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급의 히든 퀘스트-31화 (31/112)

31화.

13.20

이준의 몸은 피투성이였다. 가까이서 쏟아지는 파편을 맞은 탓에 긁히고 찔려 엉망이었고, 손바닥에 박힌 얼음은 뜨거운 피에도 제대로 녹지 않았다.

세아는 던전 앞에 이준을 앉히고 상처부터 치료했다. 이준이 치유 스킬을 사용할 힘이 없어 보여서, 일단 손바닥에 포션부터 들이부었다. 엄지 크기의 병에 몇십만 원을 호가하는 고급 포션이 몇 개고 이준의 몸에 쏟아졌다.

작은 상처는 순식간에 나았지만, 문제는 손이었다. 손바닥 가까이 불을 사용하기도 어려워서, 결국 세아는 손바닥을 뚫고 들어간 얼음을 밀어서 손등 쪽으로 빼내야 했다. 이준은 입술을 짓뭉개며 고통을 참았다.

“한두 번 해 보고 안 되면 적당히 그만둬야지, 지금 공략 못 하면 죽는 것도 아닌데 왜 멍청하게 굴어.”

세아는 보기 흉하게 뻥 뚫린 상처에 포션을 부으며 타박했다. S급으로 지내며 오만 상처를 입어 봤지만, 남의 상처를 이렇게 가까이서 보긴 처음이었다. 좋은 말이 나가질 않았다.

이준은 조직이 촘촘하게 얽히고 뼈와 근육이 복원되는 모습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이거 퀘스트 아닌가요?”

움찔한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왜 시스템을 살해하고 싶으냐고 묻기에 적당히 둘러댔는데, 퀘스트라는 걸 알아차린 모양이다.

“페널티 있을까 봐요.”

“없어, 그런 거.”

“그리고 누나가 오해할 수도 있잖아요, 스킬 사용 제대로 안 했다고.”

“그런 오해 안 해.”

손바닥의 상처가 완전히 사라졌다. 열 개 이상의 포션을 사용해, 바닥에 빈 병이 가득했다. 이준은 통증이 사라지자 좀 살 만한지 세아를 보고 빙긋 웃었다.

“고마워요.”

세아는 빈 병을 다시 가방에 집어넣으며 대꾸하지 않았다. 이준은 바닥에 앉은 채 자기 손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잠시 시간이 지난 후, 그가 가방을 닫는 세아를 향해 물었다.

“왜 스킬이 통하지 않았을까요?”

“통했어.”

“하지만…….”

“뭔가 부족한 거야.”

세아는 확신하는 투로 답했다.

스킬이 아예 통하지 않았다면, 몬스터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야 한다. 물 속성 몬스터에게 물을 부으면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것처럼. 그러나 보스 몬스터는 분명 잠시 얼었다가 깨어났다.

“스킬 자체가 잘못된 건 아니라는 거지. 뭔가 후속 작업이 필요한 것 같은데……. 스킬 설명 좀 읽어 봐.”

이준은 스킬창을 여는 듯 잠시 말이 없었다. 그동안 세아는 황량한 주위 풍경을 자세히 살폈다.

지금까진 의식하지 못해 몰랐는데, 큰 공사가 진행되다 중단된 공간인 듯했다. 철근 같은 공사 자재가 여기저기 널려 있고, 빈 시멘트 자루며 먼지 앉은 삽, 안전모 따위도 눈에 들어왔다. 곧 이준이 스킬 설명을 읽기 시작했다.

“정화. 스킬 등급 S. 스킬 속성은 시스템. 상세 설명은, 시스템 보스 던전을 정화한다. 시스템을 소멸시킬 수 있는 유일한 스킬이다. 일반 속성 몬스터에게도 사용할 수 있다. 스킬 강화 방법…….”

이준이 말을 뚝 멈추었다. 세아가 재촉하듯 왜, 하고 묻자 그가 고개를 갸웃하며 옆에 앉은 세아를 바라보았다.

“글자가 깨졌어요.”

