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누나!”
그는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목소리를 높여 불렀다. 세아는 그와 눈이 마주치고 너무 놀라 입만 벌리고 있었다. 이준은 바로 가까이 오지 않고 그 자리에 붙어 버렸다. 핏기가 가신 이준의 얼굴을 보다 세아가 느리게 물었다.
“왜 그래?”
솔직히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었다. 이준은 뒤를 돌아보고 다시 멀쩡한 세아를 살핀 후, 숨을 고르고 대답했다.
“아뇨, 무슨 일이 있나 해서.”
“무슨 일?”
“혹시 협회 사람이 왔나 해서요.”
세아는 기운 없이 한숨만 내쉬었다. 문까지 부수고 안으로 들어왔는데, 화를 낼 기운도 없었다. 지금 중요한 건 정이준의 부모는 살았고 자기 부모는 죽었다는 것뿐이었다.
“안 왔어. 미안한데 나 좀 혼자 있고 싶거든.”
“괜찮아요? 얼굴이…….”
눈물 자국으로 엉망이다. 세아는 눈물이 말라붙어 찜찜한 뺨을 대강 비볐다. 그런다고 얼굴이 깨끗해지는 건 아니었지만.
“괜찮아.”
“어디 아파요?”
이준이 걱정스러운 듯 세아의 뺨을 감쌌다. 그러나 세아는 성가신 파리를 쫓듯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려 온기를 피했다.
“누나?”
“됐다고 하잖아. 용건 없으면 그냥 가.”
뜻밖의 냉대에 당황한 이준은 어쩔 줄 모르고 제자리에 서 있었다.
세아가 울었다. 왜? 이렇게 강한 사람이 밤새 혼자 운 건가? 핸드폰도 꺼져 있고 얼굴은 엉망이다. 이준은 그녀 옆에 있어 주고 싶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건 이불을 덮어 주고 눈부시지 않게 암막 커튼을 쳐 주는 정도일지라도.
“정이준, 용건.”
찌를 듯한 시선이다. 이준은 물러나야 한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정말 필요한 말만 하고 사라져주기로 했다.
“누나 부모님께 연락을 드리는 게 좋겠어요. 협회가 누나를 좀 더 감시하려는 모양이에요. 협회에 누나한테도 ‘정화’ 스킬을 사용했다고 얘기했는데 믿지 않는 것 같아서요. 혹시라도 부모님이 인질이 될 수도 있잖아요. S급 헌터를 조종하는 쉬운 방법이니까.”
“…….”
“아, 하긴, 두 분 다 강하셔서 특별히 조심할 필요 없을까요? 그래도 대비가…….”
“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네?”
이준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그러나 세아는 정말 그의 말을 한마디도 이해하지 못했다. 다행히 그녀가 더 말하기 전에 이준이 덧붙였다.
“두 분 다 A급 헌터시잖아요. 지금 인도에 계신 거로 아는데, 전화라도 드리는 게 나을 거예요.”
세아는 핸드폰을 드는 대신 눈을 깜빡이며 이준을 바라보았다.
부모님. A급 헌터. 인도.
“잠깐만.”
세아는 핸드폰 주소록을 뒤졌다. ‘엄마’를 검색하자 번호가 떴다. 그런데 번호가 좀 이상했다. 가족 번호가 아니었다. 세아는 주저하면서도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아주 짧은 대기시간 동안, 가슴이 얼어붙는 듯 서늘해졌다. 혹시 또 없는 번호라고 하면 어쩌지.
다행히 곧장 신호가 가기 시작했다.
뚜― 뚜―
“여보세요? 세아야?”
“엄마?”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세아는 처음으로, 해일과도 같은 안도가 자기 몸을 그대로 후려치는 걸 느꼈다. 감정의 파도가 너무 강렬해서 그녀는 실제로도 조금 비틀거렸다. 이준이 재빨리 그녀의 몸을 잡았다.
“엄마? 엄마야?”
