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그렇다고 부모님이 불행하게 살고 계신 건 아니다. 세아가 산 전원주택에서 안전하게 지내고 계신다. 그래서 세아도 마음 편하게 혼자 살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해도 혼자뿐인 집에 들어가기 싫은 날이 많았다. 시간이 갈수록 호텔에서 머무는 게 일상이 됐다. 그게 특별히 쓸쓸했던 건 아니다. 나이가 들면 다 겪는 일이겠거니 한다.
“정이준?”
침대에서 느리게 몸을 일으키며 중얼거렸다. 침실에 인기척이 없다. 세아는 멍하게 일어나 침대에 걸터앉았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눈을 문지르고, 침실 옆에 있는 드레스 룸에서 무릎 아래까지 떨어지는 실내복을 찾아 걸쳤다.
‘화장실이라도 갔나?’
슬리퍼를 신으며 그렇게 생각했다. 침실 밖으로 나가 거실 쪽으로 걸으니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세아는 꿈을 꾸는 듯 몽롱하고 낯선 기분으로 소리를 향해 나아갔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유리창으로 새어드는 눈부신 아침 햇살. 그리고 그 햇살을 향해 서서 텅, 텅, 무언가를 써는 이준의 뒷모습.
“이준아?”
부름에 이준이 고개를 돌렸다.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조금 웃었다.
“누나. 이것만 넣고 깨우러 가려고 했는데.”
식탁을 보니 이미 몇 가지 음식이 차려져 있다. 대단한 한식은 아니고 간단히 만들 수 있는 조식 수준이다. 다가가니 이준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인사했다.
“잘 잤어요?”
고개를 들어 그를 본다.
다시 말하지만, 특별히 외로웠던 건 아니다.
12.25
허브를 뿌려 볶은 달걀 요리. 가장자리를 잘라 내고 세모 모양으로 잘라 바삭바삭 구운 식빵. 얇게 썰어 놓은 치즈 몇 장. 양상추와 올리브, 방울토마토로 만든 샐러드.
“커피 마셔요, 누나?”
이준이 커피 머신 앞에 서서 물었다. 아침이라 덜 풀린 목소리는 낮고 허스키해서 평소와 느낌이 좀 달랐다.
“한 잔만.”
“뜨겁게요?”
머그잔에 커피가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세아는 잘 차려진 식탁을 앞에 두고 앉아 멍하게 기다렸다. 솔직히 지금 상황이 잘 이해 가지 않았다.
곧 다가온 이준이 세아 앞에 커피 잔을 내려놓고 살짝 웃었다.
“전 커피 안 마셔요.”
그렇게 말하고 맞은편에 앉은 그가 조심스럽게 세아의 얼굴을 살폈다. 세아는 목소리가 잠긴 것 같아 헛기침을 하고 포크를 들었다.
“언제 일어났어?”
“얼마 안 됐어요.”
“깨우지. 그냥 사람 부르면 되는데.”
“해 주고 싶어서요.”
음식은 모두 세아가 아는 그 맛이었다. 달걀 볶음은 달걀 볶음 맛, 샐러드는 샐러드 맛, 구운 식빵은 구운 식빵 맛……. 그래도 막 만든 음식 특유의 따뜻함은 마음에 들었다.
“냉장고에 재료가 가득하더라고요.”
“관리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대화가 뚝 끊어졌다. 이준은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자기 식사에 집중했다. 침묵 가운데 식기가 접시에 부딪치는 소리만 들려 왔다. 세아는 억지로 대화를 시작하지 않고 기다렸다.
“맛이 어때요?”
“괜찮네.”
“누나는 호텔에 익숙하니까, 이런 게 더 낫지 않을까 하고.”
세아는 뭔가 말하려는 듯 고개를 들었다가, 이준과 눈이 마주치자 다시 시선을 음식에 고정했다. 말을 꺼내려다가 만 듯한 행동이라 이준은 잠시 포크를 내려놓고 물었다.
“왜요?”
“아무것도 아니야.”
“말해 봐요. 맛이 없어요?”
