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급의 히든 퀘스트-14화 (14/112)

14화.

그의 몸이 가까이 다가옴과 동시에 희미하게 향수 냄새가 났다. 봄의 새순처럼 싱그러운 향이라 이준의 나이와는 어울린다는 무의미한 생각이 스쳤다.

맑은 하늘만 보며 얼어 있는데 목소리가 들렸다.

“야, 이세아!”

이준이 느리게 떨어졌다. 다가온 건 현호였다. 세아는 그에게 인사를 하기 전에 옆에 있는 사람부터 살폈다. 서아정.

둘 다 엄청 일찍 왔네. 그 생각을 안으로 밀어 넣으며 세아는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얘기 많이 들었어요.”

상투적인 표현이 아니라, 김현호는 정말 여자 친구 이야기를 자주 했다. 뭐만 하면 우리 아정이, 우리 아정이……. 세아는 김현호에게 친구가 없는 건 애인 얘기를 너무 많이 해서라고 믿었다.

“아, 언니. 저도 기사로 많이 봤어요.”

살갑게 웃으며 말을 붙여 오는 얼굴이 동글동글 예쁘다.

서아정은 올해 스물여덟, 미각성 상태다. 속이 환히 들여다보이는 물방울처럼 맑고 귀여운 얼굴. 손도 작고 발도 작고 키도 작았다. 김현호 옆에 서 있으면 머리 하나 이상 차이가 났다.

‘보호 본능 자극하는 타입이네.’

아정을 본 세아의 감상은 거기서 끝이었다.

“이쪽은 세아 남자 친구야. 이름이 뭐랬죠?”

현호는 능숙하게 아정을 이끌었다. 두 사람이 인사를 나누려는데, 갑자기 아정이 이준의 손을 덥석 붙들었다.

“와, 기사에서 봤던 것보다 훨씬 잘생기셨네요! 저랑 영상 통화 할 때도 각성 상태였는데 숨긴 거예요?”

“네? 아뇨, 그건 아닙니다.”

“그럼 갑자기 각성한 거죠? S급이라니, 정말 신기하지 않아요?”

“콜록.”

현호가 조금 불편한 듯 헛기침을 했다. 남자 친구가 눈치를 준 걸 알 텐데도, 아정은 이준의 손을 꼭 붙잡고 놓아 주지 않았다. 이준이 불편한 내색을 하며 도움을 청하듯 세아를 보았지만, 세아도 아정과 초면인지라 난감했다.

세아는 하는 수 없이 이준의 손을 잡는 척하며 아정의 손을 부드럽게 떨쳐냈다. 그런 다음 아정을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이름은 정이준이에요. 스물네 살.”

“아, 그렇구나. 그럼 동생이네요? 나 말 편하게 해도 될까요?”

“네, 그러세요.”

이번에도 세아가 대신 대답해 주었다. 그런 다음 흘끗 현호를 살폈는데, 과연 표정이 좋지 못했다.

‘틀림없이 오늘 가서 싸우겠네.’

어차피 남의 연애사다. 게다가 세아는 오늘 이들과 아름다운 데이트를 즐길 마음이 전혀 없었다. 이준을 만나러 온 것이니 이만 헤어지는 게 맞다.

생각을 정리한 세아는 현호를 보며 말을 시작했다.

“우린 사정이 생겨서…….”

“더 재밌게 놀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죠?”

이준이 뚝 말을 잘랐다. 세아는 합의되지 않은 말에 그를 돌아보았다가 뒤늦게 그의 제안을 떠올렸다. 오늘 재미있게 놀자고 했던가. 대체 그런 걸 해서 뭘 얻는다고.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 샌프란시스코로 날아가고 싶었다.

“너…….”

“그렇죠, 누나?”

“……그래.”

일단은 정이준에게 맞춰 줄 수밖에 없었다.

12.17

약초 던전 안에는 볼거리가 많았다.

전시장처럼 약초를 종류별로 분류해 놓았다. 손을 대면 파스스 흩어졌다가 잠시 후에 다시 나타나는 약초도 있고, 순한 눈이 달려 시선을 맞출 수 있는 풀도 있었다. 채집 키트를 이용하면 약초를 채집해 볼 수도 있어서, 미각성자인 아정도 즐겁게 놀았다.

