 세아는 이준의 눈빛이 마음에 들었다. 어디에도 배신의 기미는 없다.

“시스템이 사라지면 세계는 원래대로 돌아가겠죠?”

“그렇겠죠.”

“각성자도 평범한 사람으로 변하고요.”

“네, 아마도.”

“실패하면 예전으로 돌아가고요?”

“네. 며칠 전, 그러니까 재앙 발발 5년째로.”

세아는 긴장한 듯 굳어진 이준의 표정을 보았다. 그를 안심시켜 주고 싶어서 그녀는 부러 다정하게 덧붙였다.

“조금 무섭죠? 그래도 금방 다시 적응할 수 있을 거예요. 평범한 세상에서도 친구로 지내요, 우리.”

“친구?”

이준이 멍하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세아는 거기 신경을 기울이지 않았다.

보스 룸 문이 열리고, 이미 만난 적 있던 보스가 나타났다. 세아는 이준을 돌아보았다. 정확히 말하면 그의 입술을. 혹시 그가 속박 스킬을 사용하지나 않을까 불안해하면서.

그러나 이준은 왜 그러느냐는 듯 고개를 기울일 뿐이었다.

‘됐다! 완벽해.’

쾌재를 부른 세아는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려 보스와 눈을 맞추었다. 샛노란 눈, 가는 동공. 그녀가 보스에게 달려들려는 바로 그 순간.

“이세아, 속박!”

챙, 다시 귓전을 때리는 쇠사슬 소리. 달려드는 보스. 의식은 선명한데 눈 한번 깜빡일 수 없는 끔찍한 감각. 으깨지는 머리통. 뼈 부서지는 소리 사이로 섞여 들리는 이준의 목소리.

“친…… 싫…… 요.”

이세아는 다시 죽었다.

6.9

“재앙이 벌어진 지 5년이 지났습니다! S급 헌터로서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 거라고 보십니까?”

“이 새끼 진짜 죽여 버릴 거야.”

7.1

새로운 방법을 사용해 봤다.

일단 정이준을 보자마자 뺨을 갈겼다. 좋은 말로 어르고 달래 안 된다면 폭력적인 각성자로 군림할 작정이었다. 물론 화풀이도 하고 싶었고.

“너, 내 말 잘 들어.”

“왜, 왜 이러십니까?”

“내가 지금 너 때문에 미쳐 버리기 직전이니까 토 달지 말고 따라와.”

되묻거나 말을 안 들으면 그냥 두들겨 팼다. 상황도 거칠게 설명하고, 억지로 머리채를 잡아 각성시켰다. 그가 무얼 물으려고 하면 닥치라고 윽박질렀다.

‘사람은 패야 말을 듣는구나.’

기막힌 생각을 하며 세아는 던전 앞에 섰다. 정이준은 얻어맞아 부은 얼굴로 자신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쳐다보는 게 기분 나쁘다고 또 팼다. 들어가기 전까지 확실히 길들일 작정이었다.

보스 룸 앞에 도달하니 정이준은 그야말로 죽기 직전이었다. 세아는 그의 어깨를 탁 쳤다. 그 정도 접촉만으로도 이준이 기겁하여 고개를 들었다.

“정신 챙겨.”

“네, 네…….”

“그래, 그래. 말 잘 듣는다. 이 일만 끝내면 너랑 나랑 볼 일 없을 거니까 잘 해. 알았어?”

“볼 일 없다고요?”

이준이 멍하게 되물었다. 세아는 또 습관적으로 손이 나가려는 걸 겨우 참았다.

“그럼 넌 나 또 보고 싶냐?”

보스룸 문이 열렸다.

“이세아, 속박!”

이 씨발 새끼!

8.1

일을 잘 끝내면 자기 재산의 반을 떼어 주겠다고 꼬셔 봤다.

“이세아, 속박!”

9.1

원하는 자리는 뭐든 다 주겠다고 꼬드겼다.

“이세아, 속박!”

10.1

서두르지 않고 한 달 내내 인생을 즐기게 해 줬다. 일을 마치면 평생 이렇게 호의호식하게 해 준다고 했다.

“이세아, 속박!”

11.1

실수로 정이준을 죽여 버렸다.

12.1

열두 번째 삶.

세아는 숫자 헤아리기를 포기했다. 그녀는 인터뷰장에서 뛰쳐나와 화장실로 달려가는 대신 콧김을 뿜으며 자리에 앉아 있었다. 지금 정이준을 만나면 정말 그를 패 죽일 것 같았다. 각성자가 미각성자를 패 죽이는 건 생각보다 아주 쉽다.

“너, 왜 그래?”

옆에서 같은 S급 헌터 김현호가 낮은 소리로 물어 왔다. 세아는 벌떡 일어나 그를 질질 끌고 인터뷰장 밖으로 끌고 나갔다. 플래시 터지는 소리가 뒤통수를 갈겼지만 돌아볼 여유도 없었다.

세아는 인터뷰장 옆 작은 세미나실로 김현호를 밀어 넣었다. 그런 다음 분을 이기지 못하고 책상을 쾅 내리쳤다. 쩌적, 매끈한 나무 상판이 시원하게 갈라졌다. 문가에 서 있던 김현호가 얼떨떨한 얼굴로 물었다.

