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뚜― 뚜―
빨리 받았으면 하는 마음과 이대로 받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교차했다. 아니, 돌아온 시간이 바뀐 것처럼 이준의 번호도 바뀌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네, 정이준입니다.”
단단하고 사무적인 목소리. 그래도 분명한 정이준의 목소리였다.
“여보세요? 누구십니까?”
어쩐지 전과는 느낌이 좀 다른 것 같지만, 일단은 안심이었다. 세아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전화를 잘못 건 것 같아요.”
어이가 없는지 이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바로 끊을까 하다가 세아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럼 끊겠습니다.”
“잠깐만요.”
이준이 세아를 붙들었다. 화장실에서, 또 크레이지 펍에서 만났을 때와는 다른 어조였다. 조심스럽지도, 지나치게 정중하지도 않다. 그의 음성에서는 짙은 의구심마저 느껴졌다.
“누구시냐고 물었는데요.”
“제가 전화를 잘못 걸어서요.”
“그래요? 목소리가 익숙한데요. 정말 제가 모르는 분입니까?”
“…….”
세아는 너무 놀라 그대로 전화를 확 끊어 버렸다. 통화 종료를 알리는 화면이 떴다가 사라졌다. 세아는 한동안 화면을 들여다보며 상황을 이해해 보려고 했다.
‘정이준이 왜 내 목소리를 알지?’
누군지 바로 알아차리지는 못했다. 그건 당연하다, 둘은 아직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그렇다면 목소리도 몰라야 한다. 잘못 걸었다고 두 번이나 말했으면 끊으면 될 일인데 왜 굳이 말끝을 잡아채 정체를 캐묻는가.
‘내가 너무 예민한가?’
정말 이준이 알던 사람과 목소리가 비슷했을지도 모른다.
바로 그때,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 이준의 번호가 표시된 걸 보고, 세아는 자기도 모르게 통화 거절 버튼을 눌렀다. 한 번 그렇게 거절하고 나니 전화는 다시 걸려 오지 않았다.
세아는 이상한 느낌, 무언가가 달라진 느낌을 떨쳐 버리려 고개를 흔들었다.
일단은 순서대로 차근차근 다시 해 나가는 수밖에 없다. 내일 다시 이준을 만나자. 그렇게 생각하며 세아는 다시 침대에 몸을 눕혔다.
그날 밤, 세아는 이준과 밤새 통화하는 꿈을 꾸었다. 그가 목소리만 듣고 자신의 정체를 알아차리고 순식간에 모든 과거를 기억해 내는 허황한 꿈이었다.
13.2
인터뷰장은 전보다 유난히 더 북적였다. 그저 느낌이 아니라 사실이 그랬다. 인터뷰장으로 들어가기도 힘들 정도로 기자들이 많았다. 세아는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서며 고개를 갸웃했다.
재앙 발발 5주년, 인터뷰에 응할 수 있는 몇몇 S급을 모아놓은 귀한 자리긴 하지만 이렇게 인산인해를 이룰 정도의 이슈는 아니었다. 게다가 이마저도 전과는 묘하게 달라진 듯한 느낌이…….
“이세아!”
갑자기 누가 어깨를 확 쳤다. 거의 경기하듯 놀라며 돌아보니 다름 아닌 김현호였다.
“왜 그래? 누가 보면 죽다 살아난 줄 알겠다.”
죽다 살아난 게 아니라 실제로 죽었어, 너 때문에!
세아는 날을 세워 쏘아붙이고 싶은 마음을 겨우 갈무리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현호는 세아 옆에 앉는 게 아니라 한 자리 떨어진 곳에 앉았다. 매번 현호와 나란히 앉은지라, 세아는 의아한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현호도 마침 세아 쪽을 보고 있었다. 그가 기자들에게 들리지 않을 만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 혹시 아는 거 좀 있냐?”
“뭘?”
“오늘 오는 사람.”
“누구? S급?”
“아, 왜 모르는 척이야. 너도 뉴스는 보고 살 거 아니야.”
이 시기에 중요한 뉴스가 있었나? 세아는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얼굴을 찡그렸다.
그런데 바로 그때, 플래시가 터지기 시작했다. 후려치는 듯 시끄럽고 폭력적인 소리에 세아는 몸을 바로 세웠다.
인터뷰장 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걸어 들어왔다.
단정하게 빗어 가라앉힌 검은 머리카락. 부드러운 빛을 띤 두 눈. 순하게 처진 눈매와 짙은 눈썹. 그의 모든 것이 익숙했다, 모든 것이.
세아는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눈은 튀어나올 듯 커졌고 입은 바보처럼 벌어졌다. 심장이 하늘 꼭대기에서 땅바닥까지 곤두박질친 듯 마구 두방망이질 쳤다.
이럴 순 없어. 이럴 수는…….
다가온 남자가 세아 옆의 빈자리에 앉았다. 세아는 남자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창백한 낯으로 굳어 버렸다. 남자는 기자들을 향해 살짝 미소를 보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S급 헌터 정이준입니다.”
한쪽 단상에 선 진행자가 입을 열기도 전에, 플래시가 번개보다 더 눈부시게 터지며 질문이 폭발적으로 쏟아졌다.
“정이준 씨! 왜 지난 5년간 신분을 밝히지 않았습니까?”
“얼굴 없는 헌터로 알려져 있는데, 헌터 협회와는 어떻게 협의하셨습니까?”
“지금 시점에 신분을 밝히는 이유가 뭔지 설명해 주시죠!”
이준은 기자들이 진정할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는 시종일관 미소 띤 얼굴로 정면을 바라보다가, 그때까지도 우뚝 서 있는 세아를 돌아보았다.
