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급의 히든 퀘스트-25화 (25/112)

25화.

13.9

헌터 협회 한국 지부로 가는 차에서 세아는 부모님과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엄마, 아빠랑 같이 있지? 일단 조심해. 요즘 분위기 이상한 거 알잖아.’

‘그래? 분위기가 뭐가 이상한데?’

‘협회 소식 못 들었어? 최초의 버그 어쩌고 하는 거.’

‘아, 그거.’

어머니는 아무 걱정 없다는 듯 맑게 웃었다. 인도 던전을 공략하면서 한바탕 힘을 쏟아 개운한 모양이었다. 세아는 흘려듣지 말라고 했지만 어머니는 건성으로 대꾸했다.

‘그래, 그래. 와서 뭐 한다고 하면 하라고 하면 되지. 어차피 우린 아닐 테니까.’

‘엄마랑 아빠만 아니라고 다 되는 게 아니야.’

‘그럼?’

엄마 딸이 최초의 버그일지도 몰라서 그래. 내가 버그의 원인으로 몰려서 제거 당할지도 몰라서 그런다고. 그런 소리를 대놓고 할 수는 없었다. 부모님을 너무 놀라게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무엇보다도…… 세아는 부모님의 지금 생활이 마음에 들었다. 넓고 휑한 집에서 종일 소일만 하는 게 아니라, 던전도 찾아다니고 세계여행도 다니는 부모님. 문제 인식이나 적응력은 좀 떨어져도 활기차고 즐거운 부모님.

‘왜, 문제 있어, 세아야?’

‘문제는 무슨. 딸이 S급인데.’

‘그래도 엄마는 차라리 네가 A급이면 더 좋았을 것 같아. 그냥 B급이나. 허구한 날 인터넷에 얼굴 팔리고, 때 되면 인터뷰해야지, 이런 일 생기면 제일 바쁘지, 새 던전만 열렸다 하면 동원되지……. 어휴.’

넋두리 같은 말을 늘어놓으며 어머니가 고개를 저었다. 세아는 이해 받는 듯한 느낌에 자기도 모르게 살짝 웃었다.

이전 생에서는 부모님과 멀어지고 말았다. 그들은 세아를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다. 주야장천 딸 걱정을 하긴 했지만, 딸이 실제로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는 몰랐다. 세아도 헌터 사회에 대해 전혀 모르는 부모님에게 이런저런 하소연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꼭 몸조심해. 알았지? S급이라고 무적은 아니잖아.’

‘응, 엄마.’

세아는 창밖의 서울 정경을 내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처음에는 이 세상이 잘못된 것 같아 두려웠는데, 정신만 바짝 차리면 이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차근차근 대비하고 위험한 돌부리를 제거하며 나아가면 된다.

“도착했습니다.”

기사의 말과 함께 차가 부드럽게 정차했다. 세아는 곧장 문을 열고 내리며 협회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원래는 대기업이 돈을 쏟아 부어 지은 타워였다. 그러나 세상이 뒤집히자, 헌터 협회는 어마어마한 부를 쓸어 모았고 서울의 가장 높은 건물을 인수하기에 이르렀다. 재앙 후 고작 5년이 지났을 뿐인데.

보는 것만으로도 압도될 것 같다. 너무 높고 큰 건축물을 가까이서 올려다보면, 그대로 압사당할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세아는 스물네 살, 처음으로 대기업에 입사했을 때 그런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그녀는 S급 헌터였고, 무슨 일이 있어도 클리어해야 할 히든 퀘스트까지 반강제로 획득했다. 건물 따위에 기가 죽어 어깨를 움츠릴 수는 없었다.

“금방 나올 테니까 지하에서 기다리세요.”

기사에게 그렇게 지시한 후, 세아는 곧장 정문으로 들어갔다.

