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세아는 와이어를 쓰지 않고 그대로 떨어졌다. 바닥에 닿기 직전, 팔을 크게 휘둘러 와이어를 벽에 붙였다. 원심력을 이용해 반원을 그리며 크게 돌아 한 기를 더 처리하고, 벽에 발이 닿는 순간 다시 몸을 날려 또 한 기를 처리한다.
광선을 피하기 위해 몸을 거꾸로 꺾을 때마다 세아는 이를 갈았다.
‘이럴 거면 내가 체조 선수를 했지!’
그러나 동시에 쾌감이 솟구친다. 이 아이템만이 줄 수 있는 쾌락. 몸이 깃털처럼 가볍게 느껴지고, 나무에서 나무로 건너뛰듯 허공에서 몸을 옮겨가는 감각에 잠시 아찔하다.
와이어를 몬스터에 붙였다. 몬스터를 끌어내릴 순 없으니 세아가 끌려 올라갔다. 머리가 부딪치기 전에 세아가 손을 뻗었다. 다시 쾅 소리와 함께 세아의 무게를 지탱하던 몬스터가 산산이 조각났다.
이 몬스터에서 저 몬스터로, 기둥에서 벽으로, 바닥에 착지했다가 다시 허공으로, 타이밍을 놓쳐 떨어질 것 같으면 중력을 상쇄하고 광선을 피할 수 없으면 방어를 끌어 올린다. 수십 기의 몬스터는 세아에게 약간의 상처도 입히지 못한 채 힘없이 부서졌다.
“헉, 헉…….”
마지막 한 기까지 모두 처리하고, 세아는 느리게 바닥으로 착지했다.
솔직히 힘은 많이 쓰지 않았다. 내부 폭발 스킬은 각성하자마자 개방된 스킬이라 정신력 소모도 크지 않고, 결계를 유지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와이어를 타고 온 사방을 누비고 다닌 탓에 숨이 찼다.
주위는 엉망이었다. 안에서부터 망가져 바닥으로 떨어진 쇳덩어리들이 사방에 시체처럼 널려 있었다. 기계 종말 영화에서나 보던 풍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어, 바라만 봐도 심신이 피로해졌다.
세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곽남주는 괜찮겠지, 결계 쪽으로 눈을 돌린 순간.
윙― 윙― 윙―
다시 경보가 울리기 시작했다.
세아는 믿을 수가 없었다. 방금 트랩을 정리했는데, 끝나자마자 다시……. 세아는 아득히 먼 곳, 볼 수 없는 곳을 쏘아보며 중얼거렸다.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카일리?”
13.22
몬스터는 끝없이 쏟아졌다. 게다가 처음 트랩은 장난이었다는 듯, 몇 개의 트랩이 연달아 작동되었다. 세아는 결계 밖에 몬스터의 시신으로 산을 쌓았다.
싸우는 건 자신 있었고, 이대로 몇 시간을 더 버텨야 한다고 해도 괜찮았다. 그녀는 현존하는 열세 명의 S급 중 가장 강력한 헌터였으니, 얼마든지 더 싸울 수 있었다.
꼬리가 다섯 개 달린 표범 몬스터를 처리했다. 시스템 속성이라 다섯 개의 꼬리를 모두 잘라야 했지만 그래도 할 만했다.
켄타우로스형 몬스터도 달려 나왔는데, 위는 사람이 아니라 외계인이었다. 외계인 상반신과 말 하반신을 완벽히 분리해야 죽어 자빠졌다.
마법사가 나왔을 때는 잠시 위험했지만 세아는 전방위 공격에 능했다. 그녀는 결계에 손상이 갈 걸 감안하고 불타는 운석 덩어리를 사방에 쏟았다.
윙― 윙―
세아는 다시 울리기 시작한 경보음을 듣고 헛웃음을 쳤다.
“아예 1층에 있는 트랩을 다 건드릴 모양이네.”