“뭐?”

“스킬 강화 방법은 원래 없었는데, 갑자기 생겼거든요. 그 뒤로 이어져야 할 글자가 외계어처럼 다 깨져서 나와요. 아무래도 오류인 것 같아요.”

“시스템 오류라고?”

이런 적은 한 번도 없다.

시스템은 갑자기 나타났지만 놀랄 정도로 정교하고 섬세했다. 게임에서 흔히 발생하는 번역 오류조차 없었다. 시스템 메시지가 외딴 섬의 토착어로도 나타났을 정도다. 당연히 글자가 깨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거짓말 아니야?’

세아는 눈을 굴려 이준의 얼굴을 살폈다. 그는 허공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시스템 창을 만지려는 듯 손을 뻗었지만, 손가락은 이리저리 방황할 뿐 한 지점을 짚지 못했다.

“이상한데요. 아무래도 이 현상은 저 혼자 해결하긴 힘들 것 같아요. 협회나 길드에 알리고 도움을 받는 게 좋지 않을까요?”

“정말 글자 깨진 거 맞아?”

“네?”

이준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세아를 돌아보았다.

의심하는 건 미안하지만, 그에게 너무 여러 번 당해서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지금 당장은 이준의 말이 옳았다. 어쩌면 기존에 보고된 오류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누나, 전화 오는데요.”

이준이 세아의 짐 쪽을 바라보며 알려 주었다. 진동 소리도 제대로 못 듣고 있던 세아가 얼른 핸드폰을 꺼냈다. 어쩌면 던전에 남겨 두고 온 카일리나 곽남주 연구원일지도 모른다. 미리 나와 있다가 전화를 걸었을지도.

화면에 표시된 건 모르는 번호였다. 카일리나 곽남주의 번호는 모두 저장되어 있어서, 세아는 한숨을 내쉬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이세아 헌터, 저희 지금 캘리포니아 공항입니다.”

“네?”

누구냐고 물으려는 순간 목소리의 주인을 깨달았다. 협회장 최두정이었다.

“곽남주 연구원의 생명 신호가 꺼졌습니다.”

“잠깐, 잠깐, 지금 그거 때문에 여기 왔다고요?”

“물론 그것 때문만은 아닙니다. 곽남주 연구원의 위치 신호가 마지막으로 표시된 장소로 가고 있으니, 거기서 만납시다. 던전 앞이라고 나오는데 거기서 보죠.”

뭐라고 되묻기도 전에 전화가 뚝 끊어졌다. 세아는 통화 종료 화면을 내려다보며 눈을 깜빡였다.

“뭐야?”

“무슨 일이래요?”

“곽남주 연구원이 죽은 것 같대. 생명 신호 추적하는 장치까지 달아 놓은 모양이네.”

“연구원들도 은근히 위험한 곳에 갈 일이 많아서…… 칩 같은 거 자주 삽입해요.”

별짓을 다 하는군. 세상이 미쳐버리기 전까지 그런 일은 사생활 침해였는데. 세아는 그런 생각을 하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지금 공항에서 여기로 오겠대. 설명도 제대로 안 하고 그냥 끊어 버리네. 급한 일인 것 같아.”

“일단 카일리한테 전화해야 하지 않을까요?”

카일리의 전화는 먹통이었다. 아직 던전 안에 있는 듯했다. 세아는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문지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가 가서 데려올게. 넌 여기서 협회 사람들 기다리고, 만나면 그 오류 이야기도 해 봐. 그 전에 카일리랑 내가 나올 수도 있지만.”

“같이 가요. 시스템 속성 스킬은 저밖에 없잖아요.”

세아는 일어나려는 그를 말리며 고개를 저었다.

“협회장이 좀 이상했어. 거의 명령하는 투였다니까. 대단하신 몸이 한국에서 캘리포니아까지 직접 왔다는 걸 보니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너까지 여기 없으면 우리가 달아났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 전화해서 설명해도 들어가지 말라고 할 테고.”