자동문은 소리도 없이 열렸다. 1층 천장은 까마득하게 높아서 불안한 느낌까지 들었다. 세아는 앞으로 똑바로 걸어갔다. 움직이기 편한 굽 낮은 신발, 하나로 질끈 묶은 머리카락. 그녀는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었다.

안내 센터에서 기다리고 있던 직원이 재빨리 달려 나왔다. 그가 친절한 미소를 띠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팔을 뻗었다.

“이세아 헌터님, 바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협회장은 꼭대기에 머물고 있다. 엘리베이터는 엄청난 속도로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협회 건물에 제대로 방문한 건 처음이지만, 주위를 둘러볼 마음도 들지 않았다. 세아는 전투하러 가는 사람처럼 짧은 숨을 내쉬었다.

마침내 최상층.

협회장실 앞에서 직원이 공손히 노크했다. 안에서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리려나 느긋하게 기다렸는데,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고 한 남자가 나타났다. 네모난 턱과 짧은 머리카락, 두꺼운 입술과 기이한 느낌의 삼백안.

세아는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정이준의 경고가 아득하게 머릿속에 떠올랐다.

‘조심해요, 누나. 증거는 없지만, 전 최두정이 이전 협회장 김송숙 선생님을 죽였다고 생각해요. 누나도 어떻게 할지 몰라요.’

“안녕하세요, 협회장님. 이렇게 직접 환영해 주시니 기쁘네요.”

협회장, 최두정이 앞니가 모두 드러날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 비정상적일 정도로 흰 이가 가지런히 보였다.

“저야말로 반갑습니다, 이세아 헌터.”

세아는 힘있게 악수했다. 최두정의 새까만 눈이 기묘하게 번뜩였다.

완전히 처음 보는 사람이다. 반복된 지난 생에서, 혹시 잠시라도 마주친 적 없을까 했는데 얼굴이 너무 낯설었다. 길게 찢어진 눈이며 두툼한 볼살까지, 지나가다 봤으면 조폭인 줄 알았을 것이다.

그때, 최두정이 자리를 권하며 먼저 앉았다.

“이세아 헌터와 만날 날을 고대해 왔죠.”

“저를요? 의외네요.”

“모르셨겠지만 이전 협회장님이 이세아 헌터에게 정말 관심이 많았거든요.”

세아는 그러냐는 듯 살며시 웃었지만 전혀 반갑지 않았다. 이전 협회장에 이어 지금 협회장까지 세아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 좋은 의미의 관심일 것 같진 않았다.

“제게 왜요?”

“글쎄요, 그건…….”

그때. 밖에서 누군가 노크했다. 나중에 오라고 할 법도 한데, 최두정은 반가운 목소리로 외쳤다.

“들어와!”

안으로 들어온 건 흰 가운을 입은 남자였다. 오래전에 유행했던 디자인의 은테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어깨가 좁고 몸이 마른 데다 목까지 움츠리고 있었다. 세아는 최두정의 저의를 파악하지 못해 침묵을 지켰다. 곧 최두정이 활기찬 어조로 설명했다.

“우리 곽남주 연구원입니다. 버그 던전이나 몬스터에 대해 꾸준히 연구해 줬죠. 버그에 대해 이만큼 알아 낸 건 다 곽남주 선생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과찬이십니다.”

곽남주는 쩔쩔매며 허리를 접었다.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라면 협회장과 친분도 있고 자신감도 내보일 법한데, 곽남주는 안 맞는 옷을 입은 듯 비굴해 보이기까지 했다.

협회장은 찻잔 하나 없는 매끈한 유리 테이블을 쓸었다. 먼지가 있나 없나 보듯 손가락을 들여다보며 그는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을 던졌다.

“이세아 헌터가 ‘최초의 버그’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한 사람도 곽남주 선생이죠.”

세아는 동요를 드러내는 대신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재빨리 정이준의 이름을 팔았다.

