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급의 히든 퀘스트-36화 (36/112)

36화.

5장. 세뇌

13.24

이준은 어딘지도 모를 작은 방에 갇혔다.

여기가 한국인지, 그대로 미국인지, 아무것도 알 수 없다. 눈을 떴을 때는 이미 감금된 상태였다. 이준에게도 공격 스킬이 몇 가지 있었지만, 특수 제작된 방에서는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았다.

천장 구석에 스피커만 하나 달린 방은 불법 치료실처럼 을씨년스러웠다. 부술 수 없도록 단단한 철망으로 감싸 둔 스피커를 가만히 올려다보던 이준은 눈을 꾹 감았다 떴다. 피로감이 몰려왔다.

창문조차 없다. 여기 있으면 낮인지 밤인지도 분간하지 못하게 될 것 같았다. 아니, 사실 이미 시간을 알 수 없어 불안했다.

그때, 단단한 철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들어왔다. 이준은 그가 누구인지 잘 알았다. 협회와 함께 움직이던 시절, 그에게 찾아가 정화 스킬을 사용한 적이 있으므로.

독일 출신 헌터 오스카였다. 만들어서 붙여 놓은 듯 높은 콧대가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딱딱하고 진중한 인상인데, 웃지도 않으니 마네킹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준은 빙긋 웃었다.

“안녕하세요.”

“그래.”

대답은 영어로 나왔다. 오스카는 S급 헌터로 각성하자마자 영어를 배웠다. 세계 무대에서 활동하기 위해서는 영어가 필수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렇게 그는 그런 식으로 바뀐 세상에 누구보다 빠르게 적응했다.

“전 왜 갇힌 거죠? 반항하지도 않았는데.”

“이세아 헌터를 정화하는 걸 거부했으니까.”

무성의한 투로 답한 후 오스카는 오른손 끝을 이준의 이마에 댔다. 오싹한 한기에 이준은 고개를 틀어 손을 피했다. 오스카는 달려드는 대신 침착하게 설명했다.

“나쁜 짓을 하려는 게 아니야.”

“세뇌하려고 했잖아요.”

이준이 웃는 낯으로 이죽거렸다.

협회와 오래 협력해서 잘 안다. 오스카의 특기는 최면과 세뇌, 위험한 능력이라 협회는 그를 누구보다도 엄격히 감시하고 통제하려 했다. 물론 그런 협회가 그의 능력을 이용해 어떤 지저분한 뒷공작을 부렸는지는 이준도 몰랐다.

그리고 오스카를 이 방에 들여보냈다는 건 이준 자신도 세뇌하려 한다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준은 한 걸음 물러나며 살짝 주위를 둘러보았다. 부수고 나갈 틈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스카는 이준의 생각을 읽은 듯 느긋하게 말을 건넸다.

“나갈 수 없을 거야. 이 방은 던전 광물로 만들어졌어. 이세아 헌터 정도라면 벽이 수백 겹쯤 있어도 다 뚫고 나가겠지만, 넌 치유 계열이야. 잘난 속박과 정화 스킬만 제외하면 나보다도 더 약해.”

구구절절 옳은 소리였다.

이준은 그 어떤 헌터보다도 강력한 치유 능력을 지녔고, 그 능력은 최상급 포션보다도 뛰어났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기본적인 공격은 가능하지만 일정 수준 이상의 데미지는 입힐 수 없다.

이준은 아주 잠깐 고민했다. 이대로 오스카를 속박하고 목을 비틀어 죽일까. 역시 그래야겠다. 이준이 입을 벌리려는 순간, 갑자기 문이 다시 열리고 총 든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좁은 방에 사람이 꽉 찼다. 오스카가 가는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스킬을 쓸 생각은 하지 마. 내 이름을 말하는 순간 넌 죽을 테니까.”

이준은 번뜩이는 총구를 노려보았다.

세아만큼 강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으면 오스카나 총 든 사람들 정도는 간단히 해치우고 여길 벗어날 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그는 그만한 능력을 받지 못했다. 그렇다면 가지고 있는 능력 안에서 해결해야 한다.

오스카가 어조를 바꾸어 이준을 달랬다.

