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어휴, 진짜. 성가시다, 성가셔.’
“정이준, 입 벌려. 피자 들어간다.”
그렇게 말한 후 세아는 이준의 입에 피자를 물려 주었다. 아정이 무안한 듯 자리에 다시 앉았고, 이준은 우물우물 피자를 씹으며 기분 좋게 세아를 바라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세아는 자기 몫의 피자를 먹을 뿐이었다.
12.20
원래 현호의 계획은 이랬다. 일단 약초 던전을 구경한다. 그런 다음 넷이 함께 이른 저녁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가능하면 술도 한 잔씩 곁들인다. 아정에게 친구 이세아를 소개해 주고 의심도 풀어 버린다.
하지만 인생은 뜻대로 풀리지 않는 법이었다. 약초 던전에서 나왔을 때, 현호와 아정 사이의 분위기는 최악이었다.
“저녁은 따로 먹자.”
연애 경험 없는 이세아가 눈치 없이 다른 소리를 하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세아도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로 헤어져 아정과 둘이 남은 현호는, 화를 다스리기 위해 심호흡을 해야 했다.
“아정아, 이렇게까지 해야 돼?”
“내가 뭘?”
아정은 뭐가 문제인지 전혀 모르는 듯 순진하게 눈을 깜빡였다. 현호는 아정을 정말 오래 좋아했지만, 이럴 때마다 사람 속은 도저히 알 수가 없다고 생각하곤 했다.
“이세아랑 그런 기사 난 건 미안해. 미안한데, 그렇다고 이렇게 유치하게 할 필요는 없잖아.”
“내가 뭘 했는데?”
“몰라서 물어? 네가…….”
너무 기가 막혀서 말이 턱 막혔다. 현호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됐어, 나중에 얘기하자. 지금 얘기하면 화낼 것 같아.”
“이준 씨 때문에 그래?”
아정이 현호의 손을 덥석 붙잡으며 물었다. 다 알면서. 현호는 욱하는 마음에 그 손을 뿌리칠 뻔했지만 겨우 참았다.
“왜 그랬어? 처음 만났을 때부터 계속, 나랑 하는 거 그 사람이랑도 하려고 하고 하나하나 챙겨주고.”
“화내지 마.”
아정의 눈에 순식간에 눈물이 차올랐다. 현호는 그녀의 눈물을 앞에 항상 마음이 약해졌지만, 이번만큼은 좀 달랐다. 기사 한번 났다고 이렇게 유치하게 복수하는 아정이 원망스러웠다.
“왜 이렇게 유치해? 이세아랑 아무 사이 아니라고, 네가 신경 쓰는 거 알아서 일부러 자리 만든 거야.”
“그래서 그런 거 아니야!”
아정이 확 목소리를 높였다. 그녀는 작은 두 손을 애처롭게 꼭 쥐고, 자기 말이라면 철석같이 믿는 애인의 품에 매달려 속삭였다.
“처음엔 그냥 정말 반가워서 그랬어. 근데 나중엔…….”
“아정아, 왜 울어.”
“언니랑 둘이 이야기하는 거 들었단 말이야. 몬스터 멸종이 어쩌고…….”
“뭐? 너 뭐라고 했어?”
현호가 아정을 품에서 떨어뜨렸다. 아정이 맑은 눈물을 흘리며 훌쩍였다.
“몬스터를 다 없앨 수 있다고, 던전도 다……. 난 그게 혹시 자기한테 피해가 가지 않을까 해서, 그래서 정이준 씨랑 친해져서 진짜인지 살짝 물어보려고…….”
“아정아, 확실히 말해 줘야 해.”
“확실해.”
아정이 손을 들어 뺨을 적신 눈물을 닦으며 반복했다. 울음에 젖어 오물오물 움직이는 입술이 애처로웠다.
“나 진짜 들었단 말이야. 세아 언니가 몬스터를 멸종시킬 거래.”
12.21
약초 던전에서 호텔로 돌아가는 길, 세아와 이준 사이에는 침묵만 흘렀다.
