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나 그새 정이 들었나.’
이럴 필요가 없다. 정이준은 히든 퀘스트에 필요한 인물일 뿐이다. 퀘스트를 끝내고 나면 서로 미련 없이 등을 돌리고 각자의 길을 가게 될 것이다. 마음이 흔들릴 이유가 없다.
“그래도 정말 이 모든 고통이 착각이라면.”
이준의 음성은 비 내린 오후의 숲처럼 축축했다.
“키스해 주세요.”
“…….”
“나를 낫게 해 주세요.”
세아는 숨을 멈추고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뿌리치고 물러나도 좋으리라. 호들갑 떨지 말라고, 영화 찍냐고, 외로운 거 풀 데 없으면 딴 사람 알아보라고 해도 괜찮으리라.
그래도 이준은 떠나지 못하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자기가 무슨 짓을 해도 이준은 여기 있을 것이다. 그러니 원치 않는 키스는 하지 않아도 좋다. 그것을 깨닫고 나니 몸이 기울었다.
모순이다. 입을 맞추며 세아는 생각했다. 다 말도 안 되는 짓이야.
이준의 손이 세아의 뺨을 감쌌다. 그는 정말 고통에 처해 약을 원하는 사람처럼 절박하게 세아를 붙들었다. 혀가 갈급하게 얽히고 몸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세아는 중심을 잡기 위해 이준의 어깨를 잡았는데, 그 작은 움직임에도 이준은 뜨겁게 신음했다.
“집으로 가고 싶어요.”
입술과 입술 사이로 이준의 음성이 흘렀다.
“누나 집. 호텔 말고 진짜 누나 집에 가게 해 주세요.”
“와서, 뭐 하게.”
세아는 시선을 들어 그를 보았다. 어느새 이준의 얼굴에서 눈물이 싹 가셨다. 아까까지만 해도 애련한 빛으로 촉촉하던 눈이 열기를 품고 번뜩인다.
허락이 필요치 않은 투로 그가 답했다.
“자고 싶어요.”
12.22
세아의 집은 멀지 않았다. 차는 약초 던전이 있는 근교에서 서울로 진입하다가 방향을 틀었다. 한적한 강 가까이 높이 솟은 이층집이었는데, 마당까지 넓게 거느리고 있었다. 차는 부드럽게 입구에 섰다.
외관을 자세히 볼 정신도 없었다. 세아가 출입 카드로 문을 열었고 그러기가 무섭게 이준이 문을 닫았다. 생활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차가운 대리석 현관에 서서 그대로 이준이 세아를 안았다.
“잠깐, 정이준……!”
입술이 다시 겹쳐졌다. 센서 등이 켜지고 주위가 밝아졌지만 이준은 멈추지 않았다. 그가 한 손으로 세아의 머리를 감싼 후 그대로 벽에 기대서게 했다.
세아의 손에서 노란 클러치 백이 툭 떨어졌다. 잠시 시간이 지나고 불이 다시 꺼지니 사방이 어둠에 잠겼다. 세아는 고개를 뒤로 젖혀 이준을 밀어내며 중얼거렸다.
“안으로 들어가자.”
“내가 강요했나요?”
“아니.”
“그런데 왜 이렇게 심장이 뛰어요.”
내 심장이 뛴다고? 세아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자기 가슴에 갖다 댔다. 정말로 심장이 마구 뛰는 게 느껴졌다. 이준이 두려운 것도 아니고 숨이 가쁜 것도 아닌데 왜.
세아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해도 돼. 하자.”
“왜요, 그래야 내가 누나를 도울 테니까?”
이준이 입술을 귀 가까이 갖다 대고 속삭이듯 물었다. 정곡을 찔린지라 세아는 조금 움찔했다. 그가 한때의 열정에 잠겨 착각하고 있는 거라면, 하룻밤 몸을 합하고 원하는 걸 얻어 내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몇 번을 해도, 내가 누나를 돕지 않는다면요.”