“안 그래도 정이준 헌터가 저한테 좀 무례하게 굴더군요. 다른 S급 헌터들에게도 예의 바르게 하진 않은 모양이지만, 저한텐 유독 심한 것 같아 왜 그러나 했더니.”

“그랬나요?”

“다짜고짜 저한테 스킬을 사용하려고 해서 실수로 죽여 버릴 뻔했지 뭐예요.”

세아는 소파에 편안히 등을 기대며 협회장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시겠지만, S급이 그런 실수를 하는 건 흔한 일이잖아요?”

최두정 역시 각성자지만 S급은 아니다. 협회 홈페이지에 등록된 정보에 따르면 그는 B급, 세아는 이 자리에서 그를 가루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었다. 그가 더 도발하면 세아는 참지 않을 작정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최두정도 바보는 아니었다. 그는 한 걸음 물러나듯 몸을 뒤로 빼며 헛기침을 했다.

“그래서, 오늘 절 보자고 한 이유가 뭡니까?”

“S급 헌터는 지금 출국이 금지되어 있어서요. 미국에 좀 가고 싶은데.”

“미국엔 왜요?”

그 질문에 세아가 빙긋 웃었다.

“지금 입국 심사 하시는 건가요? 제가 미국에 가는 이유까지 알고 싶으세요?”

“협회장으로서 의무를 다하는 겁니다, 이세아 헌터.”

세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 정도 질문은 예상했으니 답하는 게 어렵진 않았다.

“카일리를 좀 만나러 가려고요. 보고를 받으셨을 테니, 아시죠? 정이준 그 싸가지 없는 새끼가 카일리한테 속박 스킬을 사용했다고 하던데.”

“그런데요?”

“그 얘기를 듣고 나니 카일리와 못 만난 지 오래됐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안 그래도 카일리가 저한테 전화해서 하소연하길래 정이준 끌고 가서 사과라도 시킬까 싶었죠.”

물론 카일리가 자신에게 전화를 걸었다는 건 새빨간 거짓말이다. 둘은 그리 자주 연락하는 사이도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핑곗거리가 필요했다.

“아시겠지만 정이준이 좀 버르장머리가 없잖아요.”

“카일리 헌터는 이해할 겁니다.”

“정말요? 저랑 마지막으로 통화했을 땐 별로 이해 못 하는 것 같던데.”

최두정이 조용해졌다. 협회장이라고 해도 S급을 제어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아마 최초의 버그만 잡아내면 그만이라고 생각해 S급 헌터에게 함부로 굴었겠지만, 이제 협회도 S급의 비위를 맞출 때가 온 것이다.

“같은 한국인이잖아요. 제가 정이준 데려가서 확실히 사과시키고, 겸사겸사 친목 도모도 하고, 관광도 하고 해야죠.”

“좋습니다.”

오래 고민할 줄 알았는데 최두정은 의외로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그때까지도 엉거주춤 서 있던 곽남주를 바라보며 말했다.

“대신 저 친구도 데려가시죠.”

“연구원을요?”

“저희도 카일리 헌터에게 성의를 보여야죠. 그리고 상황이 상황인 만큼, 아무 안전장치 없이 S급 헌터를 둘씩이나 해외로 내보낼 순 없습니다. 물론 이 정도는 이해해 주시겠죠.”

세아는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감시자를 함께 보내겠다?’

그래도 곽남주 연구원을 위아래로 훑어보니 대단한 위협이 될 것 같진 않았다. 일단 캘리포니아로 가는 게 중요해서, 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각성자인가요?”

“아뇨.”

“그럼 저희가 보호해야겠군요.”

“혹만 붙여 보내는 게 아닌가 모르겠네요.”

최두정은 사람 좋은 척하며 웃었다. 한 방 먹였다 싶은 모양이라 세아는 마주 미소했다.

“별말씀을. 미각성자나 낮은 등급 헌터를 보호하고 통제하는 것도 S급의 의무인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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