앞자리와 뒷자리 사이에 가림막이 있어 기사는 아무 말도 듣지 못할 것이다. 차라리 기사와 대화라도 나눌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러면 이 무거운 분위기를 깰 수 있을 텐데.
그럴 수 없으니, 세아는 한참을 생각했다. 현호와 아정이 하는 거라면 뭐든 따라하고 싶어 했던 이준의 행동. 돌이켜보면 그랬다. 음료수, 키트, 피자…….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 차는 소리도 없이 부드럽게 나아갔다. 저녁 시간 전의 오후, 나른한 햇빛이 땅을 적시고 세아의 뺨도 물들였다.
옆에 가만히 앉아 있던 이준이 가만히 그녀를 불렀다.
“누나.”
“…….”
“누나?”
“네 말대로 하루 놀았잖아. 이제 됐어?”
이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정적 속에서 세아는 한숨처럼 다시 물었다.
“네가 진짜 원하는 게 뭐야?”
김현호의 말이 틀렸을지도 모른다. 정이준은 돈이나 명예를 바라지 않았을지도. 세아는 마침내 어렴풋하게나마 정답을 찾았다. 거절당할 때마다 시무룩해지던 이준의 표정, 가까이 붙어 있으려고 열심히 따라오던 행동.
세아는 창밖에서 시선을 떼고 이준을 응시했다. 이준은 대답하는 대신 가만히 세아의 손에 자기 손을 겹쳤다. 시트를 짚었던 손을 감싸며 가만히 깍지를 낀다. 세아는 뿌리치지 않았다.
“이준아.”
남에게 이런 걸 묻는 건 정말 처음이다. 배 속이 조금 간지러웠다. 낯선 감각에 세아는 목을 가다듬었다.
“나랑 자고 싶어?”
무시무시한 적요가 두 사람을 덮었다.
이준은 거의 숨도 쉬지 못하고 세아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폭탄과도 같은 말을 던진 세아는 더없이 태연했다. 마침내 답을 찾은 자의 여유가 온몸에서 배어났다.
어쩐지 이상했다. 돈이나 명예를 원했다면 그는 세아의 제안에 응했을 것이다. S급 헌터가 자기 가진 돈을 다 준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무언가. 하지만 이준의 목적이 다른 데 있었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그러니?”
세아가 어조를 부드럽게 하여 대답을 재촉했다.
이준은 자기 속입술을 세게 짓이겼다. 생전 겪어 본 일 없는 감정이 치받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슬퍼서가 아니다. 찢어지는 고통에 저절로 고이는 눈물이었다.
“왜 그렇게 물어요?”
“그럼 어떻게 물어야 할까?”
“알잖아요.”
이준이 눈을 깜빡였다.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그러나 이준은 세아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당신이 구름처럼 보드라운 사람이라 좋아한 건 아니다. 그렇지만 이렇게까지 잔인할 이유가 무엇인가?
“내가 누나 좋아하는 거 알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그런 식으로 물어요?”
“그건 착각이야.”
세아는 이준의 손을 꽉 잡았다. 손깍지가 더욱 단단해졌고, 세아는 이준의 눈이 흔들리는 걸 보았다.
어릴 적부터 고달프게 살아온 스물네 살 어린 남자. 세아도 그 나이에는 천지를 분간하지 못하고 엉망이었다.
“내가 스물네 살일 때 처음 회사에 들어갔어. 갔더니 너무 힘들더라. 퇴근도 안 시켜 줘, 좋아하는 일도 아니고, 사람들도 너무 힘들게 하고.”
그러다가 한 남자를 만났다. 동기였는데, 웃는 게 예쁜 사람이었다. 아니, 그냥 생긴 게 제법 예뻤다. 성별을 분간하기 어려운 중성적인 얼굴에 세아보다 큰 키. “피곤하죠?” 라고 물으며 건네던 커피 한 잔.
“아무것도 아닌 위로에도 사랑에 빠졌다고 믿었어. 힘들 땐 쉽게 착각하는 거야. 원래 그래. 상황이 나아지면 금방 정신이 들어. 생각해 봐. 우리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다고?”
“그래서 이것도 착각이라고요?”
이준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천천히 물었다.