“아니, 그것보다는.”
세아는 도자기 접시에 예쁘게 플레이팅까지 된 음식을 바라보다가 조금 작은 소리로 말을 이었다.
“난 한식 더 좋아해서.”
“아.”
“호텔식 조식 싫어하는 건 아니야.”
아침부터 요리한 사람에게 이런 말을 하고 싶지 않았는데, 사실이 그런 걸 어쩌겠는가. 그를 타박한 게 아니라 그저 자기 취향 이야기였는데, 이준의 표정이 시무룩하게 변했다.
이제 저 정도는 알아보게 되었다. 세아는 그의 얼굴을 살피며 그런 생각을 곁들였다. 실망한 표정,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아쉬운 표정.
“다음엔 한식으로 차릴게요.”
“차려 달라는 소리는 아니었는데. 사람 부르면 되는데, 뭐. 너도 S급으로 살다 보면 익숙해질 거야. 아니, 그 전에…….”
시스템이 사라지려나, 세아는 그 말을 안으로 밀어 넣었다.
이준도 이어질 말을 짐작한 듯했다. 하지만 그는 그 이야기를 꺼내는 대신 자기 몫의 빵을 찢으며 다른 걸 물었다.
“여기 자주 오나요?”
“보면 알잖아. 거의 안 와.”
“근데 집이 엄청 예쁘고 깨끗하네요. 이것도 관리하는 사람이 있는 거죠?”
“응.”
세아가 문득 고개를 들어 이준의 먹는 모습을 살폈다. 말하는 걸 보니 집을 조금 둘러 본 것 같아 부드럽게 권했다.
“너 가질래?”
“네?”
“이 집 말이야. 너 가져도 돼.”
이준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먹기를 멈추었다. 세아는 그가 입을 열기 전에 먼저 말을 이어 갔다.
“퀘스트 클리어 도와주면 원하는 거 주겠다고 했잖아. 각성한 다음 한국 온 지 얼마 안 됐으니 너도 호텔만 전전했을 거 아니야. 호텔에서 지내는 거 편하긴 한데, 요리하고 이러는 거 보니까 넌 집에 정착하는 게 더 맞을 수도 있겠다 싶어서.”
고작 몇십 분 정도 사람이 움직였을 뿐인데 집 분위기가 달라졌다. 모델 하우스 같던 주방과 거실에 활기가 돌고, 아침 풍경도 왠지 평소와는 다르게 느껴진다. 느긋하면서도 정확하게 움직여 음식을 만들던 이준의 뒷모습도 떠오른다.
이준에게는 생활의 감각이 있다. 손끝 야무지게 음식을 만들고 공간을 돌보고 집을 알차게 꾸며 가는 감각이. 아주 잠깐 보았을 뿐인데도 느낄 수 있었다.
‘좋은 집이니 좀 더 어울리는 사람에게 줘도 좋을 거야.’
생각이 거기 미친 순간, 이준이 툭 대답했다.
“그렇게 허둥지둥 밀어내지 않아도 되는데요.”
이준은 어제보다 한결 안정된 듯했다. 울면서 좋아한다고, 버리지 말라고 매달리던 때와는 조금 달랐다.
하룻밤 잤다고 자신감이 붙은 건가, 삐딱하게 생각하며 이준을 응시하는데 그의 손이 약간 떨리는 걸 발견했다. 음식을 먹는 척하며 동요를 감추려던 이준은, 포크가 접시에 부딪혀 쨍 소리가 나자 무의미한 노력을 포기했다.
“그렇게까지 말하지 않아도 누나랑 같이 던전으로 갈게요.”
“…….”
“내가 이럴 줄 알고 어제 허락한 거죠?”
이준이 억지로 웃었다. 세아는 자기가 비겁했다는 걸 인정했다. 함께 던전에 가는 조건으로 밤을 허락했으니, 이준은 뻔뻔스럽게 고집을 부리지 못할 것이다. 어제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이 집은 필요 없어요.”
덤덤하게 거절하는 목소리가 나직하다.
