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급의 히든 퀘스트-22화 (22/112)

22화.

“‘정화’ 스킬이라는 건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저는 무사했습니다.”

말을 마친 다음, 이준은 세아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아까운 시간이 계속 흐르고 있다. 세아는 뭐든 더 물어야 했다.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자기 앞에 남겨진 단 하나의 질문을. 그리고 바로 지금, 그 질문을 던져야 한다는 것도.

입을 여는 동시에 그녀는 달아날 준비를 했다.

“그럼 원하는 게 그건가요? 나한테 ‘정화’ 스킬을 사용해 보는 거?”

“…….”

이준이 침묵한다.

최초의 버그. 그로부터 파생되는 여러 변종. 세아는 거의 확신했다. ‘최초의 버그’라는 게 있다면 그건 틀림없이 자기 자신이다. 그게 아니라면 자기 주위에서 변종 몬스터며 던전이 나타났을 리 없다.

게다가 히든 퀘스트의 내용은 어떠한가. 자신은 시스템을 살해할 존재로 낙점되었다. 아무 이유도 없이, 그저 돌연히. 그 사실 자체가 세아의 확신을 뒷받침했다.

그러면 자신에게 ‘정화’ 스킬을 사용하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준은 그 스킬로 버그를 없앨 수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자신은 그대로 사라질까, 더는 회귀하지 않고 소멸할까? 정말 그렇게 되면 좀 억울할 것 같았다.

“아니요.”

이준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세아는 순간적으로 반쯤 숨을 멈추었다. 이준은 여전히 세아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또박또박 반복했다.

“물론 협회는 그걸 원하죠. 하지만 제가 원하는 바는 아닙니다.”

“하.”

세아가 헛웃음을 쳤다. 바보 같은 말장난이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이준은 지난 5년 동안 협회와 손발을 맞춰 왔다. 협회와 자기 자신의 결정이 다른 듯 말하는 건 허튼 속임수나 다름없다.

“왜 웃으시죠?”

“우스워서요. 어차피 협회의 뜻을 거절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면서 그렇게 이야기하니 재밌네요. 명령이라 어쩔 수 없이 따르니까 이해해 달라는 건가요?”

가벼운 빈정거림 앞에 이준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정말로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세아를 바라보더니 다시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요. 저는 세아 씨에게 그 스킬을 사용할 생각이 없습니다.”

“…….”

“아무리 헌터 협회라도 S급에게 명령할 수는 없어요. 그걸 저보다도 더 잘 아실 텐데, 왜 저를 시험하시나요?”

그야, 완전히 협회의 협력자인 듯 이야기했으니까. 세아는 솔직하게 대답하는 대신 이준의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이준 역시 세아의 말을 기다렸으므로 방 안은 한동안 침묵에 잠겼다.

“저한테 궁금하신 건 그게 다인가요?”

이준이 그렇게 물었는데, 어쩐지 좀 아쉬운 투였다. 세아는 그게 무얼 기대했기에 이러는지 의아했다. 그래서 곧장 되물었다.

“뭘 더 궁금해해야 하는데요?”

“왜 이세아 씨에게 정화 스킬을 사용할 마음이 없는지?”

그러고 보니 그걸 묻지 않았다. 왜 협회의 뜻에 반해 자신을 놓아 주는지.

협회는 자백제까지 준비했다. 세아를 강하게 의심하고 있다는 증거나 다름없었다. 이준에게도 분명 강하게 요구했을 것이다. 세아를 흔들어 자백을 받아 내라고, 적어도 단서라도 알아 오라고.

그러나 이준은 자백제를 자기가 마셨을 뿐더러 세아에게 정화 스킬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세아도 이유가 궁금하기는 했다. 과거의 기억도 없을 텐데, 왜?

“왜 나를 ‘정화’해 보려고 하지 않는 건데요?”

