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아니라고 해야 한다. 고개를 젓고, 불안해하는 그를 달래자. 세상이 원래대로 돌아가고 나면 던전도 몬스터도 없는 안전한 땅에서 행복하게 살자고 하자.
그러나 세아보다 이준이 좀 더 빨랐다.
“여기서 누나를 배신하면, 누나는 정말로 나를 잊겠죠.”
이준이 머리카락을 매만지던 손을 거두어 갔다. 세아는 그가 운다고 생각했다. 눈이 젖은 것도 아니고 뺨도 깨끗하고 목소리도 멀쩡한데, 이준이 운다고 느꼈다.
자신의 어떤 면이 정이준을 이렇게 끌어당기는지 알지 못한다. 알 수 있는 건 단 하나, 여기서 너를 사랑한다고 말해도 이준은 그게 거짓임을 알아차리리라는 것.
세아는 잠잠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누나가 날 잊는 건 싫으니까, 할게요.”
탁, 긴장이 풀렸다. 이준은 진심이다. 이번에 그는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이번에야말로 이 지긋지긋한 회귀를 끝내고 자유로운 삶을 살 것이다.
“우리 만난 적 있죠?”
이준이 한 발짝 가까이 다가왔다. 대답 없는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이준이 조르듯 재촉했다.
“말해 주세요. 이게 처음일 리 없어요. 그게 아니라면,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누나를 이렇게 간절히 원할 리가 없어요.”
말할 수 없다. 세아는 입을 다물고, 핏기가 가신 얼굴로 이준을 바라만 보았다. 이준이 고통에 젖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병이 난 것 같아요. 제발 날 낫게 해 주세요…….”
세아는 마치 속박 스킬에 걸린 것처럼 굳어 버렸다. 눈도 제대로 깜빡일 수 없었다. 언젠가 이와 똑같은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때 세아는 이준과 입술을 겹쳤다. 그와 집에서 보냈던 긴 밤, 마음과는 상관없이 몸을 적시던 쾌락.
세아는 대답 대신 왼손을 뻗어 홈에 댔다. 딱 맞았다. 세아가 선언했다.
“이런 세상에선 안 돼.”
이준이 오른손을 움직여 홈에 끼웠다. 그쪽도 정확했다. 시선은 여전히 세아에게 고정된 채였다. 세아는 그의 열망에 답하지 않으려고, 빨려 들어가지 않으려고 꼿꼿하게 서서 버텼다.
거대한 쇳덩이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났다. 철컥, 어디서 났는지 알 수 없는 소리와 함께 벽에서 돌던 톱니가 일제히 멈췄다. 두 사람은 이제 열리는 문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거대한 두 개의 문이 안쪽으로 천천히 열렸다.
“절대 실패하면 안 돼. 알겠지.”
세아가 다짐을 받듯 말했다. 이준은 네, 하고 짧게 대답했다.
문틈 사이로 도사린 보스 몬스터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어둠 속에서 한 발, 한 발씩 걸어 나온다. 던전이 바뀌었으니 보스 몬스터도 바뀌었을 건 짐작했다. 세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몬스터의 정체를 파악하려 했다.
“누나, 저거 설마…….”
이준이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중얼거렸다.
“하마 맞아요?”
세아는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대답하지 못했다.
보스 몬스터가 용도, 사자도, 불타는 새도, 인간형도 아닌 하마라니. 물론 몬스터의 겉모습이 중요한 건 아니지만 하마는 처음 봤다. 게다가 생긴 게 특이하지도 않았다. 평범한 하마가 커지기만 한 것 같았다.
“용보단 낫잖아. 걘 날아다니니까.”
세아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이준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저 몬스터에게 링크 공격이 통할지 모르겠어. 일단은 링크 스킬로 원거리에서 공격해 보고, 그게 안 되면 네가 다가가서 직접 정화 스킬을 사용해야 돼.”
“네. 아, 속박 스킬을 써 볼까요?”
이렇게 반응하면 안 되는데, 그의 입에서 ‘속박’이라는 단어가 나온 순간 세아는 허공으로 펄쩍 뛰어올랐다. 순간적으로 그가 다시 속박 스킬을 사용하려는 줄 알았다.
“그 스킬은 사지도 않았고 특별히 획득 퀘스트를 수행한 것도 아닌데 자연스럽게 열렸거든요. 혹시…… 이런 순간에 쓰라고 열린 건 아닐까요?”
“저 몬스터한테 써 본다고?”
다행히 몬스터는 바로 달려드는 대신 얌전히 서 있기만 했다. 곧장 공격하던 용과는 좀 달랐다. 거대한 하마는 멀리 떨어진 곳, 보스 룸의 맨 안쪽에서 고개를 기울인 채 두 사람을 바라볼 뿐이었다.
“시도는 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건 원거리도 가능하니까. 속박!”
말릴 틈도 없이 이준이 손을 뻗으며 외쳤다.
그러나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심지어 하마는 고개를 털며 게으르게 하품까지 했다. 동물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 평화로운 느낌에 세아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준이 머쓱하게 손을 거두었다.
“안 되네요. 아무래도 대상 이름을 정확히 알아야 하나 봐요.”
“그런데 왜 공격을 안 하지?”
세아가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고 혼잣말처럼 물었다. 이준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하긴 해요. 선공형이 아닐 수도 있지만…….”
던전의 최종 보스 몬스터는 무조건 선공형이다. 선공형이 아닌 경우는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저 하마도 두 사람 쪽을 바라보고 있긴 했다. 인식은 했는데 후속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다.
“페이크 보스 아니야?”
“아니면 2단계가 있을 수도 있고요.”