“어, 근데 던전이라 좀 끊어지네. 아빠도 저기 있어. 아빠 핸드폰은 아예 맛이 가 버렸어.”
세아는 훅, 숨을 들이쉬었다. 이런 바보 같은 소리 하기 싫은데 저절로 원망이 터졌다.
“왜 번호 바꿨어?”
“뭐?”
“왜 번호 바꿨냐고! 난 바보처럼…….”
“왜 그래, 세아야? 각성하고 나서 하도 사기꾼들 연락 많이 와서 번호 바꾼 거잖아. 네가 바꿔 줬잖아, 기억 안 나?”
기억날 리가.
세아는 자기가 무슨 소리를 하고 전화를 끊었는지도 몰랐다. 그저 핸드폰을 들고 서서 바닥만 내려다보았다.
부모님이 각성했다. 평범한 미각성자였던 부모님이, 둘 다 A급 헌터로 살고 있다. 활기찬 목소리로 던전에서 전화까지 받는다. 세상의 변화에 짓눌려 집 밖으로 잘 나오지도 못하던 소심하고 겁 많은 부모님은 사라져 버렸다.
이 세상은 너무 이상해. 뭐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됐어. 그 생각밖에 할 수 없었다.
그때, 이준이 조심스럽게 세아의 어깨를 짚었다. 살피는 듯한 시선이 느껴져 세아는 고개를 반대편으로 틀었다.
“누나?”
“괜찮아. 내가 좀…… 좀 당황해서 그래.”
세상이 갑자기 너무 변해서 놀랐다. 좀 더 침착했다면 밤새도록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괴로워하지 않았을 텐데. 기사 몇 개만 검색해 봤어도 바로 알았을 텐데. 그러나 어제는 살아난 이준의 부모님과 죽은 서아정 때문에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가 없었다.
‘지금이라도 정신 바짝 차려야 돼.’
삶이 반복되며 변수가 늘어나고 있다. 정이준만 설득하면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이성적으로, 냉정하고 침착하게 상황을 돌파해야 한다.
세아는 고개를 들어 정이준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염려 어린 표정이 보인다. 그와 한 번 몸을 합하기도 했었다. 그는 순진한 아이처럼 서툴고도 절박하게 매달려 왔다.
반복된 배반과 단 한 번의 희생. 이번에는 어느 쪽의 정이준을 믿어야 할까. 인간의 어떤 면에, 자신의 목숨과 자유를 걸어야 할까.
어차피 도박이다.
질문을 던지는 세아의 눈빛이 서늘하게 변했다.
“정이준. 너, 내 편이야?”
지금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을 의심하는 협회. 정이준이 문까지 부수며 달려올 정도면, 짐작보다 상황이 심각한 것이다. 그러나 세아에게는 이준이라는 패가 있었다. 믿을 수 없는 패가.
“네.”
대답은 쉽고 간단했다. 세아는 이유를 묻고 싶었다. 너는 왜 내 편이냐고, 이번 생에서는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왜 나를 걱정해 달려왔느냐고 따지고 싶었다.
그러나 의미 없는 짓이다. 이유를 알면 그를 믿을 수 있을까? 이유를 모른다고 그를 믿지 못할까?
“그럼 협회가 지금 뭘 하려는 건지 설명해.”
그저 선택하고 온전히 책임질 뿐이다.
“사소한 거 하나도 빼놓지 말고 전부.”
13.8
협회는 ‘최초의 버그’ 사건을 조용히 처리하고자 했다.
말이 번지고 사회가 불안정해지면 좋을 게 없다. 상황이 위험해질수록 헌터와 협회, 정부는 힘을 갖게 되겠지만 이전 협회장은 그걸 원하지 않았다.
“이전 협회장 김송숙 선생님은 저랑 몇 년이나 협력하고 대화하면서 ‘최초의 버그’를 알아내려고 했어요. 그러다가 협회장이 최두정으로 바뀌면서 제가 밖으로 나오게 된 거죠.”
“이번 협회장은 왜 널 전면에 내세웠는데?”
