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현호는 침묵을 지켰다. 세아는 와락 달려들어 그의 멱살을 쥐고 흔들고픈 충동을 겨우 참아냈다.
“너 여기 나랑 와 본 적은 있어도 주소는 모르잖아. 아니면 뭐, 검색이라도 해서 보내 줬어? 그랬으면 진작 헌터들 왔어야 돼.”
“이세아.”
“왜 경보 울리고 신고했다고 했어?”
마음이 급해서 허둥지둥 왔을 수는 있다. S급 헌터가 그런 바보 같은 실수를 하면 안 되는 거지만 죽을 죄는 아니다. 그러나 김현호는 아예 신고조차 하지 않았으면서 경보를 울렸다고 거짓말을 했다. 대체 왜?
모르는 것투성이다. 갑자기 열린 던전, 쏟아지는 새로운 몬스터, 전투 직후의 흥분으로 눈을 번들거리며 자기를 보는 김현호까지.
“너 저번에 인터뷰장에서 나한테 얘기한 거, 정말이었어?”
기분 탓일까, 현호의 목소리가 유난히 서늘했다. 그는 답하지 않는 세아를 거칠게 다그쳤다.
“몬스터 멸종 어쩌고 한 거, 사실이었냐고.”
“김현호, 지금 그게 중요해?”
“사실이구나.”
세아는 부인하지 못했다. 그러기엔 현호의 확신이 너무 강했다. 그는 선 채로 숨을 고르더니 욕을 내뱉으며 벽을 세게 쳤다. 그가 타오르는 듯 사나운 시선으로 세아를 노려보았다.
그와 늘 사이좋았던 건 아니다. 그러나 이런 시선을 받는 것도 처음이었다. 정말로 달려들어 죽일 듯한 눈빛. 세아는 물러나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었다. 현호의 입에서 원망 어린 목소리가 쏟아졌다.
“꼭 그래야겠냐? 그때 자꾸 뒤통수 때린다는 사람이 정이준이었어, 맞지? 아정이한테 이야기 듣고 내가 얼마나…….”
“아정 씨?”
세아가 얼굴을 찡그렸다.
새로운 국면이다. 현호가 자기 히든 퀘스트를 알아차린 건, 전에 했던 이야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여기서 서아정 이야기가 왜 나온단 말인가?
“무슨 소리야? 아정 씨가 뭐랬는데?”
“너희 둘이 몬스터 멸종이 어쩌고 했다더라. 기가 막혀서. 이세아, 너 진짜 할 거야?”
“뭐? 우린 그런 얘기 한 적 없어.”
이준과 그런 이야기를 나눌 상황이 아니었다. 김현호 커플과 떨어져 단둘만 있을 시간도 없었을 뿐더러, 바보가 아니고서야 그런 트인 공간에서 히든 퀘스트 이야기를 하겠는가. 세아도 이준도, 시스템 살해나 몬스터 멸종을 입에 담지 않았다.
“됐고, 진짜 할 거냐고.”
머리가 터질 것 같았지만 세아는 결정해야 했다.
김현호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게다가 그는 전에 시스템 살해에 대해 부정적 생각을 표현한 적도 있다. 일단 여기서 살아 나가 상황을 파악하고, 아정이 대체 어떻게 자기 히든 퀘스트에 대해 알았는지도 캐내야 한다.
“안 해.”
현호는 믿지 않는 기색이었다. 하긴,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면 세아 자신이라도 못 믿을 것이다. 일단은 유일한 아군인 현호를 진정시키고 타일러야 했다. 세아는 목소리에 힘을 주어 쐐기를 박듯 말했다.
“어차피 정이준 없으면 하지도 못해. 다 망했다고.”
쾅, 쾅,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계속 울렸다. 세아는 살인자처럼 번뜩이는 현호의 눈을 보며 또박또박 뱉었다.
“뭐, 계속 이러고 있을 거야? 일단 살아 나가고 생각해. 다 설명할 거고, 정이준 죽으면 왜 다 망한 건지도 얘기해 줄 테니까.”
