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빛부터 밝혀!”
세아가 앞으로 손을 크게 휘두르자 빛 무더기가 사방으로 확 펼쳐졌다. 이준과 카일리도 각자의 스킬로 앞을 밝혔다. 그러자마자 오른쪽 벽이 마치 거대한 자동문처럼 스르르 열렸다.
세아는 쌍욕이 튀어나오려는 입을 겨우 다물었다. 그녀는 어른거리는 빛무리 너머에서 슬금슬금 모습을 드러내는 몬스터 떼를 볼 수 있었다. 칼. 그 빌어먹을 칼이 보였다. 뱀처럼 늘어난 칼이 이준의 목을 감싸 서걱 썰어버리던 환영이 눈앞을 스쳤다.
“누나, 저 칼 뱀처럼 늘어나니까 조심…….”
“너 링크 스킬 있어?”
세아가 그의 말을 뚝 끊었다.
‘링크’는 두 사람 이상의 힘을 연결하는 스킬로, 자신에게 없는 속성의 스킬을 사용하고 싶을 때 유용했다. 대신 연결되고자 하는 둘 모두가 링크 스킬을 보유하고 있어야 했다. 다짜고짜 묻는 말에도 이준은 당황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있긴 한데…….”
“스킬 랭크 뭐야.”
“B요.”
“내가 S니까 커버할게. 정이준, 링크!”
챙, 마치 사슬로 묶이는 듯한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손목이 흰 끈으로 연결되었다.
저번에는 처음이라 당황해서 그대로 당하고 말았다. 갑작스러운 정이준의 죽음, 그리고 김현호의 배신. 그러나 세아도 배움 없이 개죽음을 당한 건 아니었다. 그녀는 다시 그런 상황이 벌어지면 어떻게 해야 할지 충분히 생각해 두었다.
“너 정화 스킬 사용해.”
“근데 누나, 그건 광역 스킬이 아니라 한 대상에게만…….”
“그래서 나랑 연결했잖아. 셋 셀 거야. 카일리! 그 빌어먹을 미각성자 좀 챙겨!”
세아는 환한 빛 너머, 무한한 어둠 속에서 끝없이 나오는 몬스터 떼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칼이 소름끼치는 소리를 내며 자기들끼리 부딪치고, 바닥에 질질 끌리다가 빛을 반사하며 번뜩였다.
그녀는 자기 옆에 선 정이준을 보았다. 그 역시 세아가 무얼 하려는지 알아차린 듯 준비를 마쳤다. 문득, 누나 한식 좋아하잖아요, 하며 웃어 보이던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혹시 그가 지나간 모든 생을 다 기억하고 있는 건 아닐까. 혹시 그에게 까맣게 속고 있는 건 아닐까. 세아는 충동적으로 묻고 말았다.
“정이준, 너 기억나?”
이준이 고개를 돌려 세아와 눈을 맞췄다. 세아는 그 검은 눈동자에서 어떤 진실, 어떤 거짓도 찾아낼 수 없었다. 심지어 그가 자기 질문을 이해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이 모든 생각을 생존 이후로 미루기로 했다.
“셋 셀 거야. 난 발동어 없으니까 너만 외치면 돼. 동시여야 돼, 알지.”
“네, 누나.”
“하나, 둘, 셋!”
세아가 정면으로 손바닥을 펼침과 동시에 이준이 외쳤다.
“정화!”
콰광! 앞쪽으로 엄청난 벼락이 내리꽂혔다. 한두 곳이 아니었다. 허공 전체에 뇌운을 펼친 듯, 일행이 둘러선 곳을 제외한 모든 곳에 번개가 꽂혔다. 눈이 부셔서 이준은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가렸다.
이준의 스킬과 세아의 스킬이 하나가 되었다.
고막이 터져 버릴 듯한 소음, 몬스터의 비명, 천지가 흔들리는 듯한 진동이 한참을 이어졌다. 모두 귀를 막고 눈을 감을 때 세아만이 굳건했다. 그녀는 정면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며 이를 악물고 스킬을 이어 갔다.
