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카일리!”
보스 룸 문을 열 때 벽의 톱니가 멈추었는데, 그게 1층까지도 영향을 주는 모양이었다. 철컥, 철컥 맞물리며 돌아가던 기계음이 사라지고 사방이 고요했다. 홀로 걷는 발소리가 또렷하게 울려 몹시 거슬렸다.
1층이 너무 넓다. 이대로 가다간 몇 시간이 지나도 카일리를 찾지 못할 것 같았다.
세아는 짐을 뒤져 아이템을 꺼냈다. 손바닥만 한 확성기였다. 던전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아이템인데, 게임으로 따지면 ‘전체 서버에 메시지 보내기’ 아이템과도 비슷했다. 물론 현실에는 서버가 없으니, 일정 규모의 공간에 목소리를 전할 수 있었다.
커버할 수 있는 범위가 꽤 넓으니 카일리도 자기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호출 아이템이 울리지 않았으니 위험에 처한 것도 아닐 테고. 세아는 작은 확성기에 입술을 가까이했다.
“카일리! 나 세아야. 던전 출구 쪽으로 나와. 문제가 생겼어. 내 말 들리면 들린다는 뜻으로 호출 아이템 사용해서 알려 줘.”
카일리와 나누어 가진 호출 아이템을 바라보았으나, 골프공 크기의 아이템은 미동조차 없이 조용했다. 세아는 확성기에 표시된 사용 시간을 확인했다. 앞으로 1분 정도는 더 사용할 수 있었다.
“카일리, 있으면 호출 아이템 사용해! 던전 출구 쪽에서 기다리고 있어. 협회한테 연락이 왔는데, 곽남주 연구원이 죽었…….”
“이세아 씨!”
“악!”
갑자기 뒤에서 누가 손을 대는 바람에 세아는 확성기에 대고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번개처럼 뒤를 돌아보았는데, 뜻밖의 인물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곽남주?”
세아가 멍하게 중얼거렸다.
분명 협회는 죽었다고 했는데. 생명 신호가 사라졌다고……. 그러나 곽남주의 꼴을 보니 이해가 갔다. 멀쩡히 붙어 있던 오른손이 통째로 사라진 것이다.
세아는 경악하여 그를 살피다가 물었다.
“포션 사용했어요?”
절단 부위는 오래전에 치유된 상처처럼 뭉툭하고 말끔했다. 살이 심하게 엉기긴 했지만 그래도 피가 흐르지는 않았다. 곽남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몬스터 피해서 혼자 달아나다가, 떠밀려서 실수로 벽을 짚는 바람에……. 그, 그래도 갑자기 번개가 쳐서 겨우 살았습니다.”
“번개?”
세아가 얼굴을 찡그렸다. 번개라면 분명, 늘어나는 칼을 가진 몬스터를 해치울 때 사용한 스킬이다. 범위가 넓은 스킬이긴 하지만, 그 범위 내에 있었다면 곽남주도 그리 멀리 있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왜 진작 나타나지 않았을까?
“우리가 찾는 소리 들었어요?”
“드, 듣긴 했는데…….”
“근데 왜 안 나왔어요.”
곽남주는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어물거렸다. 세아는 이 새끼의 멱살을 잡아 흔들어 대답을 들을까 잠시 고민했다. 다행히 세아가 생각을 행동에 옮기기 전에, 그가 얼굴을 시뻘겋게 붉히며 대답했다.
“상처에 포션 사용하자마자 기절해 버려서…… 원래 빈혈이 좀 심하거든요.”
빈혈? 빈혈이라고? 세아는 기가 차서 입만 벌렸다. 곽남주는 억울한 듯 작은 목소리로 항변했다.
“빈혈도 질병입니다. 전 각성자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라고요.”
“알겠어요.”
세아는 그의 말을 뚝 끊었다. 질병과 미각성자에 대해 심도 깊은 토론을 할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협회는 당신이 죽었다고 생각해요. 생명 신호가 사라졌다고 하던데, 칩을 오른손에 넣은 모양이죠?”
“네.”