“아정아, 이거 마셔.”

동굴처럼 컴컴한 내부에 앉아 잠시 쉬는 동안. 현호가 음료수를 사 왔다. 사람은 넷인데 캔은 세 개.

“너희도.”

현호는 캔 두 개를 세아와 이준에게 건네고 자기 캔에 빨대 두 개를 꽂았다. 그러더니 아정과 이마를 맞대고 다정하게 음료수를 마시기 시작했다.

“내 자기는 왜 이렇게 눈이 예뻐?”

“음……. 내 자기가 자꾸자꾸 바라봐서?”

우웩. 세아는 고개를 돌리며 토하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 무감하게 이준에게 캔 하나를 건넸다. 이준은 바로 움직이지 않고 현호와 아정의 다정한 모습을 잠시 관찰했다.

“누나.”

“응.”

지금이라도 던전 다시 가자고?

“나 목마르진 않은데, 하나로 나눠 마실래요?”

“그래? 그럼 너 마실 만큼만 마시고 나 줘. 난 목말라서.”

그렇게 말한 후 세아는 자기 몫의 캔을 따 빨대 없이 쭉쭉 들이켰다. 이준의 눈꼬리가 축 처지며 시무룩한 표정이 되었지만 세아는 거의 알아차리지 못했다.

12.18

“포션 제조 키트 체험입니다! 미각성자 사용 가능! 일회용 약초 키트 사용해 보세요!”

아정은 신이 나서 현호를 끌고 그쪽으로 달려갔다. 흰 조명으로 밝힌 동굴형 던전을 돌아다니느라 지친 세아는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준이 옆에 앉으며 물었다.

“그렇게 재미없어요?”

“뭐가 재밌어?”

“우리도 저거 같이 해 봐요.”

흘끗 보니 현호가 아정 옆에서 포션 제조 키트 사용하는 방법을 알려 주고 있었다. 약초를 사용해 기념 포션을 만드는 작업이었다. 아정 쪽으로 다정하게 고개를 기울인 현호의 얼굴은 봄바람처럼 부드러웠다.

그러나 둘이 얼마나 다정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든 세아가 알 바 아니었다. 그녀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저걸 왜? 기념 포션 쓸 데도 없고.”

“누나가 나 알려 주면 되잖아요.”

“너도 기념 포션 같은 거 필요 없잖아? 아니면 하나 사.”

“…….”

말실수도 없었던 것 같은데 갑자기 침묵이 찾아왔다. 세아 역시 이 침묵이 불편했지만 할 말을 찾을 수 없어 그냥 입을 다물었다. 포션 제조 키트 따위는 이미 그녀의 머릿속에서 사라진 뒤였다. 지금 중요한 건 샌프란시스코에 있었으니까.

잠시 시간이 지나, 현호와 아정이 가까이 다가왔다. 아정이 먼저 물었다.

“두 분은 저거 안 하세요? 재밌던데.”

“전 별로……. 정이준은 하고 싶대요.”

“아, 정말요? 그럼 저랑 가요, 제가 알려 줄게요! 저 다 배웠거든요!”

이준은 가고 싶지 않은 게 분명했다. 그러나 아정이 막무가내로 그의 손을 잡더니, 방금까지 현호와 함께 있던 곳으로 끌고 갔다. 현호는 신이 난 뒷모습을 보다가 세아 옆에 앉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들판에 피어나는 아지랑이처럼 즐겁던 현호의 얼굴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세아는 그의 표정을 살핀 후 넌지시 물었다.

“그냥 가서 하지 말라고 하지?”

“됐어.”

연애의 세계는 참으로 복잡하구만. 서아정 씨는 대체 왜 저래? 세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무심결에 이준과 아정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순간, 이쪽을 등지고 앉아 있던 아정과 정확히 눈이 마주쳤다.

‘뭐지?’

검은 눈이 얼음장처럼 서늘하다. 잠시 시선을 맞대고 있었을 뿐인데 던전에 처음 들어갔을 때처럼 오싹했다. 세아가 눈을 가늘게 뜬 순간 아정이 홱 고개를 돌렸다.

“어?”