차는 계속해서 도로를 따라 나아갔다. 드문드문 선 차들이 차창 밖으로 휙휙 스쳤다. 해는 세아 쪽으로 졌다, 세아는 도시의 풍광을 등지고 자신을 보고 있었다.
지는 해 곁에서 당신은 더욱 눈부시다.
“이 고통이 착각인가요? 누나도 그때 그랬나요? 좀 아프다 말았어요?”
실제로 좀 아프다 말았다. 세아는 그렇게 대답하려다 입술이 뻣뻣하게 굳는 걸 느끼며 침묵을 택했다. 이준의 두 눈을 보고 있자니, 범람하는 강을 내려다볼 때처럼 희미한 긴장과 동요가 일었던 것이다.
“아니잖아요.”
눈도 깜빡이지 않았는데 후드득 눈물이 떨어졌다.
왜 이렇게까지 상처받은 건지 이준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세아가 “나랑 자고 싶어?” 라고 물은 순간, 뾰족한 송곳에 찔린 듯 몹시 아팠다. 차라리 그녀가 “네가 싫어.”라고 했다면 괜찮았을 것이다.
“날 버리려고 했죠?”
퀘스트가 끝나면 뒤도 돌아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 돈은 줬겠지. 전화하면 받아 주기도 했겠지. 필요한 게 있다고 하면 챙겨 주었겠지.
그러나 딱 거기까지. 세아는 이준을 자기 삶에 조금도 들여놓지 않았을 것이다.
“퀘스트가 끝나면 내가 필요 없으니까. 누나는 히든 퀘스트를 클리어하고 나면 누나 살 길 찾아서 가버리면 되니까. 내 앞에 그렇게 나타나 놓고, 잘 살고 있었는데 갑자기 찾아와서 나를 이렇게…….”
혼자 앉아 잔을 기울이던 당신이 얼마나 다른 세계의 사람처럼 보였는지 모를 것이다.
이야기 책 속에서 튀어나온 이방인 같았다. 다른 각성자와는 느낌이 달랐다. 조명 때문에 머리카락의 윤곽이, 또 어깨선이 빛의 끈을 둘러 둔 것처럼 반짝였는데 착시인 줄 알면서도 눈을 떼지 못했다.
세아는 그대로 손을 뻗어 자신을 끌어올렸다. 땅속에 산 채로 묻힌 듯 홀로 캄캄했던 삶에 세아가 들어온 순간, 불을 켠 듯 주위가 환해졌다.
그러고도 그녀는 태연했다. 이 모든 일이 너무 쉽다는 듯. 그 태연함이 이준을 매료시켰다.
“내가 왜 좋은데. 너 그것도 모르잖아.”
이준은 입을 다문 채 원망을 품고 세아를 응시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녀가 자기 인생에 구원자처럼 나타나서? 눈부신 망토를 두른 천사처럼 내려와 자신을 선택해서? 지금까지 만난 어떤 각성자보다도, 아니, 어떤 사람보다도 친절하게 대해 주어서?
도저히 모르겠어서 이준은 고개를 저었다.
“누나랑 만나기 전부터 누나를 좋아했던 것 같아요. 우리 이미 여러 번 만났던 것 같아요.”
세아가 움찔했다. 그러나 이준은 그녀의 기색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느리게 말을 이었다.
“누나랑 자고 싶어요.”
차라리 이 말이 나와 다행이다. 세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려 했다. 그러나 이준이 좀 더 빨랐다.
“누나가 내 마음을 궁금해하면 좋겠어요. 왜 내가 누나를 좋아하는지 정말로 알고 싶어 했으면 좋겠어요.”
그러니까, 이미 이유를 알고 있대도. 다 착각이라고 해도 어린애는 말을 듣지 않는다. 세아는 그에게 붙들린 손을 빼려고 했다. 그러나 이준의 악력이 생각보다 강했다.
뿌리치려면 뿌리칠 수 있었다. 그러나 겹쳐진 이준의 손이 절박하여 차마 냉정하게 굴지 못했다. 세아는 눈을 깜빡이며 붙들린 손을 내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