차라리 곽남주를 데리고 달아나는 게 낫다. 카일리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그건 나중에 알아도 된다. 곽남주를 데리고 나가 협회와 대화를 하든, 이준의 스크롤로 달아나든 해야 한다. 거기까지 계산이 섰지만 세아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지난 생, 자기 몸으로 망설임 없이 칼을 찔러 넣던 김현호가 떠올랐다. 같은 S급을 만만하게 봐서는 안 된다. 이 자리에서 결판을 내고 싶었다. 그러려면 여기서 몬스터나 썰고 있을 순 없다.
세아는 결계를 슬쩍 돌아보았다. 안에 갇히다시피 한 곽남주가 창백한 얼굴로 웅크려 있었다. 괜찮겠지, 대강 생각한 세아는 등을 돌리고 뛰기 시작했다. 물결처럼 밀려오는 몬스터를 학살하며 반대 방향으로 거슬러 올랐다.
분명 카일리는 가까이 있다. 세아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아야 할 테니까. 세아는 멈추지 않고 뛰었다. 몬스터가 몰려 번거로울 때는 와이어를 사용해 날아올랐다. 그녀의 생각이 옳다면 이 몬스터 떼의 근원지에 카일리가 있을 것이다.
얼마나 달렸을까, 마침내 보았다. 수십 개의 레버 앞에 우뚝 선 카일리의 뒷모습을.
“카일리!”
카일리가 막 레버 하나를 내리려는 순간 세아가 외쳤다. 카일리는 무언가에 얻어맞은 듯 놀라 휙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에 이쪽으로 달려오는 세아가, 그리고 그녀의 뒤를 쫓는 몬스터 떼가 비쳤다.
“당장 그만둬!”
그러나 카일리는 세아의 말을 듣는 대신 달려오는 그녀 쪽으로 손바닥을 펼쳤다. 세아는 카일리의 손바닥에서 검은 구체가 응집되는 걸 보고 욕을 내뱉었다. 막을 틈도 없이, 구체가 팍 터지더니 갑자기 사방이 어둠에 잠겼다. 눈앞에서 잉크가 터진 듯했다.
끼이이― 몬스터의 비명과 그들끼리 엉켜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세아는 당황하지 않고 뛰기를 멈추었다.
카일리의 주 속성은 어둠. 시전자와 시전자의 파티를 제외한 모두가 시력을 잃은 듯한 암흑에 잠긴다. 세아는 이전 생에서 몇 번 이 스킬을 보았다. 물론 그때의 세아는 카일리의 파티였으므로 어둠에 갇히지 않았지만.
“카일리. 왜 이러는 거야?”
물음과 동시에 세아는 결계를 발동시켰다. 세아를 중심으로 반구형 막이 생성되었을 테지만, 정작 세아는 그걸 볼 수 없었다.
“넌 이거 못 깨. 그냥 나와서 대화하자.”
세아의 결계는 대단히 강력하여, 같은 S급 헌터 세 사람이 달라붙어 공격을 퍼부어야 겨우 깰 수 있는 수준이었다. 공격도 방어도 세아를 따라올 자는 없었다.
‘이렇게 강한데 마음대로 안 되는 일이 너무 많아.’
한숨을 참으며 막막한 어둠을 노려보았다. 카일리는 어디 있을까. 트랩을 작동시키는 건 멈춘 모양이다. 물론 대화할 의지가 생겨서 그런 것 같진 않았다.
세아는 좀 쉬고 싶어서 결계 안에서 철퍼덕 주저앉았다. 그래도 이준이나 현호처럼 갑자기 뒤통수를 갈기지 않고 트랩으로 예고를 해 줘서 고마웠다. 절친한 사이인 양 다가와 칼을 쑤셨다면 또 당했을지도 모른다. 문득 이준의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카일리도 믿지 말아요. 정말 던전이 그리워서 여기까지 따라왔을 리 없어요.’
사실 카일리에게 다른 목적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다. 그게 뭐든 알 바 아니라 신경 쓰지 않았을 뿐. 이렇게 방해할 줄 알았다면 무슨 수를 써서든 떼어 놓고 오는 건데. 낭패감에 입 안이 썼다.
“나 죽이려고 같이 온 거야?”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세아는 인내심을 가지려 애썼다. 그녀는 보통 몇 가지 원칙을 가지고 움직이는데, 가장 강한 사람은 그만큼 강한 원칙에 묶여야 한다고 믿는 탓이었다.