“어쨌든 다행이네요. 미각성자가 던전에서 죽으면 일이 커지니까. 일단 우린 카일리를 찾아야 해요.”
호출 아이템은 여전히 조용했다. 세아는 한 발 한 발 앞으로 걸어 나가며 사방을 살폈다. 바닥에서 천장까지 이어진 긴 기둥, 사각지대가 생각보다 많다. 오래된 신전처럼 높고 장엄한 공간이라 고속 이동을 사용해 돌아다녀도 시간이 걸릴 것이다.
게다가 죽은 줄 알았던 곽남주까지 옆에 붙어 있다. 언제 몬스터가 리젠될지 모르는데, 미각성자를 혼자 내버려 두고 돌아다닐 수는 없었다.
“카일리 못 봤죠?”
“네…….”
기대도 안 했지만 참 맥 빠지는 대답이었다. 세아는 옆에 있는 곽남주를 돌아보며 충고했다.
“해결 안 된 트랩이 많으니까, 아무거나 만지지 말고 나만 잘 따라와요. 30분 정도 찾아 보고 없으면 바로 나갈 거예요.”
“괜찮을까요? 카일리 헌터가 여기 혼자 남는 건데.”
“어쨌든 S급 헌터고, 비상 탈출 스크롤도 있으니까 상관없어요. 호출 응답이 없어서 혹시 위험한 지경에 처했나 둘러보는 거니까…….”
바로 그때, 강렬한 사이렌 소리가 두 귀에 꽂혔다.
윙― 윙― 날카로운 소음이 일정하게 울려 퍼지고, 붉은 등이 켜졌다 꺼지기를 반복하듯 공간의 빛이 변했다. 세아는 경고음처럼 울리는 소리에 얼굴을 구기며 곽남주를 돌아보았다.
“내가 아무거나 만지지 말라고 했죠.”
“안 만졌습니다! 만질 것도 없잖아요!”
곽남주가 시끄러운 사이렌 소리 틈으로 소리쳤다. 세아는 재빨리 그와 자신 주변을 훑어보았다. 그의 말대로 주위에는 건드릴 만한 게 보이지 않았다. 수상하게 튀어나온 장치나 움푹 들어간 땅, 괜히 한번 당겨 보고 싶게 생긴 끈 같은 건 전혀 없었다.
“뭐지?”
옆에서 곽남주가 자기도 연구원이다, 미각성자긴 해도 대책 없이 움직이진 않는다, 던전 연구도 많이 해서 경험도 있다, 하고 구구절절 불평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세아는 싹 다 무시했다.
던전은 위험한 곳이지만 이유 없이 위험해지지는 않는다.
갑자기 몬스터가 튀어나오고, 보물 상자처럼 보였던 게 폭발할 수는 있다. 하지만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이 정도 경보가 울릴 수는 없다. 분명 누군가 트랩을 건드린 것이다.
세아 자신이 아니다. 곽남주도 아니다.
그렇다면…….
“카일리, 너 어딨어!”
목이 찢어지도록 외쳤지만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바로 그때, 경보음이 멎더니 멀지 않은 허공에서 몬스터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붉은빛 속에서 터지듯 탄생하는 수십 마리 트랩 몬스터, 세아가 눈을 가늘게 뜨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가장 먼저 보인 건 이쪽을 겨눈 총구. 그다음으로 보인 건 빠르게 돌아가는 프로펠러. 세아가 손을 뻗으며 있는 힘껏 소리쳤다.
“결계!”
두 사람 주위로 반구형의 막이 형성된 순간, 가느다란 총구가 불을 뿜었다. 요란한 소리에 곽남주가 털썩 주저앉아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그러나 세아는 그렇게 한가하지 않았다. 그녀는 결계를 유지하며 몬스터 떼를 둘러보았다.
드론형이다. 사람 몸통 크기 정도로, 뜨거운 광선을 직선으로 발사한다. 이동 속도는 느리지만 쏘는 광선의 속도는 빨라서, 대강 살피니 총알보다 조금 느린 정도다. 세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개수를 헤아렸다.