어차피 곽남주 연구원을 찾으며 1층은 전부 정리했다. 몬스터가 새로 나타났을 수도 있지만, 급한 대로 정리하면 된다.

“누나, 잠깐만요.”

이준이 덥석 세아의 손을 잡았다. 그러더니 자기 짐을 뒤져 하얀 스크롤을 건네주었다. 그게 뭔지 알아본 세아가 입을 딱 벌렸다.

“너…… 이거 어디서 났어?”

사용 시점에 원하는 장소로 갈 수 있는 지정 이동 스크롤이었다.

세아도 전에 딱 한 번, 이 스크롤을 만져 보았다. 히든 퀘스트 클리어 조건을 알아내지 못해 몇십 년씩 다시 살 때를 포함해서 딱 한 번. 그만큼 구하기 힘든 아이템이었고, 억만금을 줘도 살 수 없는 물건이기도 했다.

“예전에 퀘스트 클리어하고 보상으로 받았어요. 몇 년 됐지만 사용하는 데는 문제없을 거예요.”

“이걸 왜 주는데?”

“누나도 짐작하잖아요.”

이준이 검은 눈으로 세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는 말을 이으려고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어떤 어조로 말해야 할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이준은 곧 밝은 목소리로,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명랑하게 뱉었다.

“협회가 누나를 ‘최초의 버그’로 의심하고 있다는 거. 나오면 협회 전투 인력이 대기하고 있을 수도 있어요. 아무리 누나 스킬이 대단해도 애초부터 몬스터를 대상으로 한 거라, 쏟아지는 총알을 계속 견딜 순 없잖아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럼…….”

“협회는 누나를 죽이려고 오는 건지도 몰라요. 협회장이 여기서 기다리라고 했다면서요. 하지만 평범한 방법으로는 최초의 버그를 완전히 없앨 수 없죠. 분명 나한테 누나를 정화하라고 할 거예요.”

이준은 마치 책이라도 읽듯 침착하게 이 모든 말을 했다. 세아는 그를 멍하게 바라볼 뿐 어떤 대답도 줄 수 없었다. 나는 최초의 버그가 아니야, 나한테 정화 스킬을 사용해도 돼, 협회는 헛물만 켤 거야. 그런 말을 뱉을 수가 없었다.

“나왔을 때 내가 인질이 되어 있으면, 스크롤을 찢고 달아나세요.”

“…….”

“그리고 카일리도 믿지 말아요. 정말 던전이 그리워서 여기까지 따라왔을 리 없어요. 꼭 누나 혼자 달아나야 해요.”

이준은 거기까지 말하고 잠시 멈추었다. 세아는 묻고 싶었다. 너도 나를 의심하느냐고. 나한테 정화 스킬을 사용하지 않은 건 내가 최초의 버그임을 확신해서냐고. 그런데도 왜 나를 돕느냐고.

“나는 누나를 정화하지 않아요. 누나가 정말 최초의 버그라고 해도, 그래서 세상이 잘못되었다 해도, 그것 때문에 계속 사람들이 죽는다고 해도 절대. 누나는 날 이해 못 하겠죠, 사람이 죽는 게 싫어서 시스템을 없앤다고 했으니까.”

“이준아.”

“그냥 잘못된 세상에서 누나랑 살래요.”

이준이 눈부시게 웃었다. 세아는 그의 눈을 피하지 못했다.

“다녀오세요, 세아 누나.”

13.21

이준에게 아무 대답도 해 주지 못했다. 그런 말을 듣게 될 줄은 전혀 몰랐으니까.

이해가 가지 않는다. 자신에게 무얼 바라 이러는 것인지, 앞으로 뭘 어쩌겠다는 것인지. 일단은 해야 할 일에 집중하는 수밖에 없었다.

“카일리?”

던전으로 들어가 불렀는데,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불길한 느낌이 발아래서부터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전화를 걸었을 때 응답할 수 없는 상태였으니 아직 던전에 있는 건 분명한데, 곽남주를 찾다가 어디까지 가 버린 것인지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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