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저 사람한테 가야 해. 내가 아무것도 도울 수 없어도 시간이라도 벌어 줘야 해. 무슨 짓을 해서든 지금…….
‘죽일 힘을.’
그 순간, 세아가 힘을 쥐어짜 외쳤다.
“정이준!”
어떻게 그 일이 가능했는지 이준도 모른다.
그는 이제껏 그랬듯 성큼 뛰었고, 이번에야말로 단숨에 거리를 좁혔다. 물에 잠겨 있다 나온 듯 갑자기 온몸이 가벼워지며 힘이 솟았다. 아른아른 글자가 지나갔다.
[정이준. 24세. 각성 등급 S.]
개방된 스킬이 어지럽게 눈앞을 메웠다. 이준은 무작정 손을 뻗어, 자기 껍질을 뒤집어쓴 몬스터의 뒤통수를 꾹 눌렀다. 본능처럼 입이 열리고 마침내 목소리가 터져나갔다.
“정화!”
12.11
세아는 무너진 몬스터와 이준을 번갈아 바라보며 심각한 생각에 잠겼다.
몬스터의 모습은 기괴했다. 얼굴이 시꺼멀 뿐 여전히 이준의 손, 이준의 발을 가졌다. 체형도 똑같고 옷도 마찬가지였다. 얼굴 없는 시체처럼 쓰러진 모습을 보고 있자니 소름이 끼쳤다. 아니, 이런 관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말 S급이야?”
“네.”
세아 곁에 선 이준이 대답했다. 세아는 고개를 틀어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이럴 리가 없다.
이전 생에서 세아는 그를 여러 번 각성시켰다. 그때마다 등급은 같았다. B. 그런데 이번에는 던전에서 스스로 S급으로 각성했다고?
“각성할 때 어땠어? 무슨 일이 있었어?”
“그냥 누나가 위험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가까이 가려고 했는데 갑자기…….”
“갑자기? 갑자기 뭐?”
이준이 말을 그치고 세아를 바라보았다. 평소와 똑같은 표정인데 느낌이 기묘했다. 세아는 더 재촉하지 못하고 그를 바라만 보았다. 설명이 이어지리라 여겼는데 이준은 다른 걸 물었다.
“제가 각성한 게 싫어요?”
절대 솔직할 수 없는 질문이다.
각성한 거 자체는 좋다. 그래, 좋다 이거다. 그런데 하필 S급이다. B급일 때도 그의 속박 스킬에 당해 여러 번 죽었는데 이번엔 S급. 세아는 손을 들어 얼굴을 감쌌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아니, 싫은 게 아니야. 그냥 좀 놀라서 그래.”
“소중한 사람을 구하려다 각성하는 건 흔한 경우 아닌가요?”
“그래, 근데 우리가 뭐 각별한 사이는 아니잖아.”
“…….”
이준이 답하기를 멈추었다. 세아는 그의 낌새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몬스터 옆에 쪼그려 앉았다.
앞으로 던전을 공략하는 동안 이런 몬스터와 계속 마주치면 위험하다. 이준의 정화 스킬이 있지만……. 잠깐, 정화 스킬.
“너 스킬 확인할 수 있지? 정화 스킬 속성 좀 봐봐.”
이준은 자기에게만 보일 허공의 글자를 읽느라 잠시 침묵했다. 곧 그가 짤막하게 대답했다.
“스킬 속성은 ‘시스템’이에요.”
“시스템?”
처음 듣는 속성이다. 혹시 모르니 세아는 자기 스킬 창을 열어 가진 스킬을 전부 훑었다. 어디에도 ‘시스템 속성’은 없었다. 저런 속성이 있는 줄도 몰랐으니, 이번에 처음으로 나타난 스킬 속성이 분명했다.
“일단 던전 공략은 잠깐 중단해야겠어.”
세아는 한숨을 참으며 말했다.
자기가 처리할 수 없는 속성의 몬스터가 나타났다. 이준은 막 각성하여 전투에 능숙하지 않다. 일단 밖으로 나가 시스템 속성에 대해 알아본 후, 획득할 수 있는 스킬이 있다면 그것도 얻어 와야 한다.