“좋아.”
김현호가 반쯤 이를 갈며 대답했다. 한숨 돌린 세아는 드레스 룸 문을 열기로 결정했다. 아직 현호를 믿을 수 없다. 그가 언제 달려들지 모르니 일단 몬스터로 시선을 분산시켜야 한다. 세아가 그대로 문고리를 쥐었다.
푹.
배를 뚫고 튀어나오는 서늘한 날붙이.
“넌 거짓말하면 티가 나, 이세아.”
검이 비틀리니, 내장이 찢기는 섬뜩한 고통이 밀려온다.
“미안하다.”
이세아는 죽었다.
4장. 잘못된 세상
13.1
플래시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과거로 돌아올 때마다 정신 차리라는 듯 머리를 후려치던 소리가 없으니 어쩐지 이상했다. 순간적으로 세아는 이번에야말로 정말 죽은 건가 생각했다.
지옥이라도 좋으니 정말 죽은 거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세아는 느리게 눈을 떴다.
그녀는 익숙한 객실 침대에 혼자 누워 있었다.
“진짜 지친다.”
한숨을 내쉰 세아가 작게 중얼거렸다. 목소리를 내어 말하니 정말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을 정도로 지친 것처럼 느껴졌다. 몸은 전혀 무겁지 않은데 정신이 너무 피로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정이준과 김현호의 얼굴.
‘김현호가 그런 건 이해가 가. 그런데 아정 씨는 왜 그런 이야기를 했지? 어떻게 알고?’
그녀는 약초 던전에서 이준과 퀘스트에 대해 말한 적이 없다. 아정과 단둘이 있을 때도 시답잖은 아이스크림 이야기나 하지 않았나. 그런데 아정이 어떻게 자기 히든 퀘스트를 알아 내 현호에게 이야기하기까지 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혹시 이준이 말했나. 그랬을 것 같진 않다. 이준은 아정의 접근을 내내 거절하고 불편하게 여겼다. 그에 대한 모든 걸 알지는 못하지만, 히든 퀘스트를 아무에게나 떠들고 다닐 성격이 아니란 건 확신했다.
‘아, 모르겠다.’
게으르게 눈을 움직여 창을 살피니, 암막 커튼 때문에 시간을 가늠할 수 없었다. 핸드폰은 바로 옆 서랍장에 있겠지만 몇 시인지, 며칠인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보스 몬스터에게 씹혀 죽고 이제는 친구에게 찔려 죽고. 가지가지 한다, 이세아.’
이럴 때가 아닌 걸 아는데 몸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세아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리며 아이처럼 몸을 웅크렸다. 이대로 한숨 자고 싶었는데, 몸은 완전히 깨어난 상태인지 쉽게 잠에 들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어서 세아는 계속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다 아주 희미한, 선잠에 빠졌던 것도 같다.
눈앞에 이준이 나타났다. 목에 감기는 칼날, 살과 근육과 뼈가 한 번에 잘리는 소리, 스르르 무너지던 그의 몸과 그보다 먼저 굴러 떨어지던 머리통.
“헉!”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세아는 수백 미터를 달린 듯 거칠어진 숨을 진정시키며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 마치 방금 한 번 더 죽었다가 살아난 듯한 오싹한 느낌이 그녀의 몸을 덮쳤다.
세아는 가쁘게 오르내리는 가슴에 손을 얹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언가 이상한 느낌이 정신을 갉작거렸다. 한동안 그 거슬리는 느낌의 원인을 추적하던 세아는 새삼 놀라 번쩍 고개를 들었다.
인터뷰장이 아니다. 칼에 찔려 죽은 충격과 피로 때문에 바로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죽으면 늘 돌아오던 그 장소가 아니었다.
어쩌면 자신은 죽은 게 아닌지도 모른다. 칼에 찔리고 살아남아 어찌어찌 치료를 받은 후 이리로 이송되어 왔을지도. 그런 황당한 가정까지 떠올라 세아는 찔렸던 배를 손으로 더듬어 보았다. 통증은 전혀 없었다. 애초에 상처 따위는 입은 적도 없는 것처럼.