그 원칙 중 하나, 능력으로 몬스터가 아닌 사람을 해치지 말자. 어차피 S급이고 사회 지도층이나 다름없으니 힘으로 다치게 하지 말고 말로, 권력으로 하자.
대단한 도덕군자라 그런 건 아니다. 그저 내키는 대로 살다가 제풀에 걸려 넘어지는 헌터를 많이 봤을 뿐.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을 망치지 않기 위한 원칙이었다.
그러니까 지금처럼 위급하고 황당한 상황에서는 원칙을 잊어도 좋다.
세아는 그대로 몸에 힘을 풀고 바닥에 털썩 드러누웠다. 딱딱하고 차가운 바닥에 누우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결계를 풀고 발동어를 외치는 목소리는 낮고 착잡했다.
“불꽃놀이.”
세아의 심장 부근에서 한 줄기 붉은빛이 솟아오른다. 허공을 향해 일직선으로,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똑바로. 어둠을 가르고 나아가는 연약한 신호탄 같았다.
펑.
소리는 요란하지 않았다. 깊은 동굴에서 나온 소리처럼 깊고 낮고 언뜻 느끼기에는 고요하기까지 했다. 세아는 바닥에 누운 채 허공 한 지점에 멈춰 미동도 없는 불빛을 잠시 바라보았다.
사용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살상 스킬치고는 꽤 예쁘다.
곧 주먹만 하던 불빛이 수십, 수백 갈래로 갈라져 나갔다. 정말로 불꽃이 터지듯이. 그러나 하늘에서 허무하게 스러지고 마는 불꽃이 아니었다. 높은 곳에서 아래로 고속 낙하하는 수백 개의 폭탄이나 다름없었다.
펑, 펑, 펑! 하나하나 바닥에 떨어질 때마다 언제 고요했냐는 듯 폭음을 동반한다. 그러나 그 폭음마저도 깊고 나직하다. 시전자에게는 상처를 입히지 않아, 세아는 정말 불꽃 축제라도 감상하듯 어둠 속에 누워 눈만 깜빡였다.
불꽃이 떨어진 자리마다 어둠이 물러난다. 피할 곳 없이 빼곡하게 내리꽂힌다. 이 스킬의 좋은 점은 멈추고 싶을 때까지 계속 지속된다는 것. 기력을 소진해야 하지만 이 정도는 우스웠다.
펑, 펑― 잠시 평화롭던 옛 시절로 돌아간 것 같다.
생을 거듭할수록 이상해지는 정이준. 시스템이 주는 안락을 포기하기 싫어 자신을 찌른 김현호. 갑자기 사라진 서아정과 돌연 나타난 협회장. 도움 되는 일이라곤 전혀 없는 빈혈 연구원 곽남주. 그리고 다시, 함께 영원히 살자던 정이준.
그 순간 마치 불을 켠 듯 어둠이 사라졌다.
세아는 길고 느리게 숨을 내쉬었다. 죽지는 않았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몸을 일으켰는데, 멀지 않은 곳에 엎어진 카일리의 몸뚱이가 보였다.
완전히 일어난 세아는 저벅저벅 그쪽으로 다가갔다. 카일리는 스킬을 사용해 불길을 막은 듯 멀쩡했다. 물론, 생명은 멀쩡했다는 이야기다. 머리카락이며 옷, 얼굴과 팔다리가 다 뜨거운 불꽃에 그슬려 엉망이었다.
“카일리.”
포션이 있지만 쓰지 않았다. 이유를 듣기 전까지는, 어쩌면 이유를 들은 후에도 카일리를 믿을 수 없다. 세아는 카일리 옆에 쪼그려 앉아, 그녀가 멍하게 눈을 깜빡이는 걸 보고만 있었다.
“왜 날 죽이려고 해?”
카일리는 대답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러나 심한 화상 때문에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듯했다. 목구멍까지 타진 않았을 텐데, 그렇게 생각한 세아가 다시 물었다.
“협회가 시켰어?”
“너…… 던전…… 다 없애려고 한다며.”
그야말로 다 죽어 가는 목소리였다. 세아는 한숨을 내쉬며 손으로 눈가를 문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