플래시 소리가 잠시 멎었다가 다시 터졌다. 이제 기자들은 세아를 쳐다보며 고함치듯 질문을 던졌다.
“두 분 아는 사이인가요?”
“보자마자 놀라셨는데 전에 만난 적이 있습니까?”
세아는 너무 당황해서 말을 잃어버렸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친구에게 배신당해 죽었는데, 그 친구보다 친구의 애인이 의심스럽다. 늘 미각성자였던 이준은 갑자기 S급 헌터가 되어 나타났는데, 지난 5년 동안 얼굴 없는 헌터로 활동했다고 한다.
그때, 곁에서 이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일단 앉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친근하지도, 딱딱하지도 않은 사무적인 목소리다.
무슨 마법에라도 걸린 듯 세아가 착석했다. 이대로 계속 서 있으면 질문 포화에 납작해질 것 같았다.
진행자는 혼란을 진정시키고자 마이크에 대고 “에…….” 하고 소리를 낸 뒤 말했다.
“미리 전달된 질문이 아니면 답변하지 않겠습니다. 일단 정이준 헌터부터 답변해 주십시오.”
세아는 창백하게 굳은 낯으로 자기 앞의 질문지만 뚫어지게 내려다보았다. 질문지의 내용은 대부분 이전과 같았다. 물론 중요한 건 자기 질문지가 아니라 이준이었다.
이준은 자기 앞에 있는 입 가까이 가져온 후 입을 열었다.
“저는 지난 5년 동안 시민들 앞에 얼굴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재앙 발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시스템 스킬 속성을 보유하게 되었는데, 헌터 등록 시 협회와 논의한 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건…….”
“시스템 속성이 대체 뭡니까?”
성질 급한 기자가 달려들어도 이준은 화를 내지 않았다. 그는 침착하게 기자의 질문을 무시한 후 자기 말을 이어 갔다.
“당시 이 시스템 속성에 관한 연구가 필요했고, 결과에 따라 사회에 큰 혼란을 일으킬 수 있다고 판단해 저의 정보는 미리 공개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제 연구 결과를 공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세아는 멍하게 앞을 바라보았다. 진행 관계자들이 분주히 움직여 기자들에게 종이 뭉치를 나눠 주는 게 보였다. 세아를 비롯한 다른 S급 헌터들 앞에도 종이 뭉치가 놓였다. 세아는 손을 댈 생각도 하지 못한 채 표지에 적힌 제목만 멍하게 바라보았다.
[시스템 속성 스킬―시스템 내 버그와 디버그 작용.]
다들 종이를 넘기며 정보를 확인하느라 분주했다. 세아도 분위기에 휩쓸려, 혹은 운명에 이끌려 표지를 넘겼다. 그러나 글자가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준은 잠시 시간을 두었다가 특유의 나직하고 침착한 어조로 설명을 시작했다.
“보면 아시겠지만, ‘시스템 속성 스킬’은 일종의 디버그 스킬입니다. 5년 전, 세계에 퍼진 정체불명의 시스템은 놀랄 정도로 정교했습니다. 하지만 완벽하지는 못했는데요, 그래서 종종 위험한 버그가 나타났습니다. 5페이지를 봐 주십시오.”
세아는 5페이지까지 휙휙 종이를 넘겼다. 그림 자료를 보자마자 그녀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이준의 목소리가 헛된 메아리처럼 귓가를 스쳤다.
“다른 사람의 모습으로 변하는 몬스터, 뱀처럼 늘어나는 칼을 가진 몬스터, 실내에서 열리는 던전, 그 외에도 많은 ‘변종’ 몬스터와 던전이 나타났습니다.”
세아가 지난 생에서 겪은 모든 것이 그 페이지에 있었다. 세아는 손을 떨지 않으려고 온몸에 힘을 주었다. 여기서 동요하는 모습을 보일 순 없었다.
“이는 사회에 알려지지 않은 이상 현상으로, 저와 헌터 협회는 이 몬스터와 던전의 속성을 ‘시스템’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오직 제가 가진 시스템 속성 스킬로만 완벽히 정리할 수 있었죠.”
“그럼 정이준 헌터는 일종의 백신입니까?”
“그건 아직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헌터 협회는 저를 시스템이 만들어 낸 ‘디버그’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는 시스템 속성 스킬을 가진 저만이, 모든 변종을 없앨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몇 가지 질문이 더 나왔으나 곧 인터뷰장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세아는 정신없는 틈에도, 사람들 사이로 은밀한 불안과 공포가 독가스처럼 번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던전이 생기고 몬스터가 나타나도, 사람들은 등교를 하고 출근을 한다. 핸드폰을 사고, 대학교에 가기 위해 공부하고, 승진하려고 토익 시험을 본다.
세상이 이렇게 멀쩡하게 돌아가는 건 ‘상황은 안정적이다.’ 라는 확신 때문이다.
이미 모든 던전의 종류, 몬스터의 속성이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사람들은 처음처럼 미지의 대상과 싸우는 게 아니다. 그러자 공기 중에 떠돌던 공포감이 사라졌고, 모두가 일상으로 신속하게 복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버그’라니. 변종 던전과 몬스터가 나타나는 걸 숨겨 왔다니? 두꺼운 얼음 바닥 위에 선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게 언제 깨질지 모르는 살얼음이었던 것이다.
그때, 사람들을 달래듯 이준이 말을 이어 갔다. 무척이나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저와 헌터 협회는 여러 연구를 통해 마침내 버그 발생을 차단할 방법을 알아냈습니다. 그건 바로 ‘최초의 버그’를 제거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