한 번 죽이면 더 강한 형태로 살아나는 몬스터도 있었다. 이준의 말을 들으니 그가 옳은 듯도 했다. 일단 한 번 죽이고 다시 시도해야 할지도 모른다.
“제가 가까이 다가가 볼게요.”
“잠깐 기다려. 넌 안 돼. 정화 스킬은 너만 가지고 있잖아.”
세아가 방어 스킬을 사용했다. 시스템 속성 몬스터의 공격으로부터 얼마나 안전할지는 모르지만, 없는 것보단 낫다.
정신을 집중하니 몸 전체에서 푸른 기운이 흘러나왔다. 지금은 무형의 기체에 불과하지만, 공격당하면 즉시 단단한 방패처럼 몸을 감싸 줄 것이다. 세아가 한 걸음 나아가는데, 이준이 덥석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러지 말고, 아까 이야기한 대로 원거리에서 공격해 봐요. 지금은 저래도 어떻게 변할지 모르잖아요.”
하마는 귀가 가려운 듯 머리를 탈탈 털더니, 벽으로 다가가 멈춘 톱니에 귀를 비볐다. 뾰족한 톱니에 긁혀 피가 흐르는데도 몇 번이나 더 몸을 비비는 걸 보니 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활을 만들어 시위를 당겼다. 이준의 힘이 화살촉에 실리니, 은은한 빛이 일렁거렸다. 세아는 흡 숨을 멈추고 그대로 시위를 놓았다. 화살은 엄청난 속도로 허공을 가르며 하마에게로 날아갔다.
그런데 그때, 머리를 벽에 비비던 하마가 고개를 돌리더니 입을 쩍 벌렸다. 입안은 마치 블랙홀처럼 검고 깊고 기이했다. 화살은 그대로 입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세아와 이준은 다가올 공격에 대비해 몸을 긴장시켰다. 그러나 하마는 게으르게 귀를 한번 팔락거리더니 관심 없다는 듯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원거리는 안 되는 것 같아요. 가까이 가 볼게요.”
이준은 세아가 말릴 틈도 없이 걸음을 옮겼다. 혹시 달아나야 할 수도 있으니 고속 이동 스킬을 사용하긴 했지만, 접근은 느리고 침착했다. 이런 몬스터는 언제 어떻게 돌변할지 모른다. 이준은 한 걸음씩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다가갔다.
손을 높이 뻗었지만 하마의 배에도 닿지 못했다. 이준의 키가 큰 걸 생각하면 하마의 크기가 어마어마한 것이다. 이준은 손이 잘리거나 녹아 버려도 놀라지 않으려고 심호흡을 한 후, 과감하게 하마의 다리에 손을 얹었다.
하지만 몬스터는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세아는 여차하면 달려가 그를 구할 작정으로 감각을 끌어올렸다. 바로 그때, 이준이 외쳤다.
“정화!”
쩍, 쩌적― 이준의 손이 닿은 부분부터 몬스터의 몸이 빠르게 얼기 시작했다. 거친 거죽에 살얼음이 끼고,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온몸이 얼어 버렸다. 이준은 끝까지 손을 떼지 않고 이를 악물었다. 스킬이 진행되는 동안엔 집중력을 유지해야 한다.
‘됐다!’
몬스터의 머리까지 완전히 얼었을 때 세아는 속으로 환호했다. 지금이라면 이준에게 키스를 퍼부을 수도 있을 듯했다.
“이준아, 됐……!”
챙! 몬스터의 몸을 감쌌던 얇은 얼음이 마치 유리잔 깨지듯 깨져 버렸다. 날카롭고 커다란 얼음 파편이 그대로 날아와 세아의 발치에 박혔다.
가까이 있던 이준은 제대로 피하지 못했다. 방어 스킬을 가동했지만 가장 먼저 날아온 파편이 창처럼 그의 오른손을 꿰뚫었다. 못이 박힌 것처럼. 피가 후드득 떨어지고, 이준이 비명을 참기 위해 입술을 세게 짓이겼다.
몬스터는 약간의 타격도 입지 않은 듯 파라락 머리를 털었다.
“정이준!”
세아가 급히 달려갔다. 그러나 이준이 더 빨랐다. 그는 왼손을 얹고 다시 소리쳤다.
“정화!”
몬스터의 몸이 얼었지만, 이번에도 의미 없었다. 다시 깨지고, 다시 정화, 다시 깨지고, 다시 정화. 그러는 동안 이준의 몸은 파편에 긁혀 엉망이 되었다. 찢어진 이마와 뺨, 허벅지와 발등에서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미친 새끼야, 그만해!”
뛰어간 세아가 억지로 그를 잡아끌었다. 그러나 세아보다 이준이 더 충격받은 것 같았다. 그는 핏기가 싹 가신 낯으로 세아를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정말, 정말로 사용했는데…….”
일부러 스킬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았다는 의심은 하지도 않았다. 세아는 이를 악물고 그를 몬스터로부터 멀리 떨어뜨리며 혼잣말처럼 대답했다.
“알아. 뭔가 문제가 있어.”
“누나 속인 게 아니에요. 진짜로…….”
“안다고, 아니까 그만하라고!”
세아가 주머니에서 비상 탈출 스크롤을 꺼냈다. 그녀는 얼음 조각에 꿰뚫린 이준의 오른손을 보았다. 끔찍한 고통일 텐데도 이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세아만 보고 있었다. 그녀의 입술에 자기 생명이라도 달린 듯.
“나가자. 일단 여기서 나가야 돼.”
세아는 이준의 왼손에 스크롤을 쥐여 주었다. 그다음 자기 손으로 스크롤 반대편을 잡고 쭉 찢었다. 두 사람의 몸이 해체되듯 사라졌다. 그들이 떠난 후, 보스 몬스터는 평화롭게 하품을 하며 자리에 드러누웠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