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급의 히든 퀘스트-10화 (10/112)

10화.

“그래도 그건 좀…….”

“중요한 거 아니니까 편하게 불러요.”

계약서를 한 장씩 나누어 가지는 동안 이준은 계속 머뭇거렸다. 그러더니 테이블에서 일어서기 직전에 속삭이듯 불렀다.

“……누나.”

“…….”

“좀 그런가요?”

“어, 뭐……. 괜찮아요.”

세아는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이전 생에서, 이준은 단 한 번도 세아를 ‘누나’라고 부른 적이 없었으니까. 어색한 건 이준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그는 익숙해지려는 듯 다시 불렀다.

“세아 누나.”

“큼, 그럼 갈까요?”

“말씀 편하게 하세요.”

“어, 어. 그래, 그럼 가자.”

처음에는 어색했는데, 며칠 지나기도 전에 ‘누나’라는 호칭에 익숙해졌다.

이준은 이전보다 유난히 살갑게 굴었다. 애교 있게 치대거나 요령 좋게 어리광을 부리진 않았지만, 호텔에 머무는 동안 꼬박꼬박 식사를 함께했고 자기 이야기도 술술 털어놓았다.

“우리 전에 만난 적 있다고 했잖아요.”

한번은 음식을 앞에 두고 그런 소리를 해서 아침부터 체할 뻔했다.

“언제 만났나요?”

“넌 기억 못 할 거야.”

“저 어렸을 때?”

“글쎄…….”

괜한 소리를 했다고 후회하며 세아는 대답을 피했다. 그러나 이준은 그 정도 대답으로도 충분한지, 세아를 보며 빙긋 웃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좀 익숙했어요. 전부터 자주 만난 기분이었거든요.”

“내 기사 사진 본 건 아니고?”

“전 헌터 기사는 잘 안 봐서, 그건 아닐 거예요.”

“그래? 헌터 기사 재미없긴 하지.”

“아니, 그것보단…….”

이준은 무어라 대답하려다 물을 마시는 척하며 말을 멈추었다. 말을 하다 말면 더욱 호기심이 생기는 법이라, 세아는 그쪽으로 살짝 몸을 기울였다.

“왜?”

“그냥요.”

“그냥이 아닌데?”

이준은 망설이다가 세아의 표정을 살폈다. 그런 다음 아무렇지도 않은 척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배 아파서요.”

“뭐?”

“전 미각성자고, 아무 능력도 없는데……. 기사 보면 부러워서요.”

태연한 시늉을 하며 뱉어 놓고 민망해진 모양이었다. 그는 대답 없는 세아의 표정을 살피다가, 자기 대답을 그녀의 머릿속에서 지우고 싶은 듯 물었다.

“별로죠? 자기가 못 가진 거 질투하고.”

“솔직해서 좋은데.”

세아는 픽 웃고 물을 마셨다.

이준은 모를 것이다. 정말 ‘질투’하는 사람들이 어떤 짓을 하는지.

기사에 모욕적인 댓글을 달고, 행사 자리에 와서 무례한 질문을 퍼붓고, 불법 촬영한 사진을 인터넷에 뿌리고, 심지어 팬이랍시고 음식에 독을 타기도 한다. 그게 사람이다.

“그리고 정말 질투하는 사람들은 기사 열심히 봐. 그냥 보는 게 아니고 정말 하나하나 다 열심히 보더라니까. 엄지 아프도록 댓글 쓰고 루머 퍼뜨리고 그래.”

“그건 이상한 사람들이고요.”

“그래, 넌 안 이상하다고.”

이준이 몇 차례 눈을 깜빡이며 세아를 바라보더니 약간 웃었다. 미미하게 붉어지는 뺨을 보고 세아는 그가 좀 더운가 보다 생각했다.

12.6

캘리포니아로 날아가기 위해 짐을 싸는데 김현호가 찾아왔다. 대단히 친밀한 사이는 아니지만 정이준의 심리에 대해 말해 준 게 고마워 문을 열어 주었는데, 그는 들어오자마자 실없는 소리를 했다.

“야, 우리 사귀냐?”

