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최초의 버그가 뭡니까?”
“연구 결과, 변종 던전과 몬스터는 일종의 파생 버그입니다. 즉, 파생 버그를 만들어 내는 최초의 버그가 있다는 이야기죠. 저의 목표는 그 최초의 버그를 제거하고, 시스템을 안정화하여 여러분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입니다.”
세아는 책상 아래로 손을 내려 주먹을 세게 말아 쥐었다. 시스템 속성, 최초의 버그. 식은땀이 났다. 달라진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새로운 이야기가 머리로 마구 쏟아져 들어오니 혼란스러웠다.
“연구가 끝난 지금, 계속 상황을 숨기는 건 여러분을 위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모든 사실을 밝힙니다. 여러분이 하실 일은 저와 헌터들, 협회를 믿고 계속 학교와 직장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반드시 최초의 버그를 제거해 안전한 세상을 만들겠습니다.”
이준은 마치 연설을 하듯 힘을 주어 발언을 마쳤다. 세아는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지도 못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최초의 버그, 최초의 버그……. 어째서인지 그 말이 어쩐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생각을 정리하느라 바빠 세아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옆에 앉은 이준이 자기 옆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13.3
반쯤 넋이 나간 채로 차에 올라, 세아는 핸드폰으로 기사를 확인했다.
[새롭게 밝혀진 ‘시스템 속성’…협회와의 1문 1답]
[‘디버그’ 정이준 헌터, 시스템의 희망인가?]
[‘최초의 버그’ 언급…형태는 불분명]
세아는 그대로 핸드폰을 옆자리로 내던졌다. 머리를 좀 식히려는데, 갑자기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이전 생의 안 좋은 기억이 떠올라, 세아는 핸드폰을 진동 모드로 바꿨다. 화면을 보니 또 김현호였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야, 너 어딨어?”
“가려고. 왜.”
“간다고? S급끼리 모여서 대책회의 하기로 했잖아!”
“뭐?”
전혀 못 들었다. 아니, 인터뷰장에서 나오면서 언뜻 그런 소릴 들은 듯도 하고……. 그러나 어지럽고 두통까지 있어서 제대로 기억하지 않았다. 세아는 고개를 꺾어 낮은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손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미안한데 나 머리가 좀 아파서.”
“아니, 그래도 이거 중요한 문젠데…….”
“어차피 지금 당장 나 필요한 것도 아니잖아. 그냥 나중에 내용 알려 줘. 진짜 머리가 아파서 그래.”
“이세아 씨.”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세아의 몸이 딱 굳었다. 이준이 현호의 핸드폰을 낚아챈 게 분명했다. 그는 사무적이면서도 친절한 투로 세아에게 말했다.
“오셔야 합니다. 이세아 씨는 꼭 참석하셔야 하는 자리니 어려우시더라도 돌아와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
“여보세요? 들립니까?”
“어, 응. 아니, 네, 알겠습니다.”
말이 부탁이지 강요나 마찬가지라 저절로 대답이 튀어나갔다.
이준의 느낌이 전과는 너무 다르다. 세아는 호텔로 돌아가자고 말하며 허리를 곧추세우고 똑바로 앉았다. 차창 밖 풍경은 평소와 똑같았지만, 그날따라 유난히 어지럽게 느껴졌다.
13.4
호텔로 돌아가면 김현호를 비롯해 세계의 S급 헌터들과 다시 마주칠 줄 알았는데, 안은 기이하리만치 조용했다. 프런트 직원조차 보이지 않았다. 의아한 마음에 김현호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는 받지 않았다. 세아는 로비에 서서 오싹한 적요를 살폈다.
높은 천장, 인공 분수의 물소리, 호텔 특유의 향긋한 냄새. 그래도 세아는 일단 인터뷰장으로 올라갔다.
‘여러 번 죽어서 예민해졌나?’
중요한 회의니 주위를 비웠을 수도 있다. 세아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가만히 기다렸다. 엘리베이터의 유리 벽 너머로 보니, 돌아다니는 사람 없는 로비가 더욱 낯설게 느껴졌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굳게 닫힌 인터뷰장 문이 보인다. 그러나 세아는 그리로 가다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언젠가 김현호를 끌고 들어갔던 세미나실 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고급스러운 원목 문틈으로 살짝 이준의 모습이 보였다. 단정한 자세로 책상 앞에 앉은 그는 아까 나눠 준 자료를 대강 놓아 두고 창밖을 보는 중이었다.
세아는 머뭇거렸다. 자신을 부른 게 이준이니 그에게 가야 할까, 아니면 인터뷰장으로 가볼까?
바로 그때, 이준이 고개를 돌려 문틈 너머의 세아를 발견했다. 죄지은 것도 없는데 세아는 공연히 움찔했다.
“이세아 씨.”
이준이 일어나서 문을 열었다. 세아는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려 애쓰며 안으로 들어갔다. 이준은 안내원이라도 된 양 친절하게 말을 붙였다.
“돌아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차 한잔 드시죠.”
책상을 살피니 찻잔은 두 개였다. 이준 앞에 하나, 자기 앞에 하나. 세아는 이준 맞은편에 앉았다. 이준은 문을 닫고 창문 블라인드를 내리느라 분주했다. 사람을 시켜도 될 텐데 손수 이러는 걸 보니, 무척 중요한 얘기를 할 모양이었다.
세아는 자기 앞의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절인 딸기가 동동 떠 있는 딸기차였다.
언젠가 세아는 손수 딸기차를 끓여 이준에게 대접했다. 그 안에는 자백제가 들어 있었다.
텅 빈 호텔.
