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누가 그래, 협회가? 그래서 나 막으려고 여기까지 따라온 거야?”
“없애면 안 돼…….”
“왜, 너도 누리고 있는 거 포기하기 싫어?”
이러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김현호와 그랬듯, 카일리 역시 기습을 시도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여기서 같은 S급 헌터를 죽이는 건 좀 찜찜하고, 나중에 뒷수습도 어렵다. 되도록 이번 생에서 퀘스트를 클리어하고 싶어서 행동이 조심스러웠다.
“그게 아니, 아니야……. 콜록, 컥.”
카일리는 힘겹게 중얼거리며 바닥에 닿은 얼굴을 좌우로 젓기까지 했다. 세아는 재촉하는 대신 기다렸다.
“스테파니가 갇혀 있단 말이야. 던전에…… 던전에 갇혔어……. 넌 몰라.”
“스테파니?”
세아가 얼굴을 찡그리고 되물었다. 스테파니, 언뜻 기억이 나는 듯도 했다. 카일리의 여동생이었던 것 같은데 무슨 사정이었는지는 떠올릴 수 없었다. 그러다 반짝 불이 켜지듯 제대로 생각났다.
스테파니는 카일리와 열 살 넘게 차이 나는 소녀 헌터로, 언니보다 한참 못한 C급 헌터지만 채집과 아이템 제작 스킬이 대부분 A였다. 둘은 재능 있는 헌터 자매로 매스컴에도 자주 이름을 올렸다.
그러던 어느 날, 스테파니가 약초 던전에서 사라졌다. 함께 있던 카일리는 반쯤 정신을 놓고 동생이 어디론가 빨려 들어갔다고 말했다. 정말 안 됐지만 그런 일은 흔하다. 헌터라고 던전에서 늘 안전한 건 아니고, 약초 던전처럼 평화로운 곳에도 변수는 존재한다.
세아는 스테파니를 기억했다. 마흔 살 무렵 숨을 거두던 생, 자기가 죽기 전 스테파니는 돌아왔다. 싸늘한 시체로.
“지금쯤이면 이미 죽었을 거야.”
무의식적으로 그 말을 뱉은 순간, 세아는 깜짝 놀라 손으로 자기 입을 가렸다. 이런 말을 해선 안 되는 거였는데.
카일리가 눈을 번뜩이며 세아를 노려보았다.
“내 동생 살아 있어. 살아 있어, 살아 있다고! 난 알아, 난 느낄 수 있어, 걘 아직 거기서 살아서 날 기다린단 말이야!”
“카일리, 내 말은…….”
“지금 던전을 없애면? 없애면 내 동생은 어떻게 되는데, 내 동생은 어떻게 되냐고, 거기서 죽어 버리잖아!”
카일리는 흥분과 분노, 좌절과 슬픔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녀는 화상을 입은 손으로 미친 듯이 머리를 쥐어뜯고 비명을 질렀다. 마치 짐승이 울부짖는 듯 괴이한 소리가 마구 터져 나왔다.
“곽남주 말이 사실이었어, 사실이었어, 너 정말 없애려고 하는구나. 그게 다 사실이었어, 설마 했는데 사실이었어!”
반쯤 정신을 놓친 카일리가 악령에라도 들린 듯 말을 토하듯 쏟아 냈다. 그러나 세아는 카일리를 다독여 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카일리가 답하지 못할 걸 알면서도 느리게 되뇌듯 물었다.
“곽남주가 그런 말을 했다? 너한테…… 곽남주가?”
세아는 그대로 벌떡 일어나 곽남주가 있던 곳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멀리 가지 못해 우뚝 멈춰 섰다.
“아아악! 으아아악!”
짐승의 울부짖음 같다. 세아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걸 느끼며 뒤를 돌아보았다. 바닥에 엎드린 카일리가 패닉에 빠져 맨주먹으로 바닥을 내리치는 게 보였다. 날것 그대로의 고통이다.
형제 없는 세아는 카일리의 고통을 모른다. 아니, 안다 해도 어쩔 수 없다. 카일리와 스테파니를 위해 시간을 두고 기다리기엔 너무 많은 날을 살아왔다.