이준이 눈을 깜빡였다. 자기가 물어보라고 해 놓고, 대답이 바로 떠오르지 않아 당혹한 모양이었다. 그는 마치 오류 난 컴퓨터처럼 머뭇거리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자기가 물어보래 놓고 뭐야.’

세아는 실없이 웃었다. 심각하고 위험한 상황인데, 이준이 정화 스킬을 사용하지 않겠다니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이제 협회의 의심을 피할 방법을 찾고, 이준을 이용해 자기 목적을 달성할 궁리만 하면 된다.

“알겠습니다. 제가 알고 싶은 건 이게 전부고요, 이만 일어나고 싶네요.”

손목시계를 확인하니 거의 10분이 지났다. 자백제의 효과도 슬슬 떨어질 테고, 호텔로 돌아가서 상황을 천천히 정리하고 싶었다. 다행히 두통은 많이 잦아들었다.

이대로 이준과 헤어져 돌아갈 작정으로 세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이준은 세아에게 인사를 하는 대신 함께 벌떡 일어섰다.

“세아 씨.”

“네?”

“지금 대답해도 되나요?”

“뭘요?”

“왜 정화 스킬을 사용하지 않는지.”

세아는 시계를 확인했다. 이미 10분이 지났다. 지금 하는 말은 거짓말일 가능성이 높다. 그래도 세아는 그의 말을 들어 보기로 했다.

“그래요.”

그가 뭐라고 하든, 세아는 귀담아 듣지 않고 흘려버릴 생각이었다.

이준은 바로 말을 잇지 않고 주저했다. 그는 선 채로 세아를 바라보더니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자기 입에서 나가는 말이 스스로 느끼기에도 낯선 듯했다.

“미움 받기 싫어서요.”

세아의 생각이 딱 멎었다. 이준은 잠시 책상을 내려다보더니 곧 고개를 들었다. 주먹을 가볍게 쥐었다 펴는 모습에서 초조함이 전해졌다.

세아는 지난 생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고통이 착각이냐고, 누나를 좋아하는 마음이 모두 기만이냐고, 눈물로 두 뺨을 적시며 묻던 어린 청년을. 그 입술에 자기 입술을 겹치던 순간을. 조금 축축했고 또 따뜻했다.

그러나 이준은 그걸 기억하지 못한다. 세아는 부드럽게 그를 밀어냈다.

“S급 헌터라고 무조건 친하게 지낼 필요는 없어요. 협회가 원하는 일을 하려면 모든 사람과 가깝게 지낼 수는 없겠죠.”

“그래도 세아 씨한테 미움 받으면 나중에 후회할 것 같아서요.”

“난 누굴 잘 미워하지 않아요.”

세아는 대화를 끊고 싶어서 부드럽게 이준을 달랬다.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각성하기 전부터 세아는 사람을 잘 미워하지 않았다. 특별히 착해서가 아니라, 그만 한 증오가 일어날 일이 없었다. 그녀는 자신을 여러 번 배신한 이준도, 직접 칼을 꽂은 김현호도 미워하지 않았다.

그저 반복해서 배신당하는 상황 자체에 화가 치밀어 죽이고 싶어진 적이 있을 뿐이다. 세아 안에서 이 두 가지는 엄연히 달랐다. 상황이 달라진다면, 당연히 마음도…….

“잘 좋아하지도 않고요?”

이준이 잠잠히 물었다. 확신하는 투라 세아는 조금 불편해졌다. 어색하게 변한 분위기를 알아차린 듯 이준이 말을 돌렸다.

“오늘 제가 불쾌하게 했다면 용서해 주세요.”

“저기요, 정이준 씨.”

세아는 견디지 못하고 그의 말을 끊었다.

“각자 입장이 다르니까 왜 그랬는지 이해합니다. 그렇게 불편하게 대하지 않아도 돼요.”

