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스킬에 익숙해질 틈을 주면 안 돼. 정이준의 역할은 보스를 정화하는 것뿐이니까.’
그와의 관계가 전보다 훨씬 가까워졌다고는 해도, 그를 믿을 수는 없다. 서브 퀘스트 정도라고 훌륭히 속여 넘겼지만, 이준이 언제 어떻게 돌변할지 모를 일이다.
“던전 보스 룸 앞에 가서 각성시켜 줄게. 그때까지 내 뒤를 잘 따라와.”
이준을 각성시키지 않고 던전 안으로 들어가는 건 처음이었다.
그가 몬스터의 공격을 받고 죽어 버릴까 봐 조금 긴장이 되긴 했지만, 이미 이 던전을 여러 번 공략했다. 어디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환히 알고 있으니 이번에도 무난하게 공략을 진행할 수 있을 것이다.
“누나는 괜찮아요?”
“뭐가?”
“혼자 싸워도 위험하지 않아요?”
세아가 픽 웃었다. 나이도 어리고 힘도 없는 게 누굴 걱정해. 세아는 굳이 답하지 않고 이준의 손을 잡았다. 그런 다음 그대로 컴컴한 구멍으로 뛰어내렸다.
중력 상쇄 스킬 덕으로 둘의 몸은 가뿐히 바닥에 안착했다.
그 순간, 세아가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그러나 이준은 앞을 바라보며 감탄했다.
“와, 무슨 호텔 같네요. 던전은 원래 다 이런가요?”
“…….”
던전이 변했다.
12.8
세아는 한 걸음 한 걸음 신중하게 나아갔다. 어둠 그 자체와도 같던 던전이 정말 호텔 복도처럼 밝아져 있으니, 당혹과 긴장이 하나가 되어 몸을 식혔다.
광원도, 창문도 없는데 안이 대낮과도 같았다. 기둥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서 있고, 바닥은 매끈매끈한 대리석. 안은 또 누가 한차례 휩쓸고 간 것처럼 깨끗해서, 한 시간 이상 걸었는데 몬스터 꼬랑지 하나 발견하지 못했다.
“누나.”
바로 그때, 뒤에서 이준이 작게 속삭였다. 세아는 몸을 긴장시키며 그쪽을 돌아보려 했다. 그러나 이준이 세아 뒤에 바짝 붙으며 속삭였다.
“돌아보지 마요. 누가 따라 오는 것 같으니까.”
사라질 듯한 목소리라 세아는 하마터면 그 말을 놓칠 뻔했다. 뒤에 붙은 이준의 체온이 느껴졌다. 세아는 뒤를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며 느리게 걸었다.
두 사람의 발소리가 들린다.
타박, 타박, 타박.
아니, 정말 두 사람이 맞을까?
12.9
“좀 쉬어야겠어.”
1층을 헤매고 헤매다가 세아가 툭 내뱉었다.
신경이 너덜너덜해져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다른 던전이었다면, 다른 상황이었다면 이러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여긴 시스템 보스 던전, 그녀가 몇 번이고 배신당하고 죽었던 곳이다. 게다가 유일한 동행인인 이준조차 믿을 수 없다.
“여기 좀 앉아요, 누나.”
이준까지 움직임을 멈추고 자리를 잡으니, 계속 따라오는 발소리도 함께 멎었다.
둘 다 그쪽을 신경 쓰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 세아는 딱딱한 바닥에 앉아 가방을 뒤졌다. 기력을 회복시키는 포션을 몇 개 꺼내 마시니 조금 기운이 났다.
“누나.”
이준이 작은 목소리로 불렀다. 그러나 세아는 대답 대신 그의 손목을 잡아 끈 다음, 손바닥에 한 글자 한 글자 썼다.
‘정신계.’
이준은 자기 손바닥 위에서 움직이는 세아의 손가락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몬스터.’
세아는 이준의 표정을 보고 그가 알아들었음을 확인했다. 그의 손을 놓아 주며 세아가 작게 속삭였다.
“지금 스킬이 안 먹혀.”