“왜 그래. 너 돌아 버렸어?”

“야, 너 내 말 잘 들어봐.”

“뭘?”

세아는 부서진 책상에 시선을 고정한 채 주먹을 세게 말아 쥐었다.

“자, 네가 미각성자를 만났어. 각성 주사 사다가 각성도 시켜 줬어. 카드도 주고 인생도 즐기게 해 줬단 말이지. 그러고 나서 퀘스트 하나를 같이 깨자고 했어. 근데 걔가 자꾸 퀘스트 클리어 전에 뒤통수를 갈겨.”

“어…….”

“이유가 뭘까, 씨발.”

얘가 왜 갑자기 잠꼬대를 하지.

김현호는 그렇게 생각했으나, 세아의 성질을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예의를 지키고 둥글둥글하게 사는 편인 그녀는 망나니 S급들에 비하면 나은 인간이었다. 그래도 화가 나면 다른 망나니들 못지않았다.

“어…… 보상을 나눠 준다고 하지 그랬어?”

“나눌 수 있는 보상이 아니야. 아니, 나눌 수 없다기보다는…… 보상은 자동으로 얻게 돼.”

“그럼 그 보상이 마음에 안 드는 거 아니야?”

“마음에 안 들 리가 없어.”

“어떻게 확신해? 맨날 뒤통수 맞는다면서. 이야, 누가 천하의 이세아 뒤통수를 갈기고 멀쩡히 목숨 붙어서 돌아다니나 몰라.”

세아는 말장난을 할 기분이 아니었다.

마음 같아선 김현호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의논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김현호를 그만큼 믿지 못했다. S급치곤 정신이 똑바로 박힌 놈이긴 하지만 어떻게 돌변할지는 모르는 거다.

“예를 들자면 이런 거야. 그 보상이 몬스터 멸종이라고 생각해 봐.”

“가능해?”

답답한 마음에 세아가 휙 뒤로 돌아섰다. 김현호의 멍청한 표정 때문에 더 화가 치밀었다.

“그니까 예시라고 하잖아. 근데 그 사람 부모는 몬스터한테 죽었거든. 그럼 당연히 몬스터 멸종을 바라지 않겠냐? 그니까 더 적극적으로 협조해야 되는 거 아니냐고.”

김현호는 흠, 하고 고개를 기울였다.

그제야 세아는 자기 질문이 너무 배려 없었음을 깨달았다. 잠시 잊고 있었는데, 김현호도 몬스터에게 부모를 잃었다. 좀 더 조심스럽게 물었어야 하는데, 아니면 다른 예시를 들든지.

하지만 김현호는 자기의 아픈 상처를 위무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그는 정말 진지하게 고민하더니 고개를 들었다.

“왜?”

“뭐?”

“왜 몬스터 멸종을 바라는데? 각성했다며, 그럼 그 사람도 헌터잖아.”

“근데?”

“근데라니?”

대화가 빙빙 돈다. 세아는 김현호의 말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그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그때, 김현호가 미세하게 얼굴을 찡그렸다. 뭐지, 잡아채려는 순간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너 진짜 전혀 이해를 못 하는구나.”

“뭐라고?”

“생각을 해 봐. 너 몬스터 다 사라지면 뭐 할 거야?”

“생각해 봐야지.”

일단 회귀가 끝난 걸 자축하며 춤이라도 춰야겠다.

“그래, 그럼 그 사람도 뒷일을 생각해야겠지?”

“내가 돈을 주면 되잖아.”

김현호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아예 느긋하게 벽에 기대서서 차근차근 설명을 이어 갔다.

“그냥 지금 이대로 있으면 좋잖아. 던전 들어갈 정도면 그렇게 낮은 등급도 아닌데, 헌터로서 돈도 벌고 명예도 얻고 대우도 받고. 근데 던전도 몬스터도 사라지면 헌터는 그냥 힘 좀 센 일반인일 뿐이야. 각성이 풀릴지도 모르고.”

“그래도 부모님이 그거 때문에 돌아가셨는데…….”

“몬스터 멸종시키면 부모님이 살아 돌아와? 아니잖아.”

세아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인가. 정이준은 열아홉에 혼자가 되어 힘든 삶을 살아야 했다. 그 시간에 대한 분노가, 복수심이 없단 말인가?

그러나 김현호에게는 모든 문제가 참으로 쉬운 모양이었다.

“나도 재앙 때 부모님 돌아가셨지만 복수심 같은 거 전혀 없어. 나 돈 많이 벌고, 어딜 가나 대접받고, 고개 숙일 일 없이 떵떵거리면서 살아. 가끔 부모님 납골당에나 찾아가고. 야, 잘 사는 게 효도지, 복수한답시고 몬스터 써는 게 효도냐?”

“하지만 그 사람은 각성자들에게 차별받은 것도 많아.”

“그래서? 자기도 각성자 됐잖아, 이제. 자기가 위에 올라서게 됐잖아. 근데 그걸 잃고 싶겠냐? 그럼 또 평범한 일반인으로 돌아가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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