“미친 놈.”

짤막하게 쏘아 준 후 세아는 짐을 싸는 데 열중했다. 현호는 엉망이 된 객실을 둘러보고 쯧 혀를 찼다.

“이런 거 그냥 사람 시켜.”

“내가 하는 게 편해. 넌 왜 와서 헛소리야?”

“너 때문에 차이게 생겼으니까 그렇지.”

“뭐?”

“기사도 안 보고 사냐?”

현호가 내미는 핸드폰을 낚아챘다. 큰 글자로 적힌 헤드라인이 눈에 들어왔다.

[S급♥S급, SS 커플 탄생?]

아래에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박혀 있었다. 자신이 김현호를 세미나실 안으로 밀어 넣는 모습이었다.

“바람피우냐고 난리 났어. 어쩔 거야?”

“어, 미안.”

김현호에게는 오래 사귄 여자 친구가 있었다. 학생 때부터 사귀었는데 아직도 교제 중인 걸 보면 놀랍긴 했다. 거의 7년 넘게 사귀고 있는 셈이다. 김현호의 여자 친구는 미각성자지만, 그게 교제에 걸림돌이 되지는 않았다.

다만 둘의 연애는 철저히 비밀이었다. 연애 사실이 밝혀지면 S급 헌터인 김현호보다는 미각성자인 상대가 더 큰 피해를 입을 수 있어서였다.

“내가 전화해 줄게.”

“야, 하지 마. 미쳤어?”

“왜?”

“이 시간에 같이 있는 게 보기 좋겠어, 그럼?”

그때, 밖에서 누군가 벨을 눌렀다. 세아는 현호의 핸드폰을 휙 던져 주고 직접 문을 열러 나갔다. 타이밍 맞게 현호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지만 세아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문 밖에 선 건 이준이었다. 그는 잠시 주저하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짐 싸다가 여쭤볼 게 있어서요.”

“아, 그래. 들어와.”

이준은 안으로 들어오다가 문가에 놓인 현호의 신발을 발견했다. 세아는 객실 안에서 신발을 신고 다니는 편이었지만 현호는 꼭 실내 슬리퍼로 갈아 신었다. 검은 운동화를 본 이준의 얼굴이 미미하게 굳었다.

“누구 있나요?”

“아, 다른 헌터.”

때마침 안에서 현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화를 건 사람과 통화하는 모양이었다.

“아니, 아니지. 지금 잠깐 친구 좀 만나러 왔어. 어? 아, 그냥 친구……. 영상 통화?”

현호는 분주하게 눈을 굴렸다. 그러다 막 들어서는 세아와 이준을 보고 눈을 빛냈다. 그는 손가락 끝으로 세아와 이준을 번갈아 가리키며 분주히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세아는 그 신호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 잠깐만. 지금 친구 커플 소개해 줄게.”

현호는 영상 통화 모드로 바뀐 핸드폰을 재빨리 세아와 이준 방향으로 돌렸다. 그러나 어정쩡하게 선 두 사람을 보고, 현호의 여자 친구는 의심만 커진 모양이었다. 핸드폰 너머에서 기계음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떨떠름한 음성이라, 현호가 다급하게 둘에게 손짓했다. 세아는 이제 그 수신호의 의미를 알았지만, 현호를 위해 이준과 다정한 분위기를 연출할 마음은 전혀 없었다. 커플 일에 왜 낀단 말인가.

그때, 이준이 팔을 뻗어 슥 세아의 어깨를 감쌌다. 세아가 올려다보기도 전에 그가 말했다.

“안녕하세요? 처음 인사드리네요. 말씀 많이 들었어요. 저희 마침, 나중에 넷이 모여서 놀자는 얘기 중이었거든요.”

“아, 정말요?”

상대의 음성이 한결 누그러졌다. 현호는 이준의 아이디어가 마음에 든 듯, 핸드폰을 자기 쪽으로 돌려 열심히 살을 붙이기 시작했다.

“넷이 놀면 재밌을 거야. 어때? 우리 한 번도 그렇게 논 적 없잖아. 다음 주 정도는 어때? 대충 날짜 정해 봤는데.”