쾅! 콰과광! 세아는 한참을 더 버티다가 한순간에 힘을 거두듯 손을 치웠다.
그 순간, 사방이 밝아지고 윙 돌아가는 기계음이 자리를 채웠다. 벽이 다시 천천히 닫히기 시작했다. 발아래 남은 것은, 칼을 놓치고 쓰러진 괴이한 몬스터의 시신뿐이었다.
“하아…….”
세아가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준이 괜찮으냐고 묻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그녀는 그대로 돌아서서 곽남주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곽남주가 뭐라고 변명하기도 전에 세아가 그의 멱살을 잡아챘다.
“이 새끼야, 협회장이 우리 다 죽이라고 하든?”
“세아야, 진정해! 이 사람 미각성자야, 몰랐겠지!”
카일리가 허둥지둥 세아의 손목을 붙들었다. 그러나 세아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곽남주를 벽으로 밀어붙였다. 소름끼치는 톱니 수천 개가 돌아가는 바로 그 벽이었다. 곽남주는 백장처럼 창백한 얼굴을 마구 흔들며 거품을 물 기세로 부인했다.
“연기하지 마.”
세아가 땀에 젖은 얼굴로 웃었다. 이제는 이준까지 그녀를 말리려고 달려왔다. 세아는 곽남주의 몸을 톱니 가까이 바짝 밀어붙였다. 머리카락이 잘못 말려들기라도 하면, 그대로 머리 가죽이 뜯겨져 나갈 것이다.
“너 웃었잖아, 시발.”
“헉, 헉, 아, 아니…….”
곽남주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말을 절었다. 뒤에서 귀를 찌르는 끔찍한 기계음 때문에 눈알이 바삐 굴러갔다. 이제 그는 잘못 움직였다가 머리카락이라도 낄까 싶어 고개도 제대로 젓지 못했다.
“대답해 봐. 너 왜 저거 건드렸어. 협회장이 그냥 여기서 다 죽으라던?”
세아가 거세게 윽박질렀다. 그러나 곽남주는 땀을 비 오듯 흘릴 뿐 답하지 못했다. 뒤에서 카일리와 이준이 세아의 팔에 매달렸다. 세아는 곽남주를 노려보다가 사납게 외쳤다.
“정이준! 이 새끼한테 정화 사용해.”
“네?”
이준이 되물었지만 세아는 두 번 말하지 않았다. 곽남주에게 시선을 고정한 그녀는 정확히 목격했다, 곽남주의 입이 눈꼬리까지 쭉 찢어지는 것을.
섬뜩한 기시감이 등 뒤를 덮쳤다. 그러나 세아는 카일리처럼, 이준처럼 경악하지 않았다. 대신 한 걸음, 한 걸음 똑바로 걸어 곽남주의 형상을 한 몬스터를 그대로 톱니 사이로 밀어 넣었다.
기긱, 기기긱― 카일리가 헉 숨을 들이키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러나 세아는 덤덤하게 톱니 사이에서 피도 진액도 없이 몸이 찢기는 몬스터를 바라볼 뿐이었다.
“몬스터였어요.”
이준의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지난 생, 그 역시 이 몬스터에게 당한 적이 있었다. 지금 그걸 기억하고 있을까, 세아가 이준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는 사색이 된 카일리에게 상황을 설명하는 중이었다.
“시스템 속성 몬스터 중 하나인데, 다른 사람의 모습으로 변해 얼굴을 삼켜요.”
“이 몬스터는 웃는 게 습관인가 보네, 아주.”
지난 생의 기억을 떠올리며 세아가 찢어진 옷자락을 툭 찼다. 이준은 그쪽을 돌아보더니 주저하며 대답했다.
“그래서 ‘스마일맨’이라고 불러요. 보통 정화 스킬로만 없앨 수 있는데, 톱니 사이에 끼었으니 아마…….”
뼈도 못 추리고 가루가 되었을 것이다.