“아, 진짜.”
세아는 완전히 몸을 돌이켜 카일리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곧 그녀가 짐을 뒤져 포션을 우르르 쏟았다. 단단한 병이 바닥에 부딪치며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세아는 상처도 잊은 채 통곡하는 카일리의 어깨를 짚었다.
이 정도로 친한 사이 아닌데. 세아는 어색하게 카일리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포션 쓰고 던전 밖에서 만나. 내가 스테파니 찾아 줄게. 어떻게 찾아야 할지 알아.”
“뭐?”
카일리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구명줄이라도 발견한 듯 세아의 팔목을 세게 붙잡았다. 통증이 느껴질 정도라 세아가 얼굴을 찡그렸지만, 카일리는 그걸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안다고? 안다고? 네가 어떻게 알아, 정말 알아?”
“화, 확실하게 아는 건 아니지만 짐작은 가.”
미래를 살았으니 안다고 할 수 없으니 세아는 적당히 둘러댔다. 그러면서도 마음은 멀리 가 있었다. 다른 S급 헌터들도 적이 될 텐데, 카일리까지 적으로 돌릴 필요는 없다. 차라리 던전을 뒤져 시신이라도 찾아 주고 같은 편으로 만들자.
그리고 어쩌면…… 스테파니는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
지난 생에서 약초 던전을 탐험하던 헌터가 우연히 트랩을 건드려 스테파니의 시신을 찾아냈다. 당시 시신 상태가 나쁘지 않았다고 기사가 났으니, 어쩌면 아직은 살아 있을지도.
“고마워. 세아, 고마워, 고마워, 진짜 정말 고마워!”
“그래, 그래. 알았어. 알았으니까 이따 봐.”
세아는 대충 카일리의 손을 떨쳐내고 뒤돌아 달렸다. 카일리, 옆에서 볼 때는 다 잊고 멀쩡하게 사는 것 같더니 그렇지도 않았다. 마음 깊은 곳의 트라우마가 저렇게 사람을 돌변하게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아의 마음에서 카일리 문제가 완전히 지워졌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힘껏 달려갔다. 금세 곽남주가 있던 곳에 다다랐다.
그는 몬스터 시신 사이에 혼자 서 있었다. 표백제라도 맞은 듯 얼굴이 창백했다. 피와 끈적끈적한 진액이 흐르는 시신을 보다가 허리를 꺾어 구역질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세아는 그 가증스러운 연기에 속지 않았다. 그대로 달려가 곽남주의 멱살을 잡아채 밀었다.
“으악!”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곽남주가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그의 옆에는 외계인 켄타우로스와 표범 몬스터의 시체가 널려 있었다. 곽남주는 흰자위가 보이도록 눈을 굴려 시체를 확인하고 누운 채로 토하려 했다.
“야.”
세아가 손을 들어 턱 그의 입을 막았다. 곽남주의 눈동자가 파들파들 떨렸다. 이 뻔뻔한 새끼, 세아가 땀에 젖은 얼굴로 웃었다.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냥 저절로 웃음이 났다.
“너지?”
이렇게 가까이 두고도 몰랐다니. 내내 수상한 놈이라고, 이상한 놈이라고 의심해 놓고 알아차리지 못했다니. 곽남주가 핏기 가신 얼굴로 마구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입과 코를 뭉개는 힘이 너무 강해서 얼굴이 제대로 움직이지도 않았다.
세아는 손을 떼고 그의 위에 올라탄 채로 물었다.
“그때도 너였잖아. 서아정.”
뭔가 이상했다. 김현호와 서아정 커플과 함께 약초 던전에 갔을 때, 세아는 이준과 히든 퀘스트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서아정은 김현호에게 가서 몬스터 멸종이 어쩌고 하며 이야기를 전했다. 어떻게 알았을까, 당연히 의심스러웠다.
그래서 돌아오자마자 현호에게 서아정 이야기를 꺼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그녀가 이미 죽었다는 것뿐. 당장 해결할 일이 너무 많았기에 더 깊이 생각하지 못했다.
“이제야 다 맞아떨어져. 너 서아정이고 곽남주잖아. 안전한 미각성자인 척 나타나서, 슬쩍 S급 사이에 끼어들어 이간질…….”
