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네가 모르는 거 하나 알려 줄까? 세상이 갑자기 바뀐 거, 그거 다 내가 한 짓이라고 생각하지? 내가 서아정도 죽이고 협회장도 바꿔서 일을 다 꼬아 놨다고?”
“아니라는 거야?”
“아니지, 그럼. 잘 들어, 이세아.”
곽남주가 비밀 이야기라도 하는 듯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뜬 세아를 향해 속삭였다.
“그건 다 정이준 때문이야.”
“정이준이 죽였다고?”
세아는 믿을 수 없어서 되물었다.
말도 안 된다. 자기가 기억하지 못하는 5년, 그 사이에 정이준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서아정도 김송숙 전 협회장도 죽였단 말인가? 그 역시 S급이니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설마 정이준이?
‘그냥 잘못된 세상에서 누나랑 살래요.’
웃는 얼굴이 아득하게 떠오른다. 세아는 다시 되뇌었다. 설마 정이준이?
세아의 혼란을 알아차린 곽남주의 입에서 맑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왜 못 믿어? 너 그 여우같은 새끼한테 홀렸구나. 새끼 여우처럼 살살 눈웃음치면서 누나, 누나 하니까 마음이 동하든?”
세아의 표정에 금이 갔다. 그녀가 불쾌한 얼굴로 내뱉었다.
“닥쳐.”
“나도 세상이 이렇게 달라지길 원하지 않았어.”
곽남주가 어쩐지 답답한 어조로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린지 알아듣지 못해서 세아는 침묵했다. 무언가 더 부연할 줄 알았는데, 갑자기 곽남주가 세아를 똑바로 응시하더니 빙긋 웃었다.
“이번엔 들켰으니, 다음 세상에서 만나.”
그 순간 곽남주의 입이 원래 크기로 빠르게 줄어들었다. 동시에 꼿꼿하게 세워져 있던 상체에서 힘이 빠지더니 바닥으로 무너졌다. 세아는 너무 놀라 딱 굳어 있다가, 천천히 곽남주 옆에 한쪽 무릎을 대고 앉았다. 코 아래 손가락을 대 봤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세아!”
뒤에서 카일리가 달려왔다. 옷이 군데군데 타서 없어지긴 했지만, 포션을 마셨는지 발랐는지 몸은 멀쩡해 보였다. 세아는 곽남주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욕이라도 퍼붓고 싶었지만 한 마디밖에 할 수 없었다.
“죽었어.”
“뭐?”
카일리가 경악하여 곽남주를 내려다보았다. 세아는 한숨을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나가자.”
13.23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다고, 세아는 충분히 경고했다.
카일리는 세아가 스테파니를 찾아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들떠 침착함을 잃은 상태였다. 들어온 곳을 통해 밖으로 나가는 동안에도, 카일리는 끊임없이 스테파니에 관한 것을 물었다.
“약초 던전 어디에 있는데? 어떻게 알 수 있는데?”
몸이 저절로 천천히 떠오르는 걸 느끼며 세아가 대수롭지 않은 투로 답했다.
“트랩을 건드리면 돼. 스테파니는 그 트랩 때문에 열린 공간에 갇힌 거니까.”
“하지만 나도 다른 사람들도 그 던전을 여러 번 뒤졌어. 미발견 트랩이 또 있다고?”
“아직 발견되지 않은 형태의 트랩이긴 해.”
대답하기가 피곤했고, 자기와 상의도 해 보지 않고 죽이려 한 주제에 뻔뻔스럽게 말을 붙이는 카일리가 성가셨지만 세아는 최대한 친절하게 설명했다.
스테파니를 구해 주고 나면, 적어도 시신이라도 찾아 주면 카일리의 협조도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죽인다고 달려드는 사람이 하나 사라지는 것만으로도 세아로선 기쁜 일이었다.
카일리는 잠시 생각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시작했다.
“그런데 넌 왜…….”
던전을 없애려는 거야,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눈앞이 환해졌다. 대답할 마음 없던 세아로선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물론 바닥에 발을 딛자마자 보인 광경은 전혀 다행스럽지 않았다.