이준이 어깨에 이마를 기대고, 그대로 고개를 돌려 세아의 뺨을 쏘아보았다. 어둠을 응시하는 그녀가 더없이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세아의 심장이 뛴다, 할 수만 있다면 이준은 거기 입을 맞추었을 것이다.
“그래도 날 허락할 건가요.”
마침내 세아가 고개를 틀어 이준을 보았다. 어둠 속인데도 눈빛은 선명하다. 그대로 이준을 빨아들일 것처럼.
“아니.”
“…….”
“날 돕지 않을 거라면 이대로 나가, 정이준.”
둘의 시선이 한 데 얽혔다. 소리도 없이 둘은 맹렬히 다투었다. 그러나 세아는 자신이 승자가 될 것을, 이준이 굴복하여 자신의 뜻에 따를 것을 직감했다.
이준의 눈매가 살며시 일그러졌다. 그는 세아의 귓불을 잘근 씹더니 원망하듯 속삭였다.
“비겁하네요, 누나.”
“너도 마찬가지야.”
“던전을 완전히 공략하고, 시스템이 사라져도…….”
이준이 그대로 고개를 숙여 세아의 흰 목에 입을 맞추었다.
“나 버리지 마요.”
세아를 붙든 손에 더 힘이 들어갔다. 세아는 어쩔 줄 모르고 매달려 오는 짐승을 맞이하는 기분으로 그의 등을 한차례 쓸었다.
“그래, 이준아.”
부러 더 다정하고 달콤하게 부른다. 의미 없는 대답임을 알기에. 공허한 약속이다. 버리지 말아 달라니, 정이준은 물건이 아니고 자신도 그의 소유주가 아니다.
그가 이렇게 매달리는 것도 한때의 착각이다.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자기 곁을 떠나 나름의 인생을 개척하러 가겠지. 목숨이라도 빚진 양 절절하게 굴어 놓고 그러면 좀 얄미울 것 같다.
세아는 홀로 조금 웃었다.
“정말 버리지 마요.”
“너나 가지 마.”
세아가 픽 웃으며 대꾸했다. 대단한 의미가 있는 말은 아니었다. 어차피 갈 거면서 매달리는 게 우스워 뱉은 말인데, 이준의 기세가 갑자기 변했다.
“안 가요.”
난 절대 안 가요, 거듭 속삭이며 그가 세아의 옷에 손을 댔다. 미끄러운 단추가 하나하나 풀리고 입술은 여전히 가까운 곳에 있었다.
한 손으로 단추를 풀며 그가 느릿하게 세아의 허벅지 안쪽을 쓸었다. 보이지 않는 곳인데도 그의 크고 단단한 손이 살결을 쓰는 모습이 선연했다.
“누나가 어디 있든 찾아 낼 거예요.”
몸이 기분 좋게 달아올랐다. 침실로 가자니까, 세아는 그 말을 하려고 했지만 어떻든 좋을 듯했다. 눈을 감고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12.23
먼저 눈을 뜬 건 이준이었다.
창밖은 아직 새벽의 권역. 침실이 푸르렀다. 액자형 창이 밖을 향해 환하게 트여, 새벽에 잠긴 세상이 푸른 그림 같았다.
누운 채로 고개를 돌리면 옆에 세아가 잠들어 있다. 자기 쪽으로 몸을 돌리고 눈을 감은 모습이 아름다웠다. 긴 속눈썹마다 새벽빛이 맺혀 푸른색과 검은색이 어룽지듯 섞여 있었다.
살짝 손을 대 볼까? 그러면 세아가 곧장 눈을 뜰 것 같았다.
‘어쩌면 이렇게 입술도 빨갛지?’
객관적으로 세아의 얼굴은 혈색이 돌아 생기 있어 보였으나 입술이 유독 붉은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준에게는 그녀의 모든 것이, 뺨으로 몇 가닥 흩어진 머리카락조차 유혹적이었다.
‘꽃물 든 것 같다.’
이준은 누운 채로 손을 들어 살짝, 아주 살짝 세아의 입술에 손을 댔다. 세아는 간지러운 듯 고개를 약간 흔들었으나 깨지는 않았다.