무엇보다도 그와의 관계가 이렇게 되면 세아 자신에게도 좋을 게 없다. 이전 생에서 이준은 세아를 위해 목숨을 던졌다. 그 정도로 가까워질 필요는 없겠지만, 어색해지는 건 피해야 한다.

세아의 말에 이준의 표정이 묘하게 달라졌다. 그는 여전히 세아와 조금 거리를 두고 선 채로 물었다.

“그럼 누나라고 불러도 돼요?”

얘기가 왜 또 이리로 튀지? 세아는 묘한 기시감을 느끼며 대답하지 않았다. 이준은 작정하고 조르기로 한 듯 몸을 책상에 기대며 세아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저 이제까지 협회랑만 일해서 밖에 아는 헌터도 없고, 이왕이면 한국인이랑 더 친해지고 싶어서요. 그리고 제가 더 어린데, 자꾸 세아 씨라고 부르면 이상하잖아요.”

구구절절 이유를 덧붙이며 이준이 사르르 웃었다. 눈매가 어여쁘게 접히는 미소, 나 예쁘게 봐주세요. 세아가 여러 번 봤던 바로 그 표정이었다.

“네? 세아 누나.”

13.5

며칠이 평화롭게 흘러갔다. 걱정과는 달리 협회가 갑자기 호텔로 쳐들어오는 일은 없었다.

지난 생에서는 헌터 협회와 거의 연이 없었던지라, 세아는 급하게나마 협회에 대한 정보를 알아보았다. 협회 홈페이지에 간단한 조직도가 나와 있었다. 세아는 한국 지부 협회장의 이름부터 살폈다.

[협회장: 최두정]

아래 사진이 보였다. 턱이 네모나고 머리카락이 짧아 이마와 귀가 모두 드러나 보였다. 이전 협회장은 여자였던 것 같은데, 얼마 전에 바뀐 모양이었다.

헌터 협회는 헌터의 권익을 대변하고 그들의 문제 행동을 통제하지만, S급과는 별로 상관없는 기관이기도 했다. 이준이 전에 말했던 대로, S급은 협회의 통제를 받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아는 한 번도 협회장을 제대로 만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 생에서는 좀 다를지도 모른다. 세아는 최두정의 얼굴을 잘 기억해 두었다.

그때, 옆에 놓아둔 핸드폰이 웅웅 울렸다. 화면을 확인하니 발신인은 김현호였다.

‘이번에 물어볼까?’

세아는 핸드폰을 손에 든 채로 주저했다.

아정은 지난 생에 너무도 이상하게 굴었다. 현호에게 몬스터 멸종에 관해 이야기했다니, 정말로 믿기 어려웠다. 이번에는 그녀가 대체 어떤 사람인지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그녀는 최대한 태연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어, 김현호.”

“너 정이준이랑 무슨 얘기 했어?”

인사도 없이 대뜸 정이준 이야기다. 안 그래도 머리가 지끈거려 세아는 손으로 이마를 쓸었다.

“특별한 얘긴 안 했는데. 그냥 잘 부탁한다고.”

“그래? 혹시 최초의 버그 어쩌고 하는 건 얘기 안 하디?”

“최초의 버그? 그건 또 왜.”

현호의 말은 대강 이랬다. 평범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데 갑자기 정이준을 앞세운 협회 사람들이 찾아왔다. 최초의 버그를 찾아내고 있다며, 현호에게 ‘정화’ 스킬을 사용해 봐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말이 부탁이지 완전 협박이었다고.”

“그래서 그냥 하게 해 줬어?”

세아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물었다. 분통이 터지는 듯 현호의 목소리가 커졌다.

“협조 안 하면 억지로 하겠다는 것처럼 굴잖아. 카일리는 거부했다가 속박 스킬에 걸렸대. 이게 말이 되냐?”

카일리는 미국의 S급 헌터였다. 세아는 바로 대답하는 대신 한숨을 내쉬었다. 현호는 그걸 무언의 동조로 받아들인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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