“꼼짝 마십시오!”
반갑지 않은 외침과 함께 상황이 한 번에 파악되었다.
가장 먼저 보인 건 이쪽을 향해 총을 겨눈 수많은 사람들. 그들이 구멍 형태의 던전 입구를 빙 감싼 상태였고, 검고 긴 총구가 위협적으로 번뜩였다. 세아는 그들 너머의 협회 사람들을 보았다.
일단 올 걸 알고 있었던 협회장 최두정. 그가 거느린 여러 수행 인원들, 가운을 입은 연구원들, 곽남주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온 사람들. 최두정이 전화했을 때 곽남주는 시체가 아니었지만, 이제 시체로 변했으니 수습자들도 헛걸음은 하지 않겠다 싶었다.
그들 곁에 여기 있을 줄 전혀 몰랐던 낯익은 사람이 하나 더 보였다. 그의 이름은 카일리의 입에서 튀어나갔다.
“오스카?”
알고 지내던 S급 헌터가 갑자기 나타나니 카일리는 깜짝 놀란 모양이었다. 오스카는 독일 출신 헌터인데도 한때 카일리와 각별했었다. 그와 친해지고 싶어서 카일리는 독일어까지 배운 적 있었다.
하지만 세아는 그쪽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그녀는 오스카 옆에 만신창이가 된 채 간신히 서 있는 정이준을 바라볼 뿐이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서 있는 게 아니라 오스카에 의해 부축을 받고 있었다.
바람이 서늘하게 목덜미를 쓸고 지나갔다. 세아는 문제가 되는 것들을 빠르게 눈으로 훑었다.
‘일단 총.’
총구는 둥글게 열려 있었고, 결계를 만들면 무사하겠지만 결계 안에서 공격할 수 없으니 버티기 싸움이 될 뿐이다. 또 결계는 기본적으로 헌터나 몬스터의 공격에 대비한 스킬이니 총알을 영원히 막아 낼 수 없다.
다음은 정이준. 그에게 잘난 속박 스킬이 있다 해도 S급 헌터까지 앞세워 떼로 몰려오니 뾰족한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왜 저렇게 얻어맞았는지는 모르겠지만 협회가 세아의 정화를 두고 거래를 시도했을 건 분명했다.
마지막은 여기 왜 있는지 알 수 없는 오스카. 몸에 비해 얼굴이 작고, 콧대가 선명해 눈이 우묵하게 들어간 것처럼 보인다. 눈빛을 제대로 읽을 수 없다. 그의 특기는 최면과 세뇌. 협회장이 그를 여기까지 데려온 데는 이유가 있으리라.
침묵의 균형을 깬 건 최두정이었다.
“이세아 헌터, 순순히 협력하십시오.”
“뭘 협력하라고요?”
세아는 최대한 태연한 어조로 물었다. 스크롤은 주머니에 있다. 결계를 만들고 스크롤을 찢어 달아난다 해도 정이준은 여기 두고 가야 한다. 그래도 괜찮을까. 아무래도 오스카의 대표 스킬이 마음에 걸렸다.
“당신이 정말 최초의 버그가 아니라면, 와서 정화 스킬에 응하면 됩니다. 정말 평범한 헌터라면 정화 스킬에도 무사할 겁니다.”
“이렇게 총구 들이대고 무례하게 부탁할 일은 아닌 것 같네요.”
세아가 빈정거렸으나 협회장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총을 든 남자들 사이로 걸어와 세아와 똑바로 마주 보고 섰다.
“협회를 바보로 보지 마십시오. 최초의 버그가 시스템을 없애려 한다는 걸 알아냈으니까요. 아마 파생 버그는 자신을 지키기 위한 시스템의 디버그 작용이겠죠. 여기, 정이준 헌터 역시 그중 하나고요.”
세아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한국을 떠날 땐 그렇게 시원하게 보내 주더니, 여기까지 쫓아와서 갑자기 속셈을 드러낸다.