“아주 쉬운 문제야. 넌 그냥 이세아를 정화하겠다고 말하기만 하면 돼.”

“최두정 협회장이 죽었는데 아직도 그 꿈을 못 버렸나요? 당신도 들었잖아요, 협회는 그저 가진 걸 내려놓기 싫어서 이러는 것뿐입니다.”

“그래, 그게 정확히 내가 원하는 거야.”

오스카가 덤덤하게 대꾸했다. 이 정도 말에 그가 흔들릴 거라고는 기대하지도 않았으므로 이준도 태연했다.

세아가 한국 협회장의 목을 쳤지만 앞으로도 쉽지 않은 길이 될 것이다. 오스카만 해도 S급 헌터로서 가질 수 있는 것들이 아쉬워 시스템을 지키려 한다. 다른 헌터라고 다를까?

“난 절대 이세아 헌터를 정화하지 않아요.”

이준이 빙긋 웃었다.

“날 죽이는 게 더 쉬울 겁니다.”

발끈할 줄 알았는데 오스카는 조용했다. 그는 이준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갑자기 물었다.

“자기 자신이 그렇게 강하다고 생각해? 내 스킬을 정신력으로 이겨 낼 정도로?”

“날 세뇌해서 이세아 헌터를 정화하게 할 셈이겠죠. 하지만 불가능할걸요.”

오스카는 처음으로 웃었다. 마치 어린 고양이가 털을 세우고 다 자라지도 않은 이를 드러내는 걸 본 사람처럼. 그의 눈에 비친 이준이 딱 그랬다.

사람들은 오스카의 힘을 무시하고 우습게 본다. ‘마음의 힘’ 어쩌고를 믿는 것이다. 아무리 스킬에 당해도 내가 그런 짓까지 할 리는 없어, 나는 결국 올바른 선택을 할 거야. 그렇게 자만의 술을 마시고 취해 버린다.

하지만 굳이 스킬에 당하지 않아도 사람은 광기에 사로잡힌다. 옳지 못한 일을 하면서 죄책감을 느끼기는커녕 자부심을 느낀다. 그렇게 연약한 게 사람인데 어떻게 스킬을 이겨 낸단 말인가.

오스카는 가만히 손을 뻗으며 속삭였다.

“움직이지 마.”

오스카의 손이 다시 이준의 이마에 닿았다. 이준은 몸부림치지 않았다. 세아의 퀘스트에는 자신이 꼭 필요하다. 여기서 죽을 수는 없었다.

그는 자기 자신의 정신력을 믿는 게 아니라 세아를 믿었다.

만일 자신이 세아를 정말 정화하려 한다면, 그런 위험한 순간이 온다면 세아는 망설이지 않고 자신을 죽일 것이다. 최두정의 목을 자른 것처럼 아주 가차 없이.

하늘에 뜬 비행기에서 세아가 한 말이 아득하게 머리를 스쳤다.

‘이번에도 날 배신하면, 너를 영원히 잊어버릴 거야.’

당신은 알까. 잊히는 것보다 당신 손에 죽는 게 몇 배는 더 황홀하리라는 것을.

오스카의 손에서 차갑고 끈적한 것이 흘러들어왔다. 뇌의 착각이겠지만 이준은 그 물질이 자기 뇌를 박박 문질러 씻어 버린다고 느꼈다. 순간 몸이 떨릴 정도로 강한 한기가 찾아들었다.

13.25

세아와 카일리는 약초 던전 한가운데 떨어졌다. 세아는 스크롤을 찢었던 손을 내려다보며 감탄했다.

“이거 진짜 물건이네. 던전 안으로도 이동할 수 있잖아.”

물론 카일리의 눈에는 그녀가 미친 사람처럼 보였다. 정말 세아가 스테파니를 찾아 줄 수 있을지도 의심스러웠다. 그런 와중에 한국 헌터 협회장의 목을 잘라 죽이다니 제정신인가!

카일리는 세아의 팔을 덥석 잡으며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너 진짜 왜 그래? 너희 나라 협회장 목은 왜 잘라? 돌았어?”

“진정해.”

“수배당한다고!”

“절대 그런 일 없어. 오스카나 미국 협회가 그걸 공론화시키고 싶을까?”