보드라운 입술을 쓸다가 빛을 머금은 속눈썹도 조금 만져 보았다. 이불 밖으로 드러난 맨 어깨를 쓰니,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열이 올랐다.
이대로 세아를 깨워 다시 몸을 합하고 싶은 욕구가 치밀었다. 거절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제 그토록…….
“으음…….”
세아가 신음하며 조금 뒤척이자 정신이 들었다.
새벽부터 사람을 깨우진 말자. 그건 좀 더 가까워진 다음에 하는 게 나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이준은 세아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침대 아래로 내려왔다. 대강 옷을 걸친 후 천천히 침실부터 둘러보았다.
아까 보았던 액자형 창문, 회색 시트를 깐 아늑한 침대, 침대와 세트로 제작한 듯 깔끔한 흰색 서랍장. 바닥에는 어두운 색 카펫이 깔려 있었는데 작은 보풀 하나 없었다. 위를 올려다보니 지붕 바로 아래 있는 것처럼 가운데로 갈수록 천장이 움푹 들어가 높아지는 형태였다.
소리가 날까 염려하며 침실 문을 열었는데, 작은 소음조차 들리지 않았다. 집에서 매일 듣던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조차 없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주방은 어디지?’
어제 너무 정신이 없어 집을 제대로 둘러보지 못했다. 어마어마하게 크고 세련된 집이라는 것만 어렴풋이 알았을 뿐이다.
주방으로 가려면 복도를 지나야 했다. 집에 복도가 있다니, 이준은 두리번거리며 걸었다. 바닥에도 벽에도 먼지 하나 없었지만 어쩐지 생활감이 하나도 없었다.
주방도 침실과 느낌이 비슷했다. 찬장 문은 흰색 아니면 회색, 사용한 적이 한 번도 없는 것 같은 깔끔한 인덕션 레인지와 내장형 오븐까지. 넓은 거실 한편에 주방이 있는 형태라, 아일랜드 바 너머로 통유리창이 보였다.
물방울 얼룩 하나 없는 싱크대를 쓸며 유리창 쪽으로 다가갔다. 엷은 회색 소파에 놓인 쿠션마저 매일 정리하는 듯 가지런했다. 아니, 어쩌면 쿠션 같은 건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커튼을 걷으니 바깥 풍경이 환히 내다보였다. 근교에 있는 집이라, 앞이 탁 트였고 멀지 않은 곳에 강이 보였다. 서서히 해가 뜨기 시작하는 시간, 강은 비늘 반짝이는 뱀처럼 유유히 흘러갔다. 그대로 창가에 서서 이준은 세아를 생각했다.
그 흔한 여행 기념품 하나 없다. 취향을 보여 줄 수 있는 액자 같은 것도. 일 년에 일주일만 머무는 휴가용 별장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듯했다. 아니, 별장이라도 이렇게 황량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런 걸 생각하고 집에 데려가 달라고 한 건 아닌데.
이준은 다시 주방으로 돌아가, 실례는 아니겠지 망설이면서 냉장고를 열었다. 관리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지 안에 재료는 충분했다. 대강 둘러보니 조리 도구도 완벽하게 갖춰져 있다.
이준은 셔츠 소매를 걷고 도마부터 꺼냈다.
12.24
세아는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랐고, 대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부모님과 함께 지냈다. 회사에 다니면서 생활비를 보태고 자기 적금도 차근차근 쌓아 나가는 게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그러나 ‘재앙’이 시작되면서 그녀의 삶은 완전히 변했다.
중요한 변화는, 부모님과 따로 살게 되었다는 것. 부모님 역시 아직 서울 근교에 살지만 세아는 따로 살 때가 된 것 같다고 판단했다. 스물다섯 살 무렵이었다.
부모님은 갑자기 달라진 세상에 적응하지 못했다. 현명하고 재빠른 분들이라고, 늦게 나이 드는 분들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만도 않았다. 부모님 곁에서 힘이 되어 드리고 싶었으나 끊임없이 쏟아지는 불안과 불만에 세아는 그대로 나가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