스무 개 정도. 이것도 전부 시스템 속성일까. 그렇다면 말 그대로 엿 됐다. 정이준이 옆에 있다면 링크로 해치울 텐데, 지금은 곽남주와 둘뿐이다. 세아는 선택을 해야 했다. 그녀는 바닥에 엎어진 곽남주 옆에 앉았다. 그런 다음 그의 어깨를 흔들며 침착하게 말했다.
“결계 안에서는 공격할 수가 없어요. 내가 밖으로 나갈 겁니다.”
“아, 안 돼요! 헌터와 멀어지면 결계도 약해지잖아요!”
“난 S급이에요. 충분히 유지할 수 있어요. 무슨 일이 벌어져도 절대 결계 밖으로 나가선 안 됩니다.”
겁에 질린 미각성자를 달래 줄 시간은 없다. 세아는 가방을 뒤져 긴 와이어를 꺼냈다. 한쪽 끝에는 천으로 된 고리가, 다른 쪽 끝에는 끈끈이주걱과 비슷한 장치가 달려 있었다. 세아는 끈끈이에 손을 댔다 떼기를 반복하며 접착력을 시험했다.
“그, 그게 뭡니까?”
곽남주가 와락 달려들 듯 물었다. 그의 눈에 불안이 가득했다. 세아는 대답하지 않고 긴 와이어를 휙휙 결계 밖으로 늘려 보았다. 세아의 뜻대로 늘어났다 줄어들기를 반복하는 와이어를 보며 곽남주가 입을 벌렸다.
이 놀라운 아이템은 세아가 미각성자의 의뢰를 해결해 주고 사례로 받은 것으로, 스파이더맨의 거미줄과도 같았다. 잘못 사용하면 추락사할 위험이 있지만 세아는 무척 선호하는 아이템이었다.
세아는 고개를 들어 기둥의 위치를 살폈다. 어지럽게 날아다니는 몬스터의 위치도 파악했다. 곽남주가 허둥지둥 소리쳤다.
“그, 그걸로 끌어내리면 되잖아요! 추락시켜서 터뜨리면……!”
“그만한 무게를 당기진 못해요. 조용히 하고 안전한 데 있어요.”
거기까지 말한 후 세아는 힘껏 와이어를 휘둘렀다. 와이어 끝이 먼 기둥에 정확히 붙었다. 몬스터는 아이템까지 인식하진 못했다. 세아는 그대로 결계 밖으로 뛰어가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허공으로 몸이 빠르게 떠오르며 바람이 온몸을 감쌌다.
높은 곳으로 올라갈 때와 낮은 곳으로 떨어질 때의 느낌은 비슷해 공기 저항이 강했다. 세아는 기둥을 중심으로 한 바퀴 돌아 와이어를 잡고 기둥에 두 발을 딛고 섰다.
삐비빅― 몬스터가 자신을 인식하는 소리가 들렸다. 몸 곳곳에 붉은 레이저가 선명히 박혔다. 세아는 빠르게 주위를 둘러본 후 있는 힘을 다해 기둥 높은 곳까지 뛰었다. 와이어가 단단히 고정되어 있어 몸을 제대로 받쳐 주었다.
펑, 펑, 광선이 세아가 있던 자리를 강타했다. 어느 정도까지 올라간 세아는 와이어를 거두며 그대로 가장 가까운 몬스터를 향해 뛰어내렸다. 와이어를 잡고 있는데도 자유롭게 활강하는 듯한 느낌이 그녀의 마음을 지배했다.
그대로 살을 갈아 버릴 듯 돌아가는 프로펠러를 피해 중심에 안착한다. 손바닥이 몬스터에게 닿자마자 힘을 내보냈다.
쾅, 안에서부터 터지는 소리. 지직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몬스터가 아래로 천천히 떨어졌다.
됐다! 세아는 속으로 환호성을 지르며 더 아래 있는 몬스터 위로 내려앉았다. 그것도 폭발시키고 곧장 몸을 날린다. 검은 연기를 뿜으며 추락하는 모습을 제대로 보기도 전에, 멀지 않은 곳에서 수십 개의 광선이 날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