“누나랑 좀 더 가까워지고 싶어서 집에 데려가 달라고 한 거예요. 그러니까 누나 없는 이 집은 필요 없어요.”
대답할 말이 없어서 세아는 침묵을 지켰다. 구름처럼 몽글몽글 풀렸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처음에는 쉽게 생각했는데, 이준은 정말 어렵다. 돈을 많이 주면 되겠지, 시스템이 사라져도 부자로 떵떵거리며 살게 해 준다고 약속하면 되겠지, 사칙연산 문제를 푸는 것처럼 간단히 생각한 과거가 우스워질 정도로.
이준이 원하는 것은 자신의 마음이다.
그러나 세아는 지금까지 한 번도 누구를 좋아해 본 일이 없다. 이성을 사랑한다,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도 잘 모르겠다. 부모님도 사랑하고 친구도 사랑하는데, 애인은 뭐가 그렇게 특별하다는 것인지.
“내일 캘리포니아로 갈 거야.”
이준을 바라볼 때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층 보스 몬스터는 그때 다 처리했으니까 바로 보스 룸 앞으로 가면 돼. 정화 스킬은 아직 있지?”
“네.”
“시스템이 사라지면 어떤 혼란이 닥칠지 몰라. 약속했던 대로 시스템이 사라진 후에도 널 돕겠지만 너도 마음의 준비를 해.”
팔꿈치를 식탁에 댄 세아가 손바닥으로 눈가를 감쌌다. 혼란스러우면서도 마침내 ‘그날’이 온다니 긴장이 되기도 했다. 이준은 이번에야말로 자신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드디어 지긋지긋한 회귀의 굴레에서 놓여나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긴 숨을 내쉬고 다시 고개를 들어 이준을 보았다. 그런데 그의 표정이 좀 이상했다. 그는 세아를 보는 게 아니라 세아의 등 뒤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왜 저러지, 의아함을 품고 세아가 고개를 돌린 그 순간.
끼기긱―. 손톱으로 철판을 긁는 듯 소름 끼치는 소리가 귀에 꽂혔다. 세아는 허공에, 자기 집 거실 한복판에 나타난 검붉은 균열을 보았다. 마치 거대한 검으로 허공을 가른 듯, 지직거리는 선이 길게 엉켜 있었다.
“던전이야.”
세아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그녀는 그대로 이준 쪽으로 몇 걸음 뒷걸음질을 쳤다. 보호 스킬을 가동하고 숨을 죽인 채 기다렸다. 왜 거실에서 던전이 열리는지는 나중에 알아봐도 된다. 지금 중요한 건 살아남는 것.
그때, 이준이 뒤로 바짝 다가와 말했다.
“느낌이 안 좋아요. 누나, 도망가는 게 낫겠어요.”
“도망 못 가. 던전이 열리면 한 시간 정도는 범위 밖으로 나갈 수가 없어. 들어오는 거라면 몰라도……. 다른 헌터에게 도움 요청하게 가서 내 핸드폰 가져와.”
“하지만…….”
“난 알아서 싸우니까 가져와!”
이준이 재빠르게 침실로 달려갔다. 세아는 마치 갈라진 상처를 양쪽으로 잡아 벌리듯 서서히 벌어지는 균열을 노려보았다. 역시 시스템은 죽이는 게 옳다. 그럼 적어도 아침 먹다 생명의 위협을 느낄 일은 없을 거 아닌가!
끼리릭, 끼릭…….
안에서 기어 나온 건 쪼글쪼글한 피부를 가진 난쟁이 몬스터였다. 세아의 허리에 간신히 미치는 키, 탄력 없이 축 늘어진 피부, 머리카락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 민머리, 동공까지 새하얀 눈.
눈이 멀었구나.
처음 보는 몬스터였지만 세아는 즉시 알아차렸다. 빛을 받아들여야 하는 동공까지 표백한 것처럼 하얗다. 아마 앞을 못 보는 대신 소리나 냄새에 민감할 것이다. 이준이 제발 여기까지 조용히 와야 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