그러나 이준의 생각은 달랐다.
“저기 구멍이 생겼어요, 누나.”
그가 먼 곳에 나타난 둥근 구멍을 가리키며 말했다. 시선은 여전히 세아에게 고정된 채였다. 세아만 고개를 돌려 그쪽을 확인했다. 저걸 언제 봤지, 그런 의문이 들기도 전에 이준이 말했다.
“계속 가요. 또 이런 몬스터가 나타나면…….”
“…….”
“제가 지켜 줄게요.”
세아는 이준의 검은 눈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았다.
이전 생에서 이준은 수차례 자신을 배반했다. 시스템이 사라지는 게 싫었겠지.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준의 말, 이준의 표정, 이준의 눈빛. 게다가 그는 방금 자신을 구하고자 각성했다.
‘어쩌면 지금이 기회일지도 몰라.’
밖으로 나가면 이준이 스킬 창을 자세히 들여다볼지도 모른다. 이 던전을 완전히 공략하면 시스템이 사라진다는 걸 알아차릴 수도 있고.
기회가 왔을 때 속전속결, 던전을 돌파하는 게 옳다.
“좋아.”
생각을 바꾼 세아는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어떤 몬스터가 나올지 모르니, 네 역할이 중요해.”
“네, 누나.”
“믿을게, 정이준.”
이번엔 날 배신하지 마.
12.12
던전은 전보다 훨씬 더 까다로웠다.
그러나 이번엔 S급이 둘. 게다가 이준의 스킬은 하나씩 더 새롭게 개방되었다. 모두 ‘시스템 속성’이었고, 그 속성 스킬은 던전에서 거의 무적에 가까웠다. 이번에 세아는 무척 편하게 보스 룸 앞까지 도달했다.
“누나, 괜찮아요?”
보스 룸 앞에 서서 이준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어느 순간부터 그가 자신보다 앞서 걷기 시작했다. 시스템 속성 몬스터가 다수 등장하면서 그의 역할이 커진 것이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내내 길을 뚫었는데, 이준은 그리 지치지도 않은 듯했다.
“응, 난 멀쩡해. 네가 걱정이지.”
“저도 괜찮아요. 힘들지도 않고요.”
이준은 새삼스럽게 자기 손을 들여다보며 덧붙였다.
“S급은 신기하네요. 체력도 전보다 훨씬 좋아진 느낌이고.”
“원래 그래. 그래도 조금 쉬었다가 들어가자.”
최종 보스도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른다. 지금까지는 머리 열세 개 달린 용이었지만, 던전 구조가 달라지며 나타나는 몬스터도 변했다. 체력을 충분히 회복하고 가는 게 유리했다.
“좀 앉을까요?”
둘은 거대한 철제 문 앞에 나란히 주저앉았다.
문은 사람 힘으로는 열 수 없을 정도로 컸다. 머리 위로 수십 미터 이상 솟아 있는 듯 보였다. 이 큰 문을 두 사람의 손바닥만으로 열 수 있다니. 세아는 그런 생각을 하며 무심코 이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바로 눈이 마주쳤다.
세아는 깜짝 놀라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그를 보았다. 언제부터 쳐다보고 있었지.
“왜?”
“누나.”
“응.”
“궁금한 게 있어요.”
불길하다.
세아는 바로 고개를 끄덕이지 못하고 굳어 버렸다. 이 문 앞에서 이준은 매번 같은 걸 물었다. 시스템이 사라지면……. 그러나 지금의 그는 퀘스트의 보상을 모른다.
그때, 이준이 느린 어조로 물었다.
“언제 말해 주려고 했어요? 이 던전을 공략하면 시스템이 사라지는 거.”
세아는 눈을 크게 뜬 채 움직이지 못했다. 언제, 아니, 어떻게?
그녀의 충격을 보고도 이준은 웃는 낯을 유지했다. 차라리 이번에도 몬스터면 좋겠다. 세아는 간절히 빌었다. 그러나 이준의 말은 덤덤하게 이어졌다.