오는 동안 여러 가지 스킬을 사용해 봤다. 정신계 몬스터를 감지하는 스킬, 미행자의 기척을 확장하는 스킬, 일정 범위 내 몬스터에게 피해를 입히는 무형의 스킬…….
그러나 무슨 짓을 해도 발소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환청인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꾸준히 들려오는 발소리.
게다가 둘은 한 시간 넘게 1층에서 헤매고 있다. 이전에는 층 공략 속도가 빨랐다. 층 보스 몬스터도 금세 잡았고 다음 층으로 가는 입구도 쉽게 발견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어디로 가든 다 똑같아, 끝없는 벌판을 헤매는 기분이었다.
“흩어져 볼까요?”
이준의 숨결이 귓가에 부서졌다. 던전 안은 늦가을처럼 서늘해서 그의 체온이 도움이 되었다. 세아는 바로 고개를 젓지 못했다.
이준을 위험하게 만들 수는 없다. 그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영원히 1층을 맴돌아야 할지도 모른다. 차라리 잠시 몬스터의 시선을 분산시키는 게 나을지도.
“제가 저쪽으로 갈게요. 제가 더 약하니까 제 뒤를 따라오면…… 그때 누나가 공격하면 돼요.”
지금 각성시키자.
속삭이는 이준의 목소리를 들으며 세아가 결심했다. 던전이 변한 이상 과정도 변해야 한다. 어쩌면 이준을 각성시키지 않았기에 던전이 변한 걸지도 모른다. 또 흩어질 거라면 이준을 각성시켜 힘을 주어야 했다.
“손 줘.”
세아는 이준의 등 뒤, 조금 떨어진 기둥을 짧게 곁눈질하며 속삭였다.
자꾸 등골이 오싹하다. 뒤에서 얼음처럼 차가운 손가락이 튀어나와 뒷덜미를 잡아챌 듯한 느낌.
“손 달라니까.”
“왜요?”
“각성시켜 줄게.”
“지금은 괜찮아요. 지금 각성하면 몬스터가 우리 계획을 알아차릴 거예요.”
“…….”
세아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준의 얼굴은 평소와 똑같았다. 검은 눈동자, 이마를 가리는 부드러운 앞머리, 살짝 올라간 입꼬리까지. 이가 드러나지 않는 웃음은 몹시 온화했다.
마치 그린 것처럼.
“너 왜 웃어?”
이준이 웃던 표정 그대로 멈췄다. 그의 얼굴 어디에도 당혹이 없었다.
세아는 쿵, 쿵, 자기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자기 옆의 이준을 똑바로 올려다보며 물었다.
“이게 재밌어?”
세아는 번개처럼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발로 땅을 박차며 거리를 벌렸다. 이준의 웃는 입이 그대로 눈 아래까지 쭉 찢어지는 게 보였다. 입은 점점 더 커지고 길어지더니 마침내 머리통 전체를 거꾸로 삼켜 버렸다.
“정이준! 정이준, 너 어딨어!”
세아가 목이 터지도록 소리치며 손을 앞으로 뻗었다. 허공의 빛이 선처럼 그녀의 손끝에 모이더니 형태를 갖추었다. 새까만 소총이었다. 세아는 총을 제대로 견착 한 후 그대로 얼굴 검은 몬스터에게 총을 갈겼다.
탕, 탕!
세아의 가장 큰 능력은 허공에서 자기의 무기를 만들 수 있는 것이었다. 총, 칼, 활, 몽둥이, 뭐든 좋다. 그녀가 치명적인 총탄을 쏘았으나, 총탄은 그대로 몬스터의 검은 얼굴로 빨려 들어가 사라졌다.
“이게 대체…….”
세아는 총을 아래로 늘어뜨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모든 속성의 공격을 다 사용했다. 물리, 마법, 신성, 암흑, 그 외 자기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속성을 전부 총탄에 실었다. 그러나 몬스터는 그 모든 공격을 무효화시키며 한 걸음 한 걸음, 사냥감을 노리듯 세아에게 다가왔다.