“그걸 잘 모르겠어요. 협회도 결국 이익 집단이니까, 사람들이 불안해하면 더 큰 힘을 갖게 되죠. 그것 때문이 아닐까 추측만 하고 있어요.”
열세 명의 S급 헌터를 시작으로, 협회는 모든 헌터를 조사하기 시작할 것이다. 의심스러운 사람을 불러 ‘정화’ 스킬을 사용해 보고 그가 최초의 버그인지 아닌지를 판별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정화 스킬을 보유한 이준의 역할이 중요했다.
세아는 잠시 상황을 가늠했다. 갑자기 바뀐 협회장. 사라지거나 새로 나타난 사람들. 이상하게 돌아가는 세계. 속내를 짐작할 수 없는 정이준.
“누나. 그럼 누나는 협회와 맞서려는 건가요?”
“아직 몰라.”
자신이 최초의 버그라면 당연히 협회와 싸워야 한다. 이준의 스킬로 인해 ‘정화’ 당하면 아마 높은 확률로 존재 자체가 사라질 것이다. 더 이상의 회귀는 없겠지만 정말 그대로 죽어 버리는 것이다. 세아는 삶의 반복을 끝내고 싶지, 이렇게 살다 돌연사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그거 말고도 다른 중요한 문제도 있고.”
히든 퀘스트.
어쩌면 문제는 간단할지도 모른다. 그냥 지금 비행기를 타고 캘리포니아로 날아가서 시스템 보스 던전을 정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세아는 의자에 앉은 정이준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번 생에서 둘은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특별한 경험을 함께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 자기 말 한마디에 이렇게 모든 걸 털어 놓는 이준이 의심스러웠다.
“내가 협회와 맞선다고 하면 넌 어쩌려고. 넌 5년 동안 협회랑 협력했잖아.”
“세상이 점점 더 위험해질 거라고 했고, 실제로 버그 몬스터가 많이 나타났으니까요. 그때는 협력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요.”
“지금은 아니고?”
“네.”
“왜?”
이준은 곤혹스러운 듯 눈을 깜빡였다. 자기 마음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잘 모르는 듯했다. 그는 객실 바닥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부딪쳐 오는 시선이 투명했다.
“누나가 원하니까요.”
세아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창가로 걸어갔다. 이준을 등지고 창밖을 바라보니, 밖은 아직 환한 낮이었다. 최초의 버그가 어쩌고, 시스템이 어쩌고 해도 사람들은 평범하게 살아 간다. 강에 가득 뜬 물별이 눈부시게 반짝거려 세아는 조금 얼굴을 찡그렸다.
“이준아.”
“네.”
“솔직히 네가 왜 이러는지 잘 모르겠어. 근데 나는 그냥 너를 믿어. 지금은 그 방법밖에 없으니까.”
투명한 창에 바깥 풍경과 객실 모습이 한 번에 비쳤다.
이준은 떨어져 선 세아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다짐과도 같은 말을 남긴 후에도 세아는 한참을 침묵했다. 그녀 안에 얼마나 치열한 고민이 있는지 이준은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돌아서서 자신을 보는 세아는 눈부셨다. 햇빛 때문이 아니었다.
“당분간은 협회에 협력하는 척해. 헌터들 조사도 계속하고 다니고. 난 가 봐야 할 곳이 있어.”
“네, 누나.”
“협회가 헌터들을 감시하고 있는 것 같은데, 눈 피해서 캘리포니아로 올 수 있겠어?”
“누나도 캘리포니아로 가려고요? 지금 협회가 S급 헌터들의 출국을 막고 있어요.”
“별짓을 다 하네. 그래도 걱정할 필요 없어.”
세아는 고개를 흔들어 이준의 걱정을 밀어냈다. 이준은 문까지 부수고 달려올 정도로 세아를 걱정한 모양인데, 그녀도 나름의 수가 있었다.
“내가 직접 협회장을 만날 테니까. 일이 잘되면, 너도 눈치 안 보고 전용기로 캘리포니아까지 올 수 있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