“왜 못 시켜?”

세아는 일단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닥과 벽 곳곳에 약초가 가득했다. 깊은 곳으로 들어왔더니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또 모른다. 약초 던전을 통째로 빌린 게 아니니 다른 사람이 여기까지 올지도.

생각을 정리하며 세아가 대강 뱉었다.

“내가 협회장을 죽였다고 한 다음 어쩔 건데. 사람들이 왜 ‘그’ 이세아가 협회장을 죽이기까지 했냐고 묻지 않을까?”

“그게 뭐?”

“나 각성한 다음 과실치사 이력 한 번도 없어. 넌 있지, 카일리.”

카일리의 낯빛이 확 달라졌다.

과실치사는 S급 헌터만의 문제는 아니다. 욱하는 성질이 있거나, 자기가 가진 힘에 취하거나, 때로는 힘을 컨트롤하는 능력이 부족해서 많은 헌터가 ‘실수로’ 사람을 죽인다.

A급까지는 엄격히 처벌받는다. 실제로 헌터 능력을 사용해 미각성자나 다른 헌터를 죽인 이가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경우도 꽤 많다.

문제는 세계에 열세 명뿐인 S급이 그런 실수를 저질렀을 때다. 중요한 전력이고 세계 사회의 안전을 떠받치는 기둥을 ‘작은 실수’ 한 번에 뽑아 버릴 순 없다. 문제는 조용히 묻히거나 무마되곤 했다.

그러나 이세아는 달랐다. 그녀가 사람에게 손을 댄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예전에 실수로 정이준을 한 번 죽인 적 있긴 하지만, 그건 이미 지난 생이다. 사람들은 이세아를, 그녀의 자기 통제 능력을 믿고 있다.

“예전에 술 취한 미각성자가 나한테 시비 걸었을 때 결계도 안 쓰고 그냥 맞아 줬다는 얘기도 유명해. 괜히 팬클럽 있는 게 아니야, 사람들은 날 무슨 자애로운 수호자 취급하거든. 내가 한국 협회장을 죽였다고 하면 사람들은 반드시 이유를 궁금해하겠지.”

“협회 쪽에서 거짓말하면 그만이잖아. 그냥…….”

“그럼 내가 가만히 있을까? 협회가 시스템을 완전히 없애고 안전한 세상을 만들 방법을 알고도 나를 없애려 했다고 말해 볼까? 능력은 헌터가 가졌지만, 세계엔 미각성자가 훨씬 많아. 혼란을 만들고 싶진 않을 거야.”

카일리는 세아의 말을 믿을 수 없는 듯했다. 그녀는 세아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천천히 물었다.

“그럼…… 다른 국가 협회가 이 일을 은폐할 거라고?”

“솔직히 S급 헌터 셋이나 배출한 나라 출신이라고 거들먹거리는 거 다른 놈들도 보기 싫었겠지. 게다가 자기들한테 해될 거 없는데 왜 굳이 나서서 잡음을 만들겠어?”

“그냥 정신이 나가서 협회장을 죽인 게 아니었어?”

“무슨 큰일이 있었다고 내가 정신이 나가?”

세아가 의아한 얼굴로 카일리를 돌아보았다. 카일리는 입을 벙긋거리며 무어라 말하려 하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세아의 정신 상태보다는 자기 동생이 더 중요했으니까.

“스테파니는 미국 약초 던전에서 실종됐는데 왜 여기로 온 거야?”

“내가 예지 능력이 있어서 미래를 보거든.”

“뭐?”

“농담이야. 그냥 추측한 거야. 난 오래전부터 몬스터가 나오지 않는 던전에서 사람들이 왜 자꾸 사라지는지 궁금했어. 몇 가지 연구하다가 이 장소를 찾아낸 건데…… 자세한 걸 말하려면 너무 길어.”

입에서 어찌나 거짓말이 술술 나오는지 세아는 마술을 부리는 기분이었다. 던전에서 사람이 사라지는 이유를 궁금해하긴 개뿔. 그래도 이게 회귀해서 그렇다고 고백하는 것보단 낫다.

무엇보다도 카일리가 원하는 건 스테파니지, 진실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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