말도 안 돼. 아직도 새로운 속성의 몬스터가 남아 있다고?
바로 그때, 갑자기 발목이 서늘해졌다. 아래를 내려다보아도 아무것도 없었다. 바람이 분다. 이 꽉 막힌 던전에서, 등을 떠미는 바람이……. 세아는 다시 고개를 들어 몬스터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바람의 흐름을 읽을 수 있었다. 그녀는 오른발을 앞에 두며 끌려가지 않도록 버텼다. 몬스터의 입, 얼굴 전체를 집어삼킨 입이 이제는 세아마저 삼키려 하고 있었다.
“정이준!”
그는 이미 당했을까. 세아는 몸에 힘을 주어 뒷걸음질을 쳤지만 소용없었다. 끌려가지 않게 버티는 게 최선이었다. 채찍이라도 만들어 기둥에 감아 볼까 했지만, 채찍 끝이 휘리릭 몬스터의 입으로 먼저 빨려 들어갔다.
더는 버틸 수 없다. 모든 스킬이 무력화되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몬스터에게 당한 건 처음이었다. 태어나 단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압도적인 절망감이 세아를 덮쳤다. 머리카락이 어지럽게 날려 시야를 가렸다.
정말 또 죽는 거야? 이렇게? 정체도 모르는 몬스터에게 먹혀서?
소리가 들린 건 바로 그때였다.
“정화!”
고개를 들어 앞을 보기도 전에 바람이 멎었다. 마치 선풍기를 끈 것처럼 간단하고 빠르게. 정면을 보니 몬스터의 몸이 빠르게 무너지고 있었다. 세아는 멍하게 입을 벌리고 무너지는 몸 뒤에 선 이준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정이준?”
“누나.”
그가 허둥지둥 다가왔다. 세아는 다리가 뻣뻣하게 굳어 떨리는 걸 느꼈다. 몬스터 때문일까. 아니면 정이준의…….
“각성했어?”
몬스터가 네 행세를 하는 동안 넌 어디 있었느냐, 어떻게 몬스터의 술수를 물리치고 여기까지 나타난 것이냐, 그런 건 물을 수도 없었다.
“네, 각성했어요.”
이준은 세아를 안심시키듯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이준의 손은 타는 것처럼 뜨거웠다. 그의 맑은 목소리가 세아를 뒤흔들었다.
“S급이에요.”
12.10
몬스터가 자신의 모습으로 위장한 후, 이준 역시 내내 세아의 뒤를 따라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입을 벌려 누나, 세아 누나, 하고 불러도 소리가 나지 않았다.
세아 뒤에 붙어 선 몬스터는 종종 고개를 돌려 이준을 확인하고 씩 웃었다. 입이 눈꼬리까지 찢어지는 소름 끼치는 웃음이었다. 이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거리를 좁히려 했지만, 귀신에 홀린 듯 세아와의 거리는 일정했다.
세아와 몬스터가 바닥에 앉아 쉴 때도 이준은 그들과 가까워질 수 없었다. 걸어도 걸어도 좁혀지지 않는 거리에 이준은 결국 우뚝 멈춰 섰다.
세아가 이준의 손, 몬스터의 손을 잡아끄는 게 보였다. 뭘 하는 걸까. 이준은 눈을 가늘게 뜨고 세아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잠시 후, 세아가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러더니 몬스터에게서 달아나려는 듯 몸을 뒤로 뺐다. 이준은 제자리에 서서 세아를, 그녀가 총을 만들어 몬스터에게 갈기는 것을, 모든 공격이 무위로 돌아가고 속수무책으로 끌려가는 것을 보았다.
나는 무력해.
세아의 긴 머리카락이 엉망으로 휘날리며 몬스터 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준은 앞뒤 가리지 않고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뛰어도 뛰어도 제자리, 제자리, 제자리. 마치 현실처럼.
바로 그때, 목소리가 들렸다. 머릿속으로 직접 전달되는 소리였다. 청아한 남자의 음성.
‘너에게 힘을 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