왜 이런 짓을 할까. 서아정이 말을 전해 세아는 김현호에게 살해당했다. 곽남주가 입을 함부로 놀려 카일리를 자극했다. 세아는 한 번 죽었고 한 번은 죽을 ‘뻔’한 것이다.
이런 짓을 해야 하는 존재, 몸을 바꿔 가며 농간을 부릴 능력이 있는 존재는 딱 하나뿐이다. 세아가 곽남주의 두 어깨를 세게 누르며 물었다.
“너, 시스템이지.”
곽남주의 얼굴에서 표정이 싹 사라졌다. 석고로 만든 인형으로 변한 듯 단숨에 무표정이 된다. 눈, 코, 입, 경련하던 뺨까지 얌전해지고 영혼이 사라진 듯 밋밋하게 변한다. 그 무감한 얼굴에 흐르는 식은땀이 더없이 이질적이다.
다음 순간, 곽남주의 입이 눈 아래까지 초승달 모양으로 쭉 찢어졌다. 언뜻 스마일맨처럼 보였으나 세아는 물러나지 않았다. 그녀는 그대로 곽남주를 누른 채 변하는 얼굴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곧 기괴한 입술이 위아래로 움직였다.
“생각보다 늦었네?”
여전히 곽남주 목소리다. 괴물 같은 얼굴로 인간의 목소리를 내니 기괴했지만 세아는 차분히 그의 말을 들었다.
“난 이 던전 들어올 때 바로 알아차릴 줄 알았지. 내가 널 너무 과대평가했나 봐.”
“개소리하지 마.”
“그렇잖아? 애초에 2인 던전이었는데 말이야. 나하고 카일리까지 같이 들어오는데, 이상한 줄도 모르고.”
세아가 잠시 그를 내려다보며 눈을 깜빡이다 곧 헛웃음을 쳤다. 시발, 작게 읊조리는 소리가 곽남주의 귀에 똑똑히 꽂혔다. 곧 세아는 허탈한 투로 받아쳤다.
“너도 한 열 번 죽고 살아나 봐. 그런 거 안 잊어버리나.”
“열두 번 죽었어.”
곽남주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세아의 말을 정정했다. 그렇게 많이 죽었나?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들으니 더 기가 막혔다. 세아는 더 추궁하는 대신 곽남주를 놓아 주고 일어섰다. 곽남주는 바닥에 누운 그대로 상체만 일으켜 앉았다.
“안 죽이려고?”
“어차피 날 직접 공격하진 못하잖아. 그러니까 미각성자 몸 빼앗고, S급들 뒤에 숨어 그림자처럼 훌쩍훌쩍 다니며 이간질이나 하겠지.”
세아는 덤덤하게 대꾸했다. 카일리가 포션을 너무 빨리 마시고 여기까지 달려오면 안 되는데. 처음으로 시스템과 제대로 조우했으니 이 기회에 몇 가지 알아내고 싶었다.
그녀는 반박하지 않고 무력하게 앉은 곽남주를 내려다보며 툭 물었다.
“너 죽기 싫어서 이러냐? 나한테 그런 히든 퀘스트가 나타나면 안 되는 거였는데, 버그 때문에 생겨서 참 안됐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뻔한 이야기라 세아도 답을 재촉하진 않았다.
“정이준 정화 스킬 글자 깨진 것도 네가 수작 부려서겠네. 던전 입장 인원도 바꿀 수 있고, 스킬 설명도 깨뜨릴 수 있는데, 헌터 몸은 못 빼앗고 날 직접 죽일 수도 없다…….”
세아가 빙긋 웃었다.
“나야말로 널 과대평가했네.”
시스템이라기에 대단한 줄 알았다. 그런데 자기 안의 기능은 이리저리 손댈 수 있어도 헌터는 조작하거나 조종할 수 없다. 그래서 무해해 보이는 미각성자의 몸을 취해 헌터끼리 서로 죽이게 한다. 어쩌면 거듭되던 정이준의 배신도…….
“잘난 척하지 마.”
곽남주의 말에 생각이 뚝 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