“누나와 함께 이 던전을 완전히 공략하면, 나도 필요 없는 사람이 된다는 거 말이에요. 정화 스킬 확인하다가 봤어요. 부가 설명을 열어 보니, 시스템을 소멸시키는 스킬이라고 적혀 있더라고요.”
“이유가 있었어.”
“그래요?”
이준이 눈매를 접으며 예쁘게 웃었다. 고개를 기울인 채 세아를 물끄러미 들여다보다 그가 물었다.
“그럼 보스를 죽이고 시스템이 사라져도, 누나는 나와 있을 건가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세아는 재빨리 몸을 기울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걱정하지 마. 시스템이 사라져도 난 가진 게 많아. 네가 원하는 만큼 팔아서 너 줄게. 그거면 뭐든 시작할 수 있고 어디 가서 힘든 일도 없을 거야. 필요한 인맥이 있으면 내가 연락해 줄게. 전 세계에 아는 사람 많으니까 뭐든 도와줄 수 있어.”
이준은 답하지 않았다. 침묵 앞에 조급해진 세아는 그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이준아. 이거 나한테는 정말 중요한 문제거든?”
마음 같아선 모든 걸 다 털어놓고 그를 설득하고 싶었다.
네가 나를 여러 번 배신해서 여러 번 죽었다고, 몇 번의 삶을 반복하고 있는지 아느냐고. 그러니 이번엔 제발 내 뜻대로 좀 움직여 달라고 하고 싶었다.
“네, 중요한 문제처럼 보이네요. 그래서, 뭘 준다고요?”
“얼마나 필요해? 아니, 얼마나 갖고 싶어?”
“전부를 달라고 하면.”
그의 입가에 맺히는 미소를 본다. 이준에게 저런 표정도 있었나.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의 얼굴, 오랜 시간 어둠 속에 도사리고 있다가 마침내 사냥감을 발견한 듯 스치는 안광.
“어쩔 건가요.”
“줄게. 당연히 다 주지. 뭐든 다 가져. 얼마를 달라고 하든 다 네 거야.”
이준의 미소가 짙어졌다.
성공이다! 세아는 환희에 차 그를 바라보았다. 고작 돈으로 미래를 살 수 있다니, 얼마나 헐값인가. 이제 더 이상의 회귀는 없다. 반복되는 죽음과 좌절과 권태도 없다. 그녀는 돈으로 자유를 사는 것이다!
“그래요?”
느긋하게 대꾸한 이준이 가방을 뒤져 비상 탈출 스크롤을 꺼냈다. 세아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멍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기쁨으로 부풀었던 마음이 불안으로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이준은 그녀와 눈을 맞추고, 한마디를 남겼다.
“누나는 진짜 바보예요.”
찍, 세아가 보는 앞에서 비상 탈출 스크롤이 찢어졌다. 이준의 몸이 픽셀 단위로 해체되듯 일그러지더니 팟, 사라졌다.
“뭐야?”
세아는 망연히 앉은 채 중얼거렸다. 앞에 보이는 건 이준이 앉아 있던 자리, 그리고 굳게 닫힌 보스 룸 문.
“대체 뭐냐고, 쟤?”
3장. 풍랑 가운데 배 가듯
12.13
정이준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다.
세아가 곧장 스크롤을 찢어 밖으로 나갔을 때, 이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컴컴하게 열린 던전 앞에 서서 세아는 망연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정이준?”
뭐가 문제였지. 돈도 준다고 했고, 필요한 인맥이 있으면 소개해 준다고도 했다. 가진 걸 전부 달라기에 그러겠다고 약속했는데 뒤통수를 맞았다.
“정이준!”
외침은 공허하게 흩어졌다.
죽지 않은 것에 감사해야 하나. 그러나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코앞이었다, 정말 코앞. 이준과의 관계도 그 어느 때보다도 좋았고 던전 구조가 바뀌었지만 보스 룸 앞까지도 수월하게 도착했다.
그런데 대체 왜. 대체 왜?
‘누나는 진짜 바보예요.’
내가 모르는 게 대체 뭐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