“켈리포니아로 간다고 할 때부터 수상했는데, 그 구멍 속에 있나요? 시스템을 없앨 수 있는 던전이.”
여기서 말려들어서는 안 된다. 세아는 일단 입술을 움직여 답했다.
“잘 모르겠지만 시스템을 없앨 수도 있다니, 참 뜻밖의 소식이네요. 그럼 세상으로서는 참 다행이겠죠?”
“혼자 꽃밭에 사는 척하지 마십시오. 순순히 협조하지 않으면 강제할 수밖에 없습니다.”
역시, 돈줄 잃기 싫다 그거지. 세아는 빙긋 웃었다.
시선을 돌려 정이준을 살폈다. 눈빛이 멀쩡한 걸 보니 아직 오스카에게 당한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여기 두고 가면 틀림없이 문제가 생기겠지. 이 사람들을 다 뚫고 단숨에 정이준을 구하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그 순간, 시스템의 말이 떠올랐다.
‘그건 다 정이준 때문이야.’
대체 무슨 뜻이었을까. 서아정을 정이준이 죽였단 말인가. 김송숙 협회장을 정이준이 죽이기라도 했단 말인가.
세아가 주먹을 말아 쥐었다. 흔들려선 안 된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시스템의 말이다. 그가 이제껏 S급을 이간질해 자신을 몇 번이나 죽이려 했던 걸 기억하자. 애초에 시스템이 자신에게 도움 되는 말을 해 줬을 리 없다.
이준과 눈이 마주쳤다. 눈빛으로 알 수 있는 건 많지 않아서, 세아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알아차릴 수 없었다. 그를 믿어야 할지, 끈질기게 의심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다시 선택의 순간이다. 믿으면서 의심하고, 의심하면서 믿는 건 불가능하다.
세아는 이준을 향해 약간 미소를 보였다.
‘내가 틀렸으면 죽은 다음 다시 하면 되지.’
하도 죽고 살아났더니 이제 이런 생각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시선이 곧장 최두정에게로 돌아갔다. 저 눈깔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마음 같아선 손을 쑥 집어넣어서 눈을 파 버리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저 사람이 협회장이라서가 아니다.
세아는 반격할 틈을 주지 않고 고개를 살짝 오른쪽으로 틀었다.
삭, 칼이 횡으로 지나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최두정의 목이 바닥에 뚝 떨어졌다. 너무 놀라 우왕좌왕하는 전투 인력이 정신을 차리기 전에 세아가 결계를 펼쳤다. 풀썩, 최두정의 몸이 쓰러진 건 그 다음이었다.
“씨발, 사람 안 죽이려고 했는데 왜 까불어.”
“세, 세아, 너 미쳤어? 너 어쩌려고 이래?”
옆에서 카일리가 기겁하며 외쳤다. 결계 너머는 다른 세상인 듯 혼란스러운데, 세아만 느긋했다. 세아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것도 틀렸으면 다시 하면 돼.”
“뭐?”
“가자, 카일리. 정이준은 괜찮을 거야.”
협회에서 아직 필요로 하는 사람이니까.
그 말을 삼킨 세아는 이준이 준 지정 이동 스크롤을 꺼냈다. 세상에 없다고 해도 믿을 수 있는 희귀한 아이템이라, 세아의 돌발 행동에 놀란 카일리조차 잠시 거기 시선을 빼앗겼다.
“같이 찢고 갈 거야. 장소는 한국에 있는 약초 던전.”
“뭐? 거긴 대체 왜…….”
“이유가 있어.”
세아는 마지막으로 이준의 모습을 확인했다. 사람들이 마구 뛰어 다니고 이쪽으로 총을 난사하고 있어서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세아는 그의 얼굴로 안도가 번지는 걸 봤다고 생각했다.
“가자, 카일리.”
이준은 무사할 것이다. 꼭 무사해야 한다.
세아는 카일리와 스크롤을 한쪽씩 나눠 들었다. 그대로 스크롤이 찢어졌고 둘의 몸이 순식간에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