밀실.
‘디버그’를 자처하며 나타난 정이준.
느낌이 좋지 않다.
세아는 잠시 망설이다가, 블라인드를 내리는 이준의 뒷모습을 흘끗 살폈다. 그런 다음 소리 없이 자기 잔과 이준의 잔을 바꿔치기했다. 아슬아슬하게 돌아선 이준이 미소 띤 얼굴로 세아 맞은편에 앉았다.
세아는 얼른 찻잔을 입술에 댔다. 찻잔을 바꿨지만, 혹시 모르니 차를 마시진 않았다. 이준은 자기 잔에 손가락 하나 대지 않은 채 예의 바른 투로 물었다.
“차가 식었죠?”
“네, 조금.”
이준은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조금도 줄지 않은 차와 책상에 가지런히 올려놓은 세아의 손을. 세아는 그 시선의 의미를 몰라 잠시 굳어 있었다.
살짝 웃은 이준이 갑자기 자기 차를 마셨다. 세아는 그의 목울대가 울렁이는 걸 바라만 보았다. 이준이 잔을 내려놓으니, 내용물이 반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세아가 마른침을 삼켰다. 직감이 옳다면, 저 차에는…….
그때, 이준이 차분하게 말했다.
“변명이라고 생각하시겠지만 저는 반대했습니다.”
“뭘요?”
“자백제 사용 말입니다. 협회는 완강했지만요.”
이럴 줄 알았다. 세아는 분노하여 그를 탓하는 대신 자신의 감에 감탄했다. 지난 생에서 딸기차에 자백제를 타지 않았다면 그녀 역시 부지불식간에 자백제를 마시고 말았을 것이다.
“이세아 씨가 알아차리셔서 다행입니다. 저도 양심에 찔리는 짓은 안 해도 되겠네요. 자백제라니, 너무 비열하잖아요?”
그 ‘비열한 짓’을 했던 세아는 대답 없이 입을 다물었다. 양심이 아파서는 아니었다. 정이준의 의도를 알 수 없어서였다.
이준은 잔이 바뀐 걸 알고도 차를 마셨다. 아니, 잔이 바뀐 걸 알아차렸기 때문에 차를 마신 게 분명했다. 대체 왜? 무슨 꿍꿍이가 있기에?
세아가 행동을 정하지 못하는 사이, 그가 세아를 보며 웃었다.
“전 이세아 씨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습니다. 하지만 오늘 자백제를 마신 건 저니까, 저한테 뭐든 물어보셔도 됩니다.”
이준은 깍지 낀 손에 턱을 괴며 나른하게 웃었다. 세아가 몇 번 본 적 있는 미소였다.
“저는 이세아 씨를 모르지만, 당신은 저를 알잖아요.”
세아의 몸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이준은 잡았다, 라고 말하듯 물었다.
“제 말 맞죠?”
세아는 바로 대답하는 대신 이준의 얼굴을 구석구석 살폈다.
기회는 기회다. 정이준은 자백제를 마셨고, 앞으로 10분 정도는 묻는 말에 솔직히 답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위기이기도 했다. 이준은 세아의 질문을 모두 기억할 것이다. 약효가 떨어지면 세아가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혼자 골몰할 것이다.
지금은 파고들 때가 아니라 물러날 때다. 세아는 몸을 살짝 뒤로 젖히며 고개를 흔들었다.
“잘 모르겠는데요. 그럼 이렇게 묻죠. 왜 제가 정이준 씨를 안다고 생각하시죠?”
“어제 저한테 전화한 사람, 세아 씨잖아요. 목소리가 똑같은데.”
순간 말문이 막힌 세아는 답을 미루고 침묵했다. 아니라고 잡아떼기엔 너무 늦었고, 이제 와서 잘못 걸었다는 둥 핑계를 대는 것도 궁색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준은 그녀 앞에서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만약 세아 씨가 자백제를 마셨다면 그걸 먼저 물어보려고 했습니다. 제 번호는 어떻게 알았는지, 왜 전화했는지……. 대체 저를 어떻게 아는 건지.”
“협회가 요구한 질문이 그건가요?”
“아뇨, 물론 협회는 다른 걸 요구했죠. 세아 씨가 ‘최초의 버그’인지 아닌지 알아 오라고 하더군요.”
세아는 동요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약간 웃었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제대로 연기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내가 최초의 버그라고요?”
“정확히 말하자면 전 세계에서 가장 먼저 각성한 헌터입니다. 알고 계셨나요?”
몰랐다. 세아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이준은 그녀의 표정에서 답을 읽은 모양이었다.
가장 먼저 각성한 헌터라니, 그건 전혀 몰랐다. 상태 창에 표시되는 각성 시간을 각성자 센터에 말해 주긴 했지만, 센터는 그 시간을 받아 적었을 뿐 아무 말도 해 주지 않았다.
“바로 그 점 때문에 협회는 이세아 씨를 의심하고 있습니다.”
“단지 그 이유만으로?”
“아직까지는 그렇습니다.”
“그러는 당신은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갈지는 몰라도 이 대화에서 지면 안 된다. 세아는 흔들림을 감추고 침착하게 되물었다.
“당신 혼자 ‘시스템’ 속성 스킬을 가지고 있다지 않았나요? 그게 더 버그나 변종에 가깝죠.”
“그래서 저도 테스트를 거쳤습니다.”
“테스트?”
“저 자신에게 스킬을 사용하는 거죠.”
세아는 무슨 스킬이냐고 되묻지 않았다.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이준이 가진 운명의 스킬, B급 각성자일 때도 어김없이 개방되던 스킬. ‘정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