“그래? 나야 좋지. 친구 소개시켜 주는 거 처음이잖아.”

“친구들이 다들 혼자였거든. 나만 우리 자기랑 사귄다고 자랑하는 것 같잖아.”

“하하, 정말?”

가지가지 하네, 정말. 세아는 눈을 위로 굴리며 징그럽다는 듯 혀를 내밀어 보이고 이준의 팔을 떼어내려 했다. 그러나 이준은 세아를 놓아주는 대신 가까운 곳에서 그녀를 빤히 내려다볼 뿐이었다.

‘왜 이래?’

세아는 입만 벙긋거려 물었다. 현호가 여자 친구와 간지러운 대화를 나누는 중이라 목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정이준.’

이름 세 자에 이준도 퍼뜩 정신이 든 모양이었다. 그는 후다닥 손을 떼고 세아에게서 물러났다. 순식간에 귓불까지 열이 올랐고, 이준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죄송해요.”

“아, 살았다.”

현호가 통화를 끝내며 중얼거렸다. 세아는 쯧쯧 혀를 차며 다시 캐리어 옆에 쪼그려 앉았다. 주섬주섬 짐을 싸며 그녀가 말했다.

“참 여러 가지 한다. 그렇게 오래 사귀었는데.”

“너도 연애해 봐라. 아무튼 다음 주에 넷이서 만나는 거다?”

“뭐? 왜?”

“다 들었잖아. 부탁 좀 하자, 이세아. 아무튼 간다.”

현호는 이준을 흘끗 바라보더니 큰 관심을 두지 않고 나가 버렸다. 세아는 어이가 없어 문만 쳐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뭐 물어보려고 한 거야? 비행기 처음이면 모르는 거 있을 수도 있으니까 아무거나 물어봐.”

“두 분 사귀는 거 아니었나요?”

“누구, 나랑 쟤? 당연히 아니지. 너도 기사 봤구나? 그거 기자들 맨날 하는 짓이야. S급끼리 엮는 거.”

“아.”

그러더니 이준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주섬주섬 짐을 싸던 세아는 이상한 기분에 그쪽을 돌아보았다. 뭘 물어보러 왔다더니, 말은 안 하고 자꾸 딴소리만…….

“…….”

딱 눈이 마주쳤다. 세아는 이준의 표정을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 정확하게 세아에게 고정된 시선. 한 쌍의 검은 눈. 가까이 가서 그의 눈을 들여다보면 짐도 객실도 사라지고 세아 자신만 있을 것 같았다.

“그럼 다음 주에 저희 정말 같이 만나러 가는 건가요?”

당연히 아니다. 일단 그때쯤이면 시스템이 사라져 있을 테고 세상은 혼란스러워질 것이다. 그 상황에 한가하게 김현호 커플을 왜 만난단 말인가, 게다가 이준과 함께.

“당연히…….”

그건 아니지, 말이 입 안으로 말려 들어갔다. 세아는 본능적으로 말을 끊었다. 이준의 눈빛이, 표정이 기이했다. 여기서 아니라고 하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서늘하게 목덜미를 덮쳤다.

“상황 봐야지.”

“같이 가요.”

이준이 맑게 웃었다. 그는 아직 각성자도 아니고 뭣도 아닌데, 세아는 선뜻 거절할 수 없었다. 이유도 모르는 채로. 세아가 답하지 않자 이준이 반복했다.

“저랑 같이 가요, 누나.”

12.7

김현호 커플과 만나러 가든지 말든지, 일단 샌프란시스코로 먼저 가야 했다.

이준과 함께 전용기를 탄 게 처음도 아닌데, 그 어떤 생보다도 분위기가 어색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세아만 어색함을 느꼈다.

‘쓸데없는 생각 말고 계획 정리부터 하자.’

이준은 아직 아무것도 모른다. 던전을 공략하고 나면 시스템이 사라진다는 것, 최종 보스 공략에는 이준의 정화 스킬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 세아는 이준을 각성시키지도 않았다. 보스 룸 문 앞에서 각성시킬 작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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