“왜 그래?”

“아니, 방금…….”

방금 뭐였지?

12.19

언젠가 세아의 어머니는 이런 이야기를 해 주었다.

‘세아야, 너 직감이라는 걸 무시하지 마라. 직감은 아주 무서운 거야.’

‘에이, 그런 거 다 미신이야.’

‘아니야. 직감이라는 건 그냥 하늘이 번쩍 내려 주는 게 아니야. 네 뇌는 사실 지금까지 보고 듣고 겪은 모든 정보를 다 저장해 두고 있거든. 뭘 보고 느낌이 안 좋으면, 그건 뇌가 보내는 신호야. 지금까지 겪어 봤더니 이런 상황은 왠지 위험하더라, 이런 거.’

‘뭐야, 그게.’

‘나중에 알게 될 날이 올 거야.’

성인이 되고 이런저런 경험을 하며 세아는 어머니의 말이 옳다는 걸 깨달았다. 직감은 무시할 만한 게 아니다. 무언가를 보고 불길한 예감을 받았다면 보통은 적중한다.

세아는 아정에게 아이스크림 하나를 건네며 말했다.

“먹어요, 아정 씨.”

“고마워요, 언니.”

받아드는 아정의 눈을 유심히 들여다보았지만 아까와 같은 느낌은 들지 않았다. 세아는 고개를 돌려 다른 곳을 보는 척했다. 그러자 자기의 옆얼굴을 응시하는 아정의 시선이 느껴졌다.

‘차라리 지금 뭐냐고 물어볼까?’

마침 남자들은 점심거리를 사러 갔다. 둘은 약초 던전 깊은 곳에 마주 앉아 있었다. 사이에 테이블이 있어 거리도 적당했다. 세아는 자기 몫의 아이스크림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아정을 관찰했다.

그때, 혀를 날름거리며 아이스크림을 핥던 아정이 곱게 웃으며 물었다.

“여기 아이스크림 진짜 맛있네요. 비싸서 그럴까요?”

“어, 글쎄요. 맛있다니 다행이네요.”

“뭔가 밖에서 먹었던 아이스크림이랑은 좀 다른 것 같아요. 언니 아이스크림 좋아해요?”

“있으면 잘 먹어요.”

“와, 전 엄청 좋아하거든요. 집에 혼자 있으면 통으로 놓고 퍼먹어요. 텔레비전 보면서 먹으면 금방 없어지잖아요.”

남자들이 돌아올 때까지 그런 영양가 없는 대화만 이어졌다. 아정은 아까의 의심스런 태도는 싹 걷어치우고, 자기가 어떤 아이스크림을 왜 좋아하는지 구구절절 늘어놓았다.

손에 피자를 든 현호가 아정 옆에 앉으며 물었다.

“둘이 무슨 얘기 했어?”

“그냥 이런저런 얘기. 우리 자기한테는 비밀이야.”

그러면서 아정이 눈을 찡긋했다. 세아는 의아해서 입만 벌렸다.

‘녹차 아이스크림은 단맛이 덜할수록 꾸덕꾸덕 맛있는 것 같다는 얘기가 비밀이라고?’

“우리 자기, 피자 좋아하잖아. 아 해.”

“아이, 언니랑 이준 씨가 보잖아.”

“무슨 상관이야. 우리 자기 아―.”

“아아―”

세아는 구겨진 얼굴을 겨우 펴며 피자를 들었다. 그때, 옆에서 이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나도 먹여 줄게요.”

얜 또 왜 이래. 같이 피자 사러 갔다가 김현호한테 머리를 맞았나? 세아가 세상 기괴한 걸 다 보겠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이준이 들고 있던 피자를 살짝 아래로 내렸다.

“그렇게 싫어요?”

“우리 각자 먹자. 응?”

그때, 맞은편에서 아정이 말했다.

“이준 씨, 내가 먹여 줄게요. 아 해요.”

“네? 아뇨, 괜찮은데요.”

이준이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빼고 고개부터 저었다. 그러나 아정은 자리에서 일어나기까지 하며 피자를 내밀었다. 세아는 이번에도 습관처럼 현호의 표정을 살폈다. 과연, 그는 애인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굳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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