‘이럴 때가 아니야.’
세아는 허둥지둥 침대 아래로 내려왔다. 서랍장에 놓인 핸드폰을 낚아채 날짜와 시간을 확인했다.
5월 11일. 오후 10시 36분.
“11일이라고?”
세아는 눈을 깜빡이며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그런다고 날짜가 갑자기 12일로 바뀌는 일은 없었다. 인터뷰는 5월 12일 오후 2시 예정이었다. 당연히 죽을 때마다 돌아간 날도 5월 12일이다. 그런데 갑자기 하루 전날인 11일 밤 10시에 눈을 뜨다니.
혹시 몰라 퀘스트 창을 열어 히든 퀘스트를 확인했다.
[히든 퀘스트: 시스템 살해
히든 퀘스트 획득 조건: 죽음
클리어 조건: 지정인(정이준, 각성 등급: ?)과 접촉 후 협력하여 시스템 보스 던전 완전 공략.
클리어 실패 페널티: 회귀]
내용은 달라진 거 하나 없이 똑같았다. 하루 전으로 돌아온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세아는 일단 창문을 가린 커튼부터 걷어 버렸다. 빛 한 점 없는 어둠 속에 있다가 갑자기 커튼을 걷으니 순간 눈이 부셨다. 대단할 거 없는 야경인데도.
‘밖으로 나가야 하나?’
그저 시스템 오류일지도 모른다.
사실 요즘 시스템이 불안정하긴 했다. ‘시스템 속성’ 몬스터가 튀어나오고, 거실 한가운데서 던전이 열리고 그 던전에서는 또 새로운 속성의 몬스터가 기어 나왔다. 이건 히든 퀘스트 클리어 조건을 알아내지 못해 10년씩 다시 살 때도 경험하지 못한 일이다.
재앙 발발 이후 1년 정도는 그야말로 전 세계가 지옥이었다. S급 헌터 몇 명을 비롯해 상위 헌터들이 나타났지만, 새로운 형태의 던전이 계속 나타났고 전산도 엉망이었다.
그렇게 1년이 지난 후에야 세계는 조금 안정을 찾았다. 가끔 던전이 열리긴 했지만 익숙한 형태였고, 몬스터 속성도 한정적이었다. 헌터는 적극적으로 움직여 던전을 완전히 공략했고 정부와 각성자 센터는 협력하여 위험을 사전에 차단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이상한 일이 속속 벌어지고 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그때, 핸드폰이 웅 울렸다. 문자 메시지였다.
[발신인: 김현호
내일 인터뷰 오지? 너 혹시 아는 거 좀 있냐?]
뭘 아느냐는 거지. 세아는 귀찮아서 답장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 답장하면 욕밖에 쓰지 못할 것 같아서였다. ‘이 개새끼야, 네가 날 죽여?’ 하는 두 문장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멍하게 핸드폰 화면만 들여다보다가 세아는 문득 통화 키패드를 띄웠다.
정이준의 핸드폰 번호는 외우고 있다.
그와 몇 번의 생에서 거듭 만났다. 그때마다 핸드폰 번호를 교환했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외워 버렸다. 남의 번호를 잘 외우는 편이 아니라, 세아가 외운 번호는 부모님 번호와 정이준의 번호가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전화해 볼까?’
잘못된 충동이다.
이번 생에서도 그를 설득하고 자기편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대뜸 전화부터 걸면 당황할 것이다.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경계할지도 모른다. 의심을 살 행동은 피하는 게 옳았다. 어차피 내일이면 그를 만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세아의 손가락은 멋대로 움직여 번호를 누르고 있었다.
잘려 나가 바닥을 구르던 이준의 목.
지금 그의 목소리를 들어야, 돌아왔다는 걸 확신할 수 있을 듯했다. 정이준이 살아 있는 세계로 돌아왔다는 걸 느끼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