세아는 한숨을 내쉬고 얼굴을 적신 땀을 닦았다. 당장이라도 구역질을 할 듯한 카일리의 얼굴을 확인한 후, 이준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세아는 자신과 그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세아는 머리끈을 꺼내 머리를 높이 올려 묶으며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진짜 곽남주는 대체 어디 있을까?”
13.17
한 시간 가까이 1층을 전부 뒤졌다. 아무도 위험한 트랩을 건드리지 않았고, 보물 상자를 열자 나타난 층 보스 몬스터도 순조롭게 처리했다. 이번에도 시스템 속성 몬스터여서 이준이 처리해야 했다.
세아는 그가 고속 이동 스킬을 사용하며 단숨에 보스의 머리에 손을 대는 걸 보고, 최종 보스도 문제없겠다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성과는 그게 다였다.
“아니면 먼저 던전 밖으로 나간 건 아닐까요?”
이준이 조심스럽게 가능성을 제시했다. 카일리가 기다렸다는 듯 면박을 주었다.
“너 바보야? 미각성자가 어떻게 혼자 밖으로 나가?”
“혹시 모르잖아. 협회 사람이니까 스크롤을 갖고 있었을 수도 있고. 들어오기 전에 짐을 뒤져봤어야 하는데.”
“찾기 힘드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기는.”
세아는 둘의 말씨름을 무시하고 오른손을 반쯤 들었다.
“그만하고, 1층 보스 몬스터는 정리했으니까 안은 안전할 거야. 던전에는 함정이 많으니 곽남주는 거기 빠졌을 수도 있어. 한 사람은 여기 남아서 곽남주를 찾고, 나머지는 계속 나아가는 게 맞아.”
“그럼 저 새끼 두고 가자.”
카일리가 손가락으로 정이준을 가리켰다. 세아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제발 애처럼 굴지 마. 정이준만 시스템 속성 스킬을 가지고 있어. 이 던전 몬스터는 대부분 정화 스킬로 처리 가능하니까, 이준이는 무조건 데려가야 돼. 카일리, 네가 남아서 곽남주 좀 찾아 봐.”
“싫어! 나 혼자 여기서 찜찜한 협회 놈이나 찾으라고? 이 던전이 그렇게 중요해?”
“그렇다고 여기 계속 있을 수는 없잖아. 부탁해.”
세아는 카일리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여기서 곽남주 때문에 발목을 잡힐 순 없었다. 협회가 어떤 의심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한시라도 빨리 던전을 완전히 공략하고 이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카일리는 불만스런 얼굴로 눈살을 찌푸렸으나 유치하게 굴지는 않았다. 그녀는 하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대신, 곽남주 찾으면 신호 보낼게.”
카일리는 짐을 뒤지더니 동그란 호출 아이템을 건네주었다. 호출 아이템은 골프공 정도의 무게로, 여자 손에 쏙 들어올 정도로 작았다. 카일리가 신호를 보내면 작은 공이 소리를 내며 진동할 것이다.
“알겠어, 카일리. 언제든지 신호해. 탈출 스크롤은 있지?”
“응.”
“혹시라도 위험해지면 바로 탈출하고.”
“나도 S급이야. 걱정 마.”
카일리의 어깨를 두드린 후, 세아는 이준에게 가자고 고갯짓을 했다. 1층 보스 몬스터를 처리한 후 다음 층으로 가는 통로는 즉시 개방되었다. 이제 그곳으로 가기만 하면 된다.
다음 층으로 가기 전, 세아는 고개를 돌려 혼자 멍하게 선 카일리를 확인했다. 구멍으로 펄쩍 뛰어내리기 직전 카일리와 눈이 마주쳤다. 협회 연구원이 던전에서 죽으면 성가셔질 테니, 카일리가 잘 해내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잘된 거야.’
핑계대지 않고 카일리를 떼어놓을 수 있게 되었다. 곽남주가 시신으로 발견되어도 어쩔 수 없다. 일단은 목표에 집중하자.
“이준아, 가자.”
이제 남은 